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고향과 같은 양평의 기억…
겨울에 배추비닐 덮고 비탈길 썰매,
'녹색' 가득한 그 시절은 신의 한수"
열세 살부터 일기장에 가사쓰기 시작
머릿속 그림 그리듯 써내는 미술학도

"저 이번 달 내 맘대로 인터뷰는 빈지노 씨입니다." 

신문사 편집국장의 전화다. "네? 빈진오요?" "아뇨 빈지노요." "빈지호요?" 

인터넷 포털에 검색해보고서야 '빈지노'인 걸 알았다. 인터뷰 사진을 보고도, 위 대화 내용을 읽고도 '이 사람이 누구지…'라고 머리를 갸우뚱했다면 당신은 분명 40세 이상일 것이다. 

그렇다. 30대 이하의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는 힙합 아티스트 빈지노(본명 임성빈)다. 미국 래퍼 벤지노(Benzino)의 '지노'와 '임성빈'의 '빈'을 합쳐 만든 이름 '빈지노'(Beenzino)다.

하지만 빈지노가 누군지 벤지노는 또 뭔지 몰라도 상관없다. 우리는 엄마랑 누나랑 살고픈 북한강 자락에서, 논두렁 밭두렁 속에서도 이런 멋진 청년이 피어난다는 사실, 그 하나만 알면 된다.     

- 어릴 때 뉴질랜드에서 살았다고 들었는데 양평엔 언제 살았나요.

뉴질랜드에서 12살 때 왔어요. 5학년 나이인데 외국서 오면 교육 시스템을 따라가기 어려우니까 한 학년 낮춰서 4학년에 입학했어요. 그렇게 서종초등학교를 다니고 서종중학교까지 6년 살다 고등학교를 서울예고로 가면서 양평을 떠났어요. 지금은 명절이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가고요.

- 주류 사회에 대한 저항과 거부가 힙합의 정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떠올리는 힙합의 이미지도 헐렁한 바지에 껄렁한 몸짓, 이런 것들이 아닐까한데 빈지노씨는 몹시 반듯한 느낌입니다.

힙합이 예전에는 미국의 흑인 위주였죠. 그들의 실생활도 게토(ghetto)에서 살고 성공하기 위해 힙합을 하고… 부와 권력을 자랑하는 래퍼의 라이프스토리가 있었어요. 갱스터 랩(gangsta rap)과 같은 경우는 마약이며 총 쏘는 이야기들이 많죠.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그렇게 한 건 아니고 콘셉트였어요. 저 같은 경우는 정통 힙합이라기보다는 힙합의 넒은 범주에서 최근에 생겨난 얼터너티브 힙합(alternative hip hop)에 속해요. 사실 제가 갱스터 흉내를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힙합만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에요. 다양을 음악을 듣고, 하고 싶어요. 저의 살아온 인생을 힙합이라는 도구를 통해 표현한다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제가 힙합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저를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 예전 '뮤직살롱' 인터뷰에서 "혼자 만족하기 되게 좋아해요. 칭찬도 들으면 기분은 좋지만 좋은 말들에 그렇게 많은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해요. 그런 좋은 말들도 알게 모르게 저한테 좋든 안 좋든 영향을 끼치거든요"라고 했는데, 빈지노씨는 마음에 힘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지금도 이런 마음으로 작업하나요.

네. 지금까지도 계속 그래요. 그게 원래 제 성격인 것 같아요. 어려서부터 혼자 그림을 그리고 그런 게 익숙하기도 하고 저는 다른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게 즐겁더라고요. 물론 그게 나빴을 경우는 힘들었지만 뭔가를 해서 막 나쁜 피드백이 많이 없었어요. 좋은 피드백에 익숙해서 제가 하는 것들에 대한 불안감이 많이 없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남이 이렇다 저렇다 말해 줘서 고치기보다 스스로 찾아내서 고치는 게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저만 똑바로 되어 있으면 결국에는 바르게 갈 수 있다, 뭐 이런 겁니다.

