[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세월호 가족들은 교회에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교회에서 위로도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참사 이후 이어졌던 목사들의 '막말'은 세월호 가족들을 두 번 세 번 죽이는 일이었지만, 이들 옆에서 대신 욕해 주고 편이 되어 주었던 목사들도 있다. 이들은 이제 세월호 가족들과 어떤 모습으로든 함께하게 될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꾸준히 세월호 가족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던 목사들이 모였다. 예은 엄마·아빠가 다니는 교회 담임으로 안산 합동 분향소 기독교 부스에서 주일 오후 예배를 시작한 박인환 목사(화정교회), 기독교 부스에서 목요 기도회를 진행하고 있는 오상열(기독교평화센터)·김영명 목사, 분향소 앞에 있는 416희망목공방에서 유가족들을 가르치는 안홍택(고기교회)·이진형(청지기교회) 목사. 4월 7일 안산 기독교 부스에서 다섯 명의 목사와 대화를 나눴다.

'목사' 타이틀을 가졌지만 세월호 가족들을 만나는 게 어찌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들은 이제 가족들과 편하게 대화하는 관계가 되었다. 목사 입장에서 가르치려 들지 않고, 오히려 세월호 가족들을 보며 새롭게 배우고 회개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세월호가 이슈가 되지 않는 주류 교회의 현실 속에서, 세월호는 한국교회가 역사 속에서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고 이야기했다.

▲ 세월호 가족 곁에 있는 목사들을 4월 7일 안산 분향소 기독교 예배실에서 만났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내가 무얼 해야 하느냐 물었다

- 세월호 가족들과 어떻게 연이 닿게 되었나요.

오상열 / 우리가 다 2014년 4월 16일 상황을 지켜봤기 때문에, 참담한 마음에서 세월호와 관련한 일을 시작했던 것 같아요. 제 둘째 아이가 단원고 희생자 아이들과 같은 학년이거든요. 참사 일주일 전에 저한테 그랬어요. "아빠, 저희 이번 수학여행을 제주와 일본 중에서 제주로 가게 됐어요. 배를 타고 갈 거 같아요." 아, 이건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2014년 9월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던 목회자 304인 1박 2일 기도회가 직접적인 계기가 됐어요. 그때 목회자 한 명당 희생자 한 명씩 맡았거든요. 저는 태민이라는 아이를 맡았어요. 기도를 하면서 태민이의 꿈은 뭐였을까, 학교생활은 어땠을까 생각했죠. 그러다 태민이랑 같은 반이었던 영만이 어머니를 만났어요. 영만이 어머니를 통해 다른 기독교인 유가족을 만날 수 있었죠.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어요. 그저 가족들 한 분 한 분 만나서 관계 맺고 그분들 요청에 최대한 부응하는 것뿐이더라고요. 어느 날, 다영이 아버지와 예은이 어머니가 "목사님, 다른 거 하지 말고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기도회를 열어 주세요"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목요 기도회를 시작하게 됐죠.

안홍택 / 참사 당시에는, 아이고 정말…. 그때가 고난주간이었고 다가오는 주일이 부활절이었어요. 부활절에 메시지를 못 전했어요. 도저히 말씀 선포를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다음 주에 떼제 예배를 드렸어요. 떼제 예배는 말씀 선포가 없어요. 교회에 '주님도 울었다'고 쓰고 찬송과 기도를 올렸죠. 교인들이 다 같이 울었어요.

목요 기도회에 한 번씩 참여하고 그랬는데, 어느 날 오상열·박인환 목사님과 유가족들이 저를 만나자고 하세요. 어떻게 제가 목공방을 하는 줄 아셨나 봐요. 그때 다영 아버지가 오셔서 "싸움이 길어질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야 할 텐데…" 하시더라고요. 살아야겠다는 말이 가슴에 남았어요. 엄마들은 공방에서 뜨개질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빠들은 할 게 없다는 거예요. 직장을 그만두신 분도 많고, 또 직장에 다닐 수도 없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작년 7월부터 안산에서 목공방을 시작하게 됐어요.

