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지구론인가, 늙은지구론인가

▲ <창조 기사 논쟁> / 존 H 월튼 외 7인 지음 / 최정호 옮김 / 새물결플러스 펴냄 / 512쪽 / 2만 3,000원

전주대학교 기독교학부에 다닐 때였습니다. 그 당시 스승 김경래 교수님은 구약성경을 가르치면서 연대기를 정리해 준 적이 있었죠. 이른바 아담의 출생 연도부터 시작해 예수의 탄생 때까지 정리한 강의 노트였죠. 20년이 다 된 지금 그 노트는 없지만 파일로 정리한 건 갖고 있죠.

그때 김경래 교수님은 자신의 연대기 정리가 유진 폴스틱(Eugene Faulstich)의 도움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른바 유진 폴스틱이 쓴〈Bible Chronology and the Scientific Method〉을 포함한 4권의 책을 두고 하는 말이었겠죠. 그때는 별로 깊게 생각지 않았는데, 지금은 '젊은지구론'과 맞물린다는 것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젊은지구론', 그것은 지난 2월 '목포 사랑의교회'에서 강연한 한국창조과학회 LA지부장 이재만 회장이 한 말이기도 하죠. 그는 "진화의 반대는 창조가 아니라 성경이다"고 강조했습니다. 진화론이 일본과 미국 학교에 파고들 때부터 학생들이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고, 그렇기에 성경의 창조를 다시금 확립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죠.

그 시간을 통해 내가 신선하게 깨달은 게 있었습니다. '지층 연대 측정법'에서 화석의 지층이 시간 순서대로 쌓인 게 아니라는 것,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 측정법'도 납이나 우라늄 같은 것들이 초기에 섞여 있거나 일부 오염될 수 있다는 것을 배제하고 있다는 게 그것이었죠. 그 밖의 강의 내용은 창조 기사와 관련한 관주 해설이 주를 이루었는데, 그만큼 '오래된 지구론'이 아닌 '젊은지구론'을 교회에서 역설해야 젊은이들을 붙잡을 수 있다는 논지였습니다.

문제는 창세기의 말씀에 창조 원리나 창조 방식이 명확하게 설명돼 있지 않다는 점이죠. 이른바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나오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가 일곱째 날엔 빠져 있고, 첫째 날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게 무엇인지 아리송합니다. 첫째 날의 "빛"과 넷째 날의 "광명체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쉽게 가늠할 수 없고,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 하늘과 물과 땅이라는 세 권역을 만든 후,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그 권역 안에 각각의 것들을 채워 넣는 형식을 갖추고 있는 점들이 그렇죠.

창조 기사 다채롭게 이해하도록 돕는 <창조 기사 논쟁>

<창조 기사 논쟁>(새물결플러스)은 그런 난해한 점들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창조의 날들을 말 그대로 문자적인 날들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일종의 문학적 구조나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말이죠. 이른바 '간격 이론', '날-시대 이론', '구조 가설', '문학 장르', '고대 근동의 병행 이론', '유비적 날들', 그리고 '개념들'로 정립되는 내용이 이 책에 다 들어 있죠. 더욱이 그에 따른 논평들도 해 주고 있으니 너무나도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선 리처드 E. 에이버벡은 하나님의 물질 창조를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에덴동산과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의 실재 때문이라고 하죠. 다만 6일 창조 중 제1일의 창조에 대해서는 '간격'을 갖고 있죠. 이른바 '심연' 때문에 그런 건데, 그걸 고대 근동의 우가리트 문헌과 비교하는 게 신선했습니다.

더욱이 첫째 날의 "빛"을 자연계의 빛이 아닌 '하나님의 임재'와 연관 짓는 게 무척 흥미로웠죠. 그걸 시편 104:1-2a과 요한계시록 21:22-24절과 매치해 주는데, 하나님과 어린 양이 빛이 되신다는 게 그랬습니다. 그러면 그 빛이 생명과 진리의 빛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이것은 제 사족입니다.

"고대 근동의 자료들은 이러한 배경을 반영하며, 창세기 1장은 같은 패턴을 따라서 창조 기사를 배열한다. 첫째 3일이 지난 후에 하늘, 물, 땅이라는 세 권역이 모두 채워진다. 하늘에는 광명체와 새가, 물에는 물고기와 물에 사는 생명체가, 땅에는 인간과 짐승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89쪽)

토드 S. 비일은 하나님의 6일 창조, 곧 '젊은지구론'을 신봉하죠. 그는 창세기 1장이 시가 아니라 내러티브라고 합니다. 그만큼 비문자적으로 해석될 소지를 차단하는 셈이죠. 그가 그렇게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도록 종용하는 이유는 신약의 저자들이 창세기 1-11장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 때문이죠. 마치 뭔가 표준이 되는 기준점을 따라야만 한다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죠.

"자신의 글에서 비일은 '표준이 되는' 장르 분류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지만, 무엇이 '표준'인지를 누가 정할 수 있겠는가? 분명한 것은 현대적 기준이 판단의 척도를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169쪽, 존 H. 월튼의 논평)

창조 기사를 꼭 문자적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C. 존 콜린스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이상향의 세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 역시 창세기 1-11장과 고대 근동 문학의 주요 병행 문헌들을 비교하면서, 창조의 날들이 반드시 6일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죠.