그의 말에서 힙합 아티스트로 규정짓기보다는 광의의 개념으로서 아티스트 빈지노임이 느껴졌다. 

물론 저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걸 다른 사람은 별로라고 여길 때는 끊임없이 싸움을 계속해 왔어요. 제가 좋은 것들을 제시하면 다른 사람들도 계속 생각하게 되잖아요? 유명하지 않을 때부터 그런 도전을 하고 입증해 왔어요. 그래서 데뷔 초에는 긴장감이 많았어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남들과 비교해서 더 잘하고 싶다' 이런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라는 사람, 새로운 빈지노가 좋다고 느끼면 좋겠어요. 그래서 다른 힙합 아티스트와 묶거나 힙합 특집 이런 식의 프로그램을 별로 안 좋아해요. 그냥 한 타입의 인간으로 인정받고 싶어요.

- 40대 이상에게는 빈지노보다 화가인 어머니 금동원씨가 더 유명할 텐데요. 본인도 서울대 조소과를 나오셨죠? 음악에 집중하느라 작업을 못할 텐데 손이 근질거리지 않는지요.

앗, 저희 엄마가 유명하신가요? 오늘 처음 알았어요.(웃음) 학교는 자퇴했다 재입학했는데 앨범 때문에 바빠져서 또 못 가고… 아무튼 지금은 휴학 중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상태입니다. 그림에 대한 욕망은 있지만 그림을 그리 자주 그리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손을 놓은 건 아니고요. 'IAB Studio'라고 같이 그림 작업하는 팀이 있어요. 한 명은 조소, 한 명은 판화를 전공한 친구들인데 같이 다른 아티스트 앨범 커버 작업도 하고 그러거든요. 저는 음악 작업실이 따로 없어요. 'IAB Studio'의 제 테이블에 장비가 있긴 하지만. 아무튼 그곳에서 입체 작업과 그래픽 작업, 음악과 미술 작업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 남들 보기엔 집안에 학벌에 음악에 미술에 거기다 인물까지… 신이 빈지노에게 몰아주기하신 것 같습니다. 

외모는 한국에 잘 생긴 래퍼나 가수도 많고… 사실 제 외모가 못 생겼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특출한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사람들이 '엄친아' 이런 말들 하는데 저는 사실 그런 말 별로 안 좋아해요. 사람들이 결과물로 판단해서 그렇게들 느끼는 거지 사실 제가 그렇게 예쁘고 달 다듬어진 사람이 아니거든요. 사람들은 사실 과정을 잘 안 보고 결과만 보잖아요. 제 주변사람들은 제가 어떤지 잘 알아요. 고등학교 때는 공부도 미술도 꼴등이었어요. 뒤에서 네 번째 한 적도 있고, 나쁜 짓도 많이 하고… 누구든지 나쁜 짓과 나쁜 선택을 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 다음이 중요한데 저는 그 다음을 잘한 것 같아요.

- 귀촌이 유행하기 전 양평에서 살았는데 빈지노에게 양평은 어떤 곳인가요?

어려서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어요. 아버지 사업 때문에 그랬던 것 같은데 한 12번 정도 이사한 것 같아요. 양평이란 곳은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에요. 다른 곳은 기억들이 다 조각조각 나 있는데 양평 기억은 그래도 길죠. 그래서 그런지 고향 같아요. 저는 도시아이여서 처음엔 양평이 굉장히 싫었어요. 그런데 지나 보니 중요한 시기에 기대도 예측도 하지 않았는데 '신의 한 수'였습니다. 어릴 적을 생각하면 '녹색'이 떠올려지니까요. 옷 입고 그런 것들은 서울 아이들 못지않게 잘 차려 입고 다녔지만 촌놈의 삶을 살아 봤잖아요. 겨울에 배추 비닐을 덮고 삽질하고, 친구들과 개집도 만들고, 눈이 오면 비탈길에서 썰매 타고, 히치하이킹해서 문호리에서 서울 천호동까지 차를 얻어 타기도 하고, 이런 게 없었으면 지금의 저는 없어요.