김영명 / 저는 2012년부터 2015년까지 군목으로 있었어요. 참사가 났을 때 답답하고 힘들었는데, 군에서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어요. 처음에는 군 교회에서도 노란 리본도 달고 기도도 하고 그러더니 어느 순간 없어져 버렸어요. 세월호 얘기하면 눈치 받고요. 아무것도 못하며 죄책감이 들었어요. 전역만 하면 뭐라도 해야겠다 생각했죠.

전역을 눈앞에 두고, 나를 가장 원하는 곳에 가자고 다짐했어요. 그래서 눈을 돌려 보니 그곳이 여기더라고요. 전역 이틀 후 목요 기도회에 찾아갔어요. 물론 휴가 때도 계속 왔고, 첫 모임도 같이 했지만요. 전역했다고 가족들이 케이크에 초를 붙여 주셨어요. '이게 내가 할 일이구나'. 신학생 때보다 더 강한 소명 의식을 느꼈어요. 또 교회가 가족들에게 몹쓸 짓을 많이 한 것에 대한 죄책감, 나라도 만회해야겠다는 책임감이 있었죠.

박인환 / 저도 군목 출신이에요. 군목으로 가려면 신원 조회를 해야 해요. 제가 갈 당시에는, 신원 조회에서 본인이 학생 운동을 했거나 친척 중에 운동권 출신이 있으면 못 갔어요. 그만큼 저는 평범한 목사라는 거죠. 그런데 요즘 세월호 관련해서 일하고 다니니 완전히 운동권 목사로 낙인찍혔어요.

4월 16일 아침, 운동을 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친구 목사한테 전화가 왔어요. "야 박 목사, 너희 교회에 단원고 학생 있어?"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왜 그러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지금 수학여행 가는 애들이 바다에 빠졌다고, 빨리 TV 보라고 하는 거예요. 보니까 우리 (박은희) 전도사님 딸 예은이가 거기 탄 거예요. 아이고…. 처음 들었던 생각은 '왜 하필 나냐'는 거였어요. 근데 11시쯤 되니까 '전원 구조'라고 떴죠. 지옥과 천당을 오갔어요. 근데 하루 종일 보니까 뭔가 이상해. 다 거짓말이었던 거예요.

제가 이렇게 세월호 가족들과 관계를 가지고 나름 열심히 하는 것은, 솔직히 말하면 우리 교회에 희생자가 있으니까 그런 거죠. 희생자가 없었다면 제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못 나섰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또 하나는, 군목 생활 하면서 억울한 죽음을 너무 많이 봤다는 거예요. 군에서 병사들이 죽으면 그냥 덮어 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군목들은 어느 정도 진실을 알고 있는데 아무 말도 못했어요. 얘기해 봤자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유족들 상처만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장기 복무도 생각하고 군목을 시작했지만, 그런 일을 겪으면서 그냥 의무 기간만 채우고 전역했어요.

2014년 4월 16일에 예감했어요. '이거 쉬운 일 아니다'. 근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참사 후 한 번 예은이 아빠 유경근 씨가 교회에 왔을 때 물어봤어요. 내가 뭘 해야겠느냐,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요. 그랬더니 특별법 제정 촉구 서명 좀 받아 달라고, 그게 우리에게 유일한 힐링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교단 본부에도 얘기했는데 진행이 잘 안 돼요. 나라도 해 보자 싶어서 집회 가는 곳마다 서명 용지 펼쳐 놨어요.

시간이 지나고 예은 엄마 박 전도사한테 물어봤어요. 박 전도사가 하는 말이, 교회에서 쫓겨나듯 나온 기독교인 유족들이 방황하고 있다는 거예요. 주일예배도 못 가고. 목요 기도회처럼 교회들이 돌아가면서 안산 분향소에 찾아와 주일 오후 예배를 드려 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제가 감리사여서 저희 지방 교회들부터 돌아가면서 예배를 했어요. 그렇게 분향소 주일 오후 예배가 시작됐어요.

