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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의 윤리학, 교회의 윤리학
고통을 잊으라고 선포하고 있지만은 않는가?
  • 주원규 (bay3135@empal.com)
  • 승인 2016.04.02 17:04

세월호의 윤리학 

세월호를 기억한다는 것은 수치와 고통의 기억을 복원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었다. 2014년 4월 16일. 수학여행을 위해 바다 위를 나선 안산 단원고 학생들의 세월호가 침몰하던 그 당시만 해도 이 사건은 하나의 천재(天災) 정도, 결코 일어나선 안 되는 비명의 한 단락으로 기억될 것을 예상했었다.

갑작스럽게 몰아친 자연재해, 해명되기 어려운 비극을 앞에 두면, 그러면 우리는 최소한 우리의 유일한 방패막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을 소환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었다. 우리 하나님 왜 아이들을 살려 주지 못했습니까, 왜 무고한 생명을 앗아 가게 놔두셨습니까, 등 발버둥이라도 쳤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호의 침몰, 선장의 단독 탈출, 배가 가라앉고 있는데도 안심하고 배 안에 있으라고 말하는 어른들, 배 주위만 맴도는 해경, 그리고 이어지는 정부의 무능.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앉아 있는 현장을 보며,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입은 아무것도 따질 수 없는 함구령을 스스로에게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누가 봐도 명백한 인재(人災)였기 때문이다.

'세월호'란 이름의 무책임한 괴물이 버젓이 바다 한복판을 헤집고 다니도록 방치한 모든 원인 제공도 인간의 몫이었다. 아이들이 물속으로 가라앉는데도 제 한 몸 살아 보겠다고 도망치는 선장의 직업윤리 역시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비극인 것이다. 이렇듯 세월호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신을 소환할 수 없는 우리 자신과 직면해야 했다. 그렇기에 세월호의 기억은 2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수치와 고통의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기억의 복원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고통의 지속에 대해 애써 무감각해지려는 망각의 유령 앞에서 오늘의 사회가 어떤 윤리적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그 질문을 던지는 데 있어 오늘의 한국 사회와 교회가 매우 인색하다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 사회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가치는 두말할 것도 없이 망각이다.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 과거는 대충 덮어 버리고 새로운 미래, 비전을 생각하자는 게 망각이란 이름을 세련되게 포장한 오늘의 한국 사회 담론의 중심이 되어 버렸다. 과거를 복기한다 해서 달라지는 게 없지 않느냐는 식의 환멸의 물타기에 교묘히 숨어들어 어물쩍 넘어가려는 미래 지향 퍼포먼스 앞에서 세월호의 비극은 옛것의 아픔 정도로 가치가 격하되고 있다.

필자는 세월호의 아픔을 애도하고 미래로 나아가려는 정신의 소중함을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 또한 필요한 미덕이어야 한다. 하지만 고통의 기념과 애도에는 그에 따른 뼈아픈 복기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고통을 기념하는 최소한의 예의, 애도의 기본이다.

거기에 또 하나, 고통의 현재진행형에 대한 올곧은 직시가 필요하다. 세월호의 고통은 어째서 망각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지 못하는가. 여전히 고통의 이해관계자들이 아무것도 반성하지 않은 채, 어떤 해결의 의지조차 보이지 않은 채 고통을 과거의 유물처럼 취급하려 들기 때문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말하는 진상 규명 의지, 최소한의 요구에 대해 지금까지 정부와 정치권, 각종 유관 단체가 보여 준 행태의 전체적 경향을 한마디로 평가하면 야만과 무능, 그게 전부다.

야만이라 함은 국가가 국가답지 못하고 정치가 정치답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국가와 정치가 물어뜯는 먹잇감은 아무 힘없는 민초들이란 점이 그렇다. 무능이라 함은 자신들의 배는 꾸역꾸역 채우면서도 정작 해야 할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뇌가 없는 머리들을 소유했다는 점이 그렇다.

그렇게 뇌를 잃어버린 머리의 소유자들이 하나같이 외치는 구호는 지루할 법도 하건만 여일하게 되풀이되어 왔다. "이제 그만 잊어라. 과거는 깨끗이 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등등. 이러한 말들은 명백히 망언이다. 그런데 이 죽어 없어져야 할 망언들이 고통의 현재진행형이 되어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

세월호를 대하는 우리의 윤리학은 이 지점에서 뼈아프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고통의 현재진행형을 피하지 않으려는 응시의 윤리학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오늘의 우리를 사로잡은 뇌가 없는 머리들의 망언(妄言)이 폐기 처분되어야 할 망언(亡言)임을 처절히 깨우칠 것이다.

고통을 피하지 않는 맞섬의 한 현장이 세월호의 윤리학이라면 이제 이러한 윤리학의 가르침이 더 적극적으로 파고들어야 할 현장은 어디일까. 그 현장을 교회로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교회의 윤리학 