- 모교 서종중 졸업식에 해마다 온다는 소문이 있던데 앞으로도 계속 올 예정인가요.

아, 졸업식은 아니고 학교 초청으로 예술제에 갔어요. 양평에서 학교 다닐 때 선생님 복이 많았어요. 서울이었다면 한 아이에게 그렇게 집중하고 관심을 쏟기 어려웠을 텐데 양평에선 가능했어요. 초등학교 때 선생님과 이메일을 주고받기도 하고 학교 끝나면 상담도 많이 하고. 작은 학교가 저를 잡아 준 것 같아요. 나쁜 짓도 하고 그런 아이였지만 그런 분들의 관심 덕분에 나쁘게 가지 않았어요. 소중한 기억입니다. 시간이 맞으면 앞으로도 가고 싶어요. (초청비용이 적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에이, 무슨 공연비예요. 제가 기부해도 뭐할 판에… 참 기부를 해도 좋겠네요. 그 생각을 왜 못했지? 그런데 학교가 많이 커지고 부유해져서 제가 뭐 할 게 없는 거 아니에요?

- 교육을 위해 많은 학부모들이 양평에 이주해옵니다. 막상 아이의 행복을 위해 왔지만 한편으론 불안감이 있는데.

제가 아이도 안 낳았는데 감히 무슨 말을…(웃음). 그냥 제가 막연하게 생각했을 때 그런 분들이 시골에 오실 때는 어떤 기대가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자신의 기대감으로 어떤 프레임을 만들어 놓고 바라보려 하면 그 기준에서 벗어나거나 기대에 못 미쳐 혼란스러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신이 정한 목적이나 목표를 지향하기보다는 편안한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아이에게 '이런 동네에서 자라니까 이렇게 자라라'는 부담을 안 느끼게 했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준비를 하면서 평생 안 듣던 힙합을 듣고 공부했다. 그 과정에서 편견이 깨진 부분도 있고 새로운 음악에 눈 뜬 것도 있다. 그런데 그게 가능했던 건 빈지노였기 때문이 아닐까? 직접 만나 보니 더 '반듯하고 공손'한 아티스트였다. 이렇게 자란 빈지노 뒤에는 해야 할 것들을 하고 나면 무한한 자유를 허하고 끝까지 아들을 신뢰해 준 부모님이 있다. 밤늦도록 음악 듣고 가사 쓰는 초등학생, 클럽 다니는 중학생을 이해해 주고 지지해 줄 수 있는 부모는 그리 많지 않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뉴스를 보니 조금 전 멋진 청년과의 만남이 일장춘몽처럼 느껴졌다. 우리 주변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고 알바를 일주일 내내 뛰어도 학비를 마련할 수 없는 청춘들이 넘쳐난다. 

보기만 해도 '이모 미소'가 지어지는 멋진 청년 빈지노가 힙합의 저항 정신을 조금 더 발휘해서 세상의 부조리도 노래하고 이 땅의 고통 받는 또래들의 하소연도 노래에 담아 줬으면 참 좋겠다. '나는 충분히 행복하지만 네가 행복하지 않다니'라고 슬퍼하는 그런 노래도 많이 많이 해 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멋짐에 훌륭함까지 더해질 것 같다. 그가 앞으로 그런 노래를 들려 준다면 '조카 친구' 같은 빈지노에게 '이모 팬'이 온 마음으로 응답하겠다.

이경희 객원기자

소싯적 의상디자이너, 출판기획편집자, NGO 홍보팀장으로 일했다. 경남산청 시골 출신이라 서울서 늘 흙을 그리워했다. 5년 전 양평으로 이사해 놀멍쉴멍 글도 쓰고 책도 만들며 남편과 두 딸 아이와 지지고 볶으며 잘 살고 있다.

* 이 기사는 <양평시민의소리>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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