그러던 중 또 박 전도사가 유족들 사이에서 목공 얘기가 나왔다고 해요. 목요 기도회 오셨던 고기교회 목사님이 목수라고. 그분이 좀 가르쳐 주셨으면 좋겠다고요. 그래서 그날로 안홍택 목사님께 전화한 거예요. 저도 목공방을 하면 좋겠다 했는데, 과연 이게 될까 싶었어요. 가족들 사이에서도, 한창 싸워야 할 때 전열이 흐트러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교단 본부와 교회들에 부탁해 목공방 인프라를 갖출 수 있도록 후원을 받았어요. 그렇게 해 놓고도 뭐 대여섯 명 신청하려나 했는데, 엄마들까지 20명 넘게 신청한 거예요. 목공방 총무 수현이 아버지 같은 경우는, 1년 반 동안 잠을 잘 못 잤는데 목공을 하면서 언제부턴가 자기도 모르게 밤잠을 자게 됐다는 거예요. 그거 하나만 해도 목공방은 공헌하는 거 같아요.

이진형 / 저도 교회에서 목공방을 했었어요. 오상열 목사님께 연락을 받고 박인환·안홍택 목사님을 만나게 되면서 4·16희망목공방에 합류하게 됐어요. 멀찍이서 세월호 가족들을 뵙고 작은 일 하나 손 보태면서, 오히려 제 자신이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됐던 거 같아요. 유가족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신앙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좀 멀어지게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유가족들이 저를 붙잡아 준 거죠. 그래도 아직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 목사로서 좀 더 살아도 되겠다는 위로가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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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답'을 원하는 게 아니다

- 목회자로서 세월호 사건을 겪으며 신앙적으로도 많은 고민을 하실 것 같은데요.

안홍택 / 작년 여름 안산시기독교연합회가 안산제일교회에서 연 부흥 성회가 기억나요. 세월호 가족들은 초청도 안 하고, 그 앞에서 피케팅하는 것도 탐탁지 않게 보는 것 같더군요. 예수님께서 하셨던 사마리아인 비유와 그대로 맞아 떨어지더라고요. 죽어 가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그냥 지나치고 예배에 들어가는 모습. 그걸 보면서, '아 이게 교회의 모습이구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어요.

참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경근 씨가 서강대에서 진행된 미사에 초청받아 했던 이야기가 생생해요. 두 가지를 말했어요. '잊지 말아 달라'와 '공감해 달라'. 공감해 달라는 이야기가 와 닿더라고요. 예수님이 죽은 후에 제자들은 다 숨어 있었어요. 다락방에 숨어 있던 차에 예수님이 나타나신 거예요. 제자들에게 와서 한 말이 "평화 있으라"인데, 이건 공감해 달라는 뜻이에요. 이것이 평화입니다.

제자들은 치욕, 미안함, 두려움, 서로 신뢰하지 못했던 마음들이 뒤죽박죽이 돼서 아주 비참한 상황이었죠. 그런데 예수님의 그 한마디에 비로소 옆 사람을 보게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렇게 서로 마음이 통하면서 용기를 얻게 된 거죠. 그게 진짜 부활의 모습이 아니겠나, 그런데 교회는 그 역할을 잃어버리지 않았나 싶어서 안타까웠어요. 공감해 주는 것, 이게 교회의 본래 모습이고 정체성인데.

김영명 /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옆에 있던 사람이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했죠. 어쨌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는, 일종의 신앙고백이었는데, 그건 고난당한 현장에서는 아무리 외쳐도 공허한 것이었죠. 그 모습이 그리스도는 전능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교회의 모습과 너무 똑같아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또 한 사람은 단지 '나를 기억해 달라'고 했어요. 아, 이게 진짜 현장의 목소리구나 싶었죠.