교회의 현장은 인류의 고통, 그 중심에 서 있는 게 옳다. 하지만 고통에는 층위가 존재한다. 교회가 선포해야 할 고통은 더 심원적인 자리에 위치하는 것이 원칙이다. 교회는 인류 전체가 겪을 수밖에 없는 원죄의 고통 앞에서 그 고통의 속죄성에 대해 선포하고 논하는 자리이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결별, 신적 소통의 부재 상황 앞에서의 고통을 속죄하는 이른바 대속의 선포가 이뤄지는 곳이 바로 교회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현장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런데, 심원적 고통이 일어나는 현장과 그 심원적 고통의 심층에서부터 발원되어 나온 현장에서의 고통을 아예 별개의 것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고통의 심층인 하나님과의 끊어짐, 그 지속 속에서 나타난 고통이 인류가 부대끼며 살아 내는 현장에서 가혹할 정도로 빈번하게 출몰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고통은 하나님과의 심원적 연결 고리를 망실당한 망각의 괴물들에 의해 점령당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세월호의 고통이 인질로 삼은 망각의 괴물, 그 육식동물이 벌려 대는 포악한 악취가 고통의 한 현장을 아예 망각의 늪으로 몰고 가려는 것을 좌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현장은 우리네 삶의 현장과는 거리를 둔 것 같아 보이는 심원적 고통의 자리가 어째서 인류를 참학하고 있는지 고발하는 선포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리를 선포하는 교회의 참모습이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의 현장은 진리를 선포하는 과정을 걸어감에 있어 그 과정의 틈새 사이사이로 터져 나오는 인류 비극의 쓰라린 단면인 망각의 탄원에 귀 기울여야 할 최소한의 작동 장치로서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렇듯 거시적이면서도 미시적인 두 현장의 입체적 얽힘 속에서 교회가 성찰해야 할 윤리학의 기반은 현장의 세력화, 현장의 비대화가 아니라 망각의 괴물을 괴물이라고 폭로할 수 있는 예언자의 자세에 잇대어 있어야 한다.

교회가 오늘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고통에 대해 눈 막고 귀 닫고 버티는 작태를 교회의 본래 기능을 다한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현장의 이분법에 갇힌 정교분리 사유 방식의 극치다. 교회는 이를 극복하는 자세의 배양이 요구된다. 하지만 교회가 세속적으로 힘을 갖고 이를 권력화하여 미시적 현장의 비극을 성토해야만 한다는 논리 역시 위험천만하다.

교회가 현장을 대하는 태도의 기반에는 세 가지 망각과의 맞섬이 요구된다. 고통의 현재진행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망각의 열의, 고통과 직면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환멸의 자리에 서고 싶은 욕구의 일환으로서의 망각, 고통이 오늘의 나와 도대체 무슨 상관인지, 피아(彼我) 구분조차 못하는 망각의 망각이란 이 세 가지 망각의 유령과 맞서려는 윤리적 요청에 민감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근본적 고통을 되새기면서도 그 근본적 고통인 하나님과의 절멸로 인한 비극적 신음을 외면하지 않는 교회의 윤리학이다. 

내일을 잃어버려 내일로 나아가는 교회 

그러므로 두 현장에 함께 발 딛고 서 있는 교회는 내일을 잃어버려야 한다. 어느 것 하나도 청산되지 않은 과거를 구태로 규정하고 내일만을 바라봐야 한다고 떠들어 대는 그 야비한 입들에 의해 저당 잡힌 내일 말이다.

혹자들은 이렇게 질문할지 모른다. 2년 전에 일어난 한 사건인 세월호를 기억하는 것과 교회가 무슨 상관이냐고. 하지만 교회는 언제나 그랬듯 정교분리의 근본 토대인 역설의 가시밭길을 함께 걸으며 교회 자체의 분명한 존재 가치를 선포해 왔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인류의 근원적 고통에 대한 의미 환기로 기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근원적 고통으로 인해 파생된 구조적 광기와 야만으로 얼룩진 역사의 고통 또한 외면하지 않았다.

교회는 고통을 기억하는 한 방식으로 근원적 고통의 의미환기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방식으로 현세의 고통을 때론 위무(慰撫)하거나 때론 고발해 온 것이다.

분명한 건 교회는 근원적 고통에 대한 지속적인 의미 환기를 통해 인류에게 구원의 본질에 대해 침묵하지 않을 것을 가르쳐 왔다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오늘, 바로 우리 이웃과 공동체, 사회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애써 잊으려는 모든 방식과 맞서는 대사회적 장치로써 견뎌 왔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고통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지나칠 만큼 손쉽게 망각의 방식을 근원적 고통의 선포 방식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과거는 그만 잊어야 한다고, 내일의 기쁨과 내일의 희망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것이 가장 큰 위로라고 말하는 것 같은 혐의를 좀처럼 지울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망각이란 이름의 마약을 사용해 과거를 지워 버리고 그렇게 아무것도 청산하지 못한 상태로 내일만 바라보라고 강요하는 악순환의 강요는 결코 교회가 선택해야 할 방식도, 선포도 그 무엇도 아니다. 그러한 강요는 정치적 수사에만 익숙한 위선적 정치인, 시류에 편승해 한몫 챙기려는 천민자본주의 신봉자들, 그럴듯한 사탕발림으로 무장한 시정잡배들이 손쉽게 선택하는 수법 아니던가.

진리의 선포 요체로서의 교회 정체성을 고민하는 본질적 고민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월호의 고통과 그 고통의 지속이 여전한 현재진행형으로 우리 이웃의 고통임을 기념하는 방식을 오늘의 한국교회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함께 이야기해 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담론과 논의는 지리멸렬하고 비생산적으로 보일지라도 계속되어야만 한다. 적어도 망각의 괴물에게 저당 잡힐 수 없는 교회의 정체성을 선포하는 이상 의미 있는 행보가 지속될 수 있기에 그렇다. 당장 우리 입에 맛깔나게 달라붙은 '내일', '비전', '새로움' 등의 상투적 수식어만 죄다 걷어 낼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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