일곱째 날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말이 없고, "쉬셨다"는 것도 사역의 끝마침이 아닌 배치 사역의 멈춤, 곧 '정돈의 의미'가 더 깊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럴까요? 그는 헤르만 바빙크가 제안한 개념인 창조의 날들은 "하나님이 일하신 날들"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일 것을 권장하죠.

"그러므로 '창조의 날들'인 6일은 반드시 우주가 시작된 실제 처음일 필요가 없다. 심지어 그 날들은 반드시 지구의 실제 처음일 필요도 없다. 그 날들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섬기며 지혜와 선한 의도로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나님이 지구를 이상향으로 만드신 기간이다." (198쪽)

트럼프 롱맨은 우주와 인간의 창조 묘사를 문자적인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창조 기사에 비유 언어가 가득 차 있다는 이유 때문이죠. 더욱이 24시간으로 구성된 그날들 속에 왜 하필 넷째 날에 들어서야 해와 달과 별들이 존재하게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아담을 굳이 '역사적 개인'으로 간주할 필요가 없다고 하죠.

"창세기 1-2장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그분은 다른 신이 아닌 야훼 하나님이시고 모세의 하나님이시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고 담대하게 선포한다. 창세기 1-2장은 이러한 주장을 펴기 위해 우주와 인간을 만든 이가 다른 신이라는 주변 경쟁 문화의 주장을 적절하게 이용한다." (253쪽)

존 H. 월튼은 고대 근동의 문헌들을 비교하면서 물질세계 창조보다 기능 체계 구축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른바 첫 3일간의 창조는 풍요를 위한 기능체계를 구축한 것이고, 그 첫째 날의 빛도 '물질로서의 빛'보다 빛을 비추는 '기간으로서 빛'에 중점을 둔다고 하죠. 더욱이 '바라'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물질적 관점을 갖게 하는 것도 일종의 선입견이라고 하죠. 그가 그토록 기능 체계 창조를 강조한 것은 우주의 중심인 성전과 결부하기 위함이고, 곧 성전의 7일 낙성식에 견주기 위함이죠.

"성전이 창세기 1장의 우주론과 관련된다는 점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 창세기 1장을 읽는 사람 가운데 성전이나 성소를 즉시 떠올릴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성전'이란 단어는 창세기 1장에 나타나지 않으며, 거기에는 현대의 독자가 어떤 관련성을 인식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고대의 독자에게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분명하게 드러났던 정보가 오늘날에는 거의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350쪽)

성서 텍스트를 먼저 주의 깊게 살펴야

그런데 그런 존 H. 월튼의 주장에 대해 에이베백은 다음과 같이 논평하죠.

"창세기 1장의 우주 창조와 달리 고대 근동의 성전 봉헌 문헌들에는 실제로 성전을 건축하는 일과 관련된 용어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이에서 정확하게 논쟁이 되는 요점이다. 창세기 1장은 첫 우주의 물질적 창조에 관해 무언가를 언급하고 있는가?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반면에 월튼은 '아니오'다. 그는 자신이 '기능적 창조'라 부르는 것만을 선호해서 창세기 1장이 물질 창조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을 제거하려는 데 현저한 노력을 기울인다." (376쪽)

케네스 J. 터너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강조합니다. 이른바 창조와 관련된 문학적 배경, 역사적 배경, 그리고 신학적 배경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죠. 이를 위해 성서의 텍스트를 먼저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너무 급하게 흥미를 느끼는 지점으로 넘어간다고 충고하죠. 그때는 성서 텍스트가 다른 수단으로밖에 쓰이지 않는다고 하죠.

제가 여기까지만 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상과 같은 6인의 견해만 살펴보고 넘어갔다면, 아마도 저는 '젊은지구론'보다 '늙은지구론' 쪽으로 훨씬 기울었겠죠. 그런데 마지막에 등장하는 주드 데이비스의 글을 읽고는 내 생각이 더 복잡해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역사적 아담을 믿었다고 강조하죠. 그만큼 예수님께서도 아담이 땅의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죠. 그걸 떠난다면 아담의 창조도, 그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든 것도, 그들이 저질렀다는 인류의 첫 번째 죄도 다 부정하게 된다고 하죠.

그렇게 될 경우 그들은 그저 신석기시대의 두 농부일 뿐이라고 하죠. 참으로 기가 막힌 난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점들을 존 H. 월튼의 '또 다른 선입견'으로 생각하면 해소가 될 수 있을까요? 거기까지 생각하려니 너무 생뚱맞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주드 데이비스는 젊은지구론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의 논의에 더 귀 기울이게 하죠. 나도 예전에는 젊은지구론을 주장했다가 최근엔 늙은지구론으로 기울었는데, 지금 이 책을 읽고는 어정쩡한 상태에 처했습니다. 주드 데이비스의 신학적 논쟁을 극복할 수 있다면 충분히 늙은지구론으로 넘어갈 텐데, 아직 멈춰 선 상태입니다.

그대는 이럴 때 어떻게 이해하는 게 현명할 거라 생각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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