이진형 / 저희 교회는 민중 교회 전통 속에 있는 교회여서 나름 고통받는 현장을 위해 기도하고 애쓴다고 생각했어요. 참사 당일 오전 11시에 모여서 성경 공부를 했어요. 그때 잠깐 보니 배가 침몰했다는 뉴스가 나와요. 기도회 시작하면서, 애들이 수학여행 갔다가 추억 하나 더 생겼다고 말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죠. 그런데 기도회 끝나고 보니 그런 일이 아니더라고요. 충격이었죠.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는 순간에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죽어 간 거잖아요. 우리 기도와 예배에 아무런 힘이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험이었죠.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 고민했어요. 왜 하나님은 아무 죄 없이 죽어 가는 사람들을 살리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게 뭘까 계속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결국 큰 힘으로 세상을 바꾸기 원했던 내 신앙을 돌아봤어요. 가장 아픈 사람을 가장 깊은 곳에서 공감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인데, 내가 딴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교회 식구들과 말씀 나누면서도 그런 얘기를 많이 해요. 우리 신앙이라는 게 자꾸 위를 바라보고, 좋은 집, 편안한 삶 쪽으로만 가는 것이 아닌가. 저부터도 늘 그런 지향을 가지게 되고요. 삶이 힘들잖아요. 매일 자기 삶을 지켜 내는 거 자체가 발버둥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언젠가 우리를 건져 내셔서 푸른 초장에서 쉬게 하실 것이라고 얘기하고 위로해 주고 싶지만, 이제는 그러지 못하겠다,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박인환 / 두 가지를 생각해요. 하나는 주류라고 하는 기독교인들이 너무 근본주의라는 거예요. 또 하나는 <가만히 있는 자들의 비극>이라는 책에도 나오던데, 한국 사람들이 지난 100년 동안 힘 있는 자들의 압박을 받으니, 힘 있는 사람 편에 서야 편안하다는 생각을 체득했다는 거예요. 저는 중립은 없다고 생각해요. 어느 편에 서야 하는데, 한국교회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면서 힘 있는 자들을 편들어요. 세월호를 겪으며 너무 노골적으로 나타났어요.

희생자가 있는 교회들마저도 지금에 와서는 전혀 세월호와 관계없는 것처럼 하니까요. 너무 엽기적이에요. 예수 믿는 것과 관계없는 거 같아요. 논리가 이래요. 세월호 얘기하면 정치 얘기한다고 하고, 정치 얘기하면 교인 떨어진다는 거죠. 성장 신학이라는 사이비에 미쳐 돌아간 결과죠. 그게 세월호로 인해서 이제 깨져야 하는데 안 깨지려고 악을 쓰고 있는 거 같아요.

▲ 오상열 목사는 예장통합 기독교평화센터 소장으로, 장신대 하나님의선교 학생들과 분향소 목요 기도회를 시작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오상열 /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가장 많이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과 가족들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학과 관념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저도 목요 기도회 처음 시작할 때 막막했거든요. 시작하는 건 할 수 있는데 지속성을 생각하면 답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신청하는 교회가 많아서 순서 정하기가 어려울 정도가 됐어요. 그게 어느 한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물 흐르듯 그렇게 돼 왔어요.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세요.

세월호 가족들을 개인적으로 만난 게 2년이 다 돼 가고 있고, 목요 기도회도 1년 4개월 정도 돼 가요. 희생자 부모님들, 형제자매들, 미수습자 가족들 30명 정도와 일상적으로 연락하고 있어요. 하지만 목회자로서 어려운 건 피상성이에요. 가족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엄중함, 그 무게감을 잘 모르겠는 거예요. 가족들이 하나님께 질문하고 회의하고 씨름하는 게 엄청나거든요.

가족들이 하는 말이, 어떤 때는 말씀이 들어왔다가 금방 나간다는 거예요. 기도도 하는 거 같지만 실제 위로가 안 되고. 찬송도 입술로는 하지만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 말 들을 때마다, 목회자로서 위로와 힘이 되어 주고 싶은데, 괴리감을 많이 느껴요.

세월호 가족들이 어떤 아픔을 겪고 있는지 지금도 몰라요.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수없이 많지만, 눈앞에서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가족들, 살릴 수 있었는데 살리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가족들, 그건 정말 다른 차원인 거 같아요. 같이 동행한다고 하는 목회자로서, 그분들이 지니고 가는 고통의 엄중함과 현실의 무게를 알 수 없으니 죄송하죠.

또 한 가지는, 목요 기도회에 오는 교회들도 가족들과 간극이 있잖아요. 그런 걸 지켜볼 때 조마조마해요. 오셔서 가족들에게 힘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부딪히고 가족들을 불편하게 하고 그런 경우가 있거든요. 그분들 마음을 의심하지는 않아요. 같은 말이라도 때가 있는 건데, 그런 게 좀 섬세해야 하는데 안 될 때가 있어요.

가족들은 답을 요청하는 게 아니거든요. 어느 누구도 아직 답을 줄 수 없고요. 지금은 교회가 그 고통 속에서 함께 뒹구는 과정을 더 겪어야 할 것 같아요. 그들과의 관계가 형성되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해요. 세월호 가족을 지지하는 분들이 글도 쓰고 책도 내시는데, 저는 솔직히 아직 그 내용이 와 닿지는 않아요. 조금 더 고통의 시간을 함께 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박인환 / 2년을 지나며 느끼는 건, 안수받은 목사라고 다 예수 믿는 거 아니구나 하는 거에요. 과연 교회가 예수 믿는 집단인가 싶기도 하고. 한국교회가 예수 믿는 기본이 잘못된 거 같아. 목사가 무당 수준으로 스스로 자리매김하는 거 같고. 교인들도 목사를 무당 보듯 하는 거 같고.

제가 군목 할 때 가톨릭 신부님한테 물어본 적이 있어요. 왜 마리아상 앞에서 합장하고 숭배를 하냐고. 그분이 그런 답을 하시더라고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어머니 아니냐. 아들이 죽어 가는 것을 눈앞에서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어머니기 때문에 그를 성모로 존경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세월호를 본다면, 부모들은 살 수 있었던 사람이 죽은 걸 본 거잖아요. 성모 마리아보다 더 큰 슬픔과 고통인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한다면 세월호 유족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을 거 같은데….

16희망목공방에서 유가족들을 가르친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그 '죽음'을 기억하라

-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하면서 있었던 일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게 있으신가요?

오상열 / 작년 5월 28일에 청와대 앞에서 다윤이 어머니를 만났을 때,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2014년 8월, 그때는 미수습자가 10명이었죠. 팽목에서 도보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름을 외우게 됐어요. 그럼에도 몇 개월 지나니까 미수습자 가족이 계시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거예요. 제 나름대로 목요 기도회 꾸리고 했지만 너무 부끄럽더라고요. 그때 대화하면서 느낀 다윤이 어머니의 그 처절함…. 가족들의 아픔에 대해 여전히 모른다는 생각을 했죠.

또 하나는 희생자 형제자매들 얘기인데요. 아이들이 한번은 자기들끼리 그런 얘기를 해요. 아이들한테도 정말 무수한 사람이 접근해 와요.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말이나 요구를 할 때, 한두 번은 실수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고 했는데도 서너 번 반복하는 건 폭력이라고 하더라고요. 애들이 참 지혜롭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가족들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가족들이 얘기해 준 거죠.

안홍택 / 저는 우리 교회가 있는 용인 지역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용인이 굉장히 커요. 처인, 기흥, 수지. 그쪽에 있는 시민운동 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잘 몰랐어요. 다 따로따로였죠. 그런데 세월호 아이들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 줬어요. 애를 써서 해도 되지 않는 일이었는데, 서로 이해관계가 다르니까. 아이들 때문에 촛불 모임이 생겼고 그걸 통해 뭉치게 됐어요. 지금 세월호와 관련해 아마 가장 활발한 지역이 용인일 거예요. 매주 금요일 죽전역, 시장에서 피케팅하고 공연하고 그러거든요.

미처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 그 아이들이 이 사회에 준 게 정말 많아요. 내면에서 놀랍게 우리를 깨우쳐 줘요. 생명에 관한 일, 평화에 관한 것들이죠. 어떻게 이 세상을 봐야 할지, 관점을 준 거예요. 종교적으로 얘기하면 회개죠. 우리를 회개하게 했어요.

김영명 / 목요 기도회를 하고, 416합창단에서 반주도 하고, 여러 일을 하다 보니 안산에 일주일에 두세 번씩 오게 돼요.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하나님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신앙적으로 회의가 들까 봐요.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창현이네 집에 가게 됐어요. 창현이 방 벽 하나에 포스트잇이 빼곡해요. 창현 어머니가 하루에 하나씩 포스트잇에 기도를 적어서 붙인 게 몇 백 개가 된 거예요. 커다란 리본이 만들어져 있었어요.

그렇게 교회에서 쫓겨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런 분이 아침마다 기도를 적어서 벽을 빼곡히 채운 걸 보고,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뭘까 싶었어요. 가족들이 그런 이야기도 했어요. 교회는 떠났지만 하나님 없으면 안 된다, 죽은 아이들 생각해서라도 하나님이 없으면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하나님 못 버린다는 거죠.

그러면서 여기 모인, 이렇게 함께해 주는 사람들이 나에게는 하나님이었다는 고백을 하세요. 그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을 본다고 해요. 저도 물론 세월호 이후에도 신앙에 변화가 있었지만, 가족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어요.

이진형 / 처음 공방 수업을 할 때, 이분들한테 뭘 해 줄 수 있을까 막막함이 컸던 것 같아요. 자신도 없었고,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어머님들을 처음 만났는데 저희 동네 아주머니들과 너무 똑같은 거예요. 커피 한 잔 내려서 마실 때 너무 행복해하시고. 바리스타가 내려 준 커피라 맛있다고 농담도 해 주시고. 오히려 그분들 때문에 마음이 편해졌어요.

저번 공방 수업 마지막 시간에 어머님들이 원하시는 걸 직접 설계해서 만들게 했어요. 식탁, 책상, 화장대 등등. 한 어머님이 책장을 만들어요. "이거 어디 쓰려고 만드시는 거예요" 물었어요. 그러니까 "아들 물건 여기다 놓으려고…".

옛날에 부모님 돌아가시면 3년상 하고 초막 짓고 그랬다고 하잖아요. 슬픔이 어느 정도 일상으로 다가오는 시간이 최소 3년 정도 되는 게 아닐까요. 어른이 돌아가셔도 3년은 마음을 다독여야 하는데, 자녀를 잃었다면 10년 20년 30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을 문제다 싶어요. 간단하게 정리될 문제가 아닌 거죠. 한국교회가 역사 속에서 꾸준히 품고 가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공방 수업 때문에 주로 목요일에 의왕에서 여기로 오는데, 차 몰고 올 때는 긴장하면서 오지만 돌아가는 길에는 사실 많이 울었어요. '이게 뭐야', 화도 나고 마음도 아프고. 세상에서 버림받아서, 그분들이 원하는 거 하나도 되지 않아서, 목공으로라도 마음을 달래야 하는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래도 목공으로나마 그분들에게 작은 힘이 되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박인환 / 저도 다윤이 엄마한테 들은 말이 충격이었어요. 그러잖아도 한국교회에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세월호 사건 겪으면서 교회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살고 있어요. 긍정적이고 부드럽게 말하는 게 힘들어졌어요. 작년 9월인가, 어느 날 다윤 엄마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박 전도사가 그래요. 와서 하는 얘기가, 미수습자가 있으니 잊지 말아 주시고 알려 주시라고. 또 교회 목사님들 소개해 달라고, 자기가 가서 증언할 수 있게.

그래서 몇몇 목사들 만나게 해 주고 그랬는데, 대화 가운데 그런 말이 나왔어요. 참사 이후 오늘까지 한 번도 전에 다니던 교회 담임목사와 개인적으로 만나 보지 못했다고 하는 거예요. 도저히 믿기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세월호 가족들은 언터쳐블, 불가촉천민이 된 거예요, 교회 안에서조차. 가끔 예배에 오거나 아는 목사들에게 전화를 하면, 유족들 만나는 걸 굉장히 부담스러워해요. 근데 실제로 와서 보면 평범하거든요.

16합창단에서 반주도 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 한국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 주세요.

김영명 / 아직 세월호 속에 9명의 미수습자가 있다는 걸 얘기하고 싶어요. 이제 그만하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것도 말씀드리고 싶고요. 인양해서 9명 찾고, 그때가 시작이죠. 지금은 시작을 위해 준비하는 중이고요. 교회가 시작도 안 했는데 판단하는 자리에 올라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누가 그걸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는 권한을 줬나요?

또 한 가지는, 예장통합 총회장이 목요 기도회에 와서 약속했어요. 교회 주보에 미수습자 이름 실어 주겠다, 올해 안에 100교회 간담회 주선해 주겠다고. 그 약속 좀 지켜 달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박인환 / 한국교회가 교파를 초월해서 신학적으로 너무 저급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너의 신앙고백'을 물었잖아요. 근데 목사들이 조·중·동과 공중파 방송이 하는 얘기를 그대로 해요. 남들은 그렇게 얘기하더라도, 교회는 바로 얘기해야 하잖아요.

칼 바르트가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신문을 들라고 했어요. 읽는 건 누가 못해요. 읽더라도 진실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하는 거죠. 교회가 세상에서 허접하고 못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귀에 들려주는 얘기를 그대로 반복하니까 개독 소리를 듣는 거예요 지금. 교회의 위기는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다고 봐요.

이진형 / 쉽게 정리하고 털어 내려고 하지 말고, 꾸준히 이분들 아픔이 회복될 때까지 우리 안에 십자가로 가져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안홍택 / 기독교는 기억하는 종교죠. 출애굽기를 보면 기억하라고 나오고. 또 예수님 성찬 때도 기념하라고 했거든요. 인류 역사에 죽은 사람 피 먹고 몸 먹으면서 기념하는 종교가 어디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해 왔거든요. 그 죽음을 기억하는 거예요. 어떤 죽음이었는지를. 이 죽음을 기억하는 게 교회의 본질인 거 같아요.

이건 국가 폭력이거든요. 밀란 쿤데라가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그래요. "권력에 맞서는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다". 결국 이 싸움 아니겠나 싶어요. 다른 종교는 모르겠지만, 교회는 기억하는 종교예요. 우리 역사에도 보면 광주민주화운동, 반민특위, 제주4·3사건 등 수많은 죽음이 있잖아요. 교회가 국가 폭력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다"고 신앙고백 해야 하지 않을까요. 희생당한 사람들을 품어 주고요. 그걸 잊어버리면 교회는 사라지고 무너지게 되는 거죠.

오상열 / 세월호 가족들 입장에서 보면 교단이나 교회의 지원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어요. 목요 기도회와 주일예배에 와 주시는 교회에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어요. 시간이 갈수록 세월호가 잊히는 상황이지만, 여전히 기억하고 마음을 함께하는 기독교인이 의외로 많은 걸 알고 있어요. 더 많은 교회가 연결되고 함께하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한국교회가 가족들을 있는 그대로 봐 줬으면 좋겠어요. 이분들 사실 세월호 참사 이전에는 아이들 교육에 목 매던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 구호를 한번 외쳤겠어요, 손을 한번 들어 봤겠어요. 가까이 와서 가족들 얘기를 잘 들어 줬으면 좋겠어요. 자세히, 여러 번. 언론과 정치권에서 그런 프레임을 만들고 있지만, 실제로 보면 이분들이 투사도 아니잖아요. 미수습자 가족들은 가족 찾는 게 일이고, 왜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죽었는지 진실을 알고 싶은 부모에요. 저는 가족들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요. 여기로 오시든지, 아니면 가족들을 초청하시든지 해서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어 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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