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2000년대 초반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가 한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주인공 캐리를 비롯한 여성 네 명의 솔직한 섹스 라이프를 주제로 이야기가 전개됐다. 종편에서 방영한 한 토크쇼는 섹스에 대해 할 말 다하는 여자를 '핫한 여자'로 그렸다. '섹스'라는 단어를 입에 잘 올리지 못하는 사람은 '고루한 여자' 취급하는 것이 어느새 문화 속에 자리 잡았다.

대놓고 '섹스'를 말하는 책도 출간됐다. 2015년 8월 서점에 등장한 <이기적 섹스>(동녘)가 바로 그 책이다. 그동안 남자들 입장에서만 섹스를 말해 왔다면, 이제 여성의 입장에서 섹스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섹스를 잘 모르는 여자들은 '내숭 떨지 말라'고 욕먹고, 섹스를 많이 아는 여자들은 '까졌다'고 욕먹는다. (중략) 섹스에 관해 여성들이 이야기할 공간은 여전히 너무나 적다. 내가 여성들을 위한 섹스샵을 욕망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여자들끼리 모여 섹스에 대한 각자의 다양한 경험을 쏟아낼 수 있는 공간. 자신의 욕망과 몸에 대해 생각하고 나눌 수 있는 시간과 공간. 그 안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중략) 아, 그리고 진짜 마지막으로 오르가슴의 은사 내려 주신 주님께도 영광 올린다. 사랑해요, 주님."

섹스를 말하는 책에 '주님'이 등장하다니. 글쓴이가 궁금해졌다. 그녀는 어떻게 이렇게 당당하게 섹스를 말하며 '주님'을 언급할 수 있을까. <이기적 섹스>의 저자 은하선 씨를 만나 '섹스'에 대한 그의 생각을 가감 없이 들어 봤다.

▲ 은하선 씨는 2011년 '성의 이해'라는 강의 폐강을 주도했다. 그는 이때부터 개인 블로그를 열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모태 신앙 가톨릭 교인, 섹스 에세이 쓰게 된 까닭

2011년 한양대에서 '성의 이해'라는 과목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성폭력의 원인이 여성에게 있다는 듯 설명하고 일방적으로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에 대해 부정적인 주장을 펼치는 강의였다. 은하선 씨는 폐강 운동을 주도했다. 강의의 문제점을 짚은 대자보를 써서 학교 곳곳에 붙였다.

그는 '성의 이해'라는 과목이 철저히 남성 중심적 사고에서 성을 묘사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여성 비하가 담긴 수업을 듣게 놔두느니 차라리 자신이 글을 쓰는 편이 좋겠다 싶었다. 이렇게 후진 수업을 학생들이 듣게 놔두느니 자신이 더 야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글쓰기였다. 처음부터 구체적으로 '페미니즘'을 설명하겠다는 의도는 아니었다. 다만 섹스만큼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받아들이기 좋은 주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개인 블로그를 열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매일매일은 아니지만 가끔 자신의 '섹스 라이프'를 공유했다. 어렸을 때 기억부터 최근의 추억까지, '그놈'들과의 경험을 풀어놨다.

'그놈'들과의 경험 뿐 아니라 '그녀'들과의 경험도 적었다. 모든 것이 솔직했다. 중학생 때 첫 경험, 피임 없이 섹스하다 임신한 얘기까지 포장하는 것이 없었다. 조금씩 글이 쌓이니 블로그 방문자도 늘어나고 문의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블로그에 모인 글과 주제별로 새로 쓴 글을 모아 <이기적 섹스>를 출판했다.

섹스 이야기, 이제 숨어서만 할 것이 아니다

은하선 씨는 책을 펴낸 것 외에 '은하선 토이즈'라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서울 상수동에 있는 '걸스타운'이라는 음식점 안 한쪽에 자리한 샵인샵(Shop in Shop) 형태다. 직접 만든 섹스 토이들과 써 본 것들 중에 특별히 엄선한 섹스 토이를 판매한다. 다만 남성을 위한 섹스 토이는 없다. 철저히 여성 중심 가게다.

여성 성기에 자극을 줘 오르가슴에 다다르게 하는 바이브레이터, 삽입할 수 있는 섹스 토이인 딜도(Dildo) 등을 주문 제작, 판매하고 있다. 기존에는 남성 성기 모양처럼 살색으로 만든 딜도가 많았는데, 은 씨는 알록달록하고 예쁜 막대기 모양의 딜도를 만들었다. 은 씨 말대로 팔찌를 걸어 놓으면 팔찌 걸이라고 오해할 만큼 예쁜 색감을 가진 딜도였다.

▲ 은하선 씨는 서울 상수동의 레스토랑 한쪽에서 섹스 토이를 전시 및 판매하고 있다. 여기 진열된 다양한 상품은 여성이 자위행위할 때 쓰는 바이브레이터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섹스 토이샵은 그의 오랜 꿈이었다. 과거 섹스와 관련된 각종 물건을 파는 섹스샵에서 아르바이트한 경험도 있었다. 섹스 토이에 관심이 많은 그는 한국에서는 팔지 않는 물건을 해외에서 직접 구매해 사용해 보고 사용 후기도 썼다.

이때 알게 된 섹스샵에서 일요일마다 가게를 빌려 줘 '섹스 토크'도 열었다. 다양한 성 정체성을 가진 여성들이 한곳에 모여 섹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참가자들은 딜도와 바이브레이터를 직접 만져 보고 재밌어 했다. 섹스는 더 이상 숨어서 혼자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었다.

십 대 청소년 십여 명과 섹스 토크를 열었다. 예상치 못한 일을 겪었다.

"한번은 트위터로 십 대들을 모아 섹스 토크를 연 적 있다. 그냥 열 명 정도 모여서 같이 밥 먹고 섹스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쳤다. 누군가 미성년자 모아 놓고 음란 행위 한다고 신고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경찰도 와서 보고 그냥 앉아서 얘기만 하고 있으니까 그냥 돌아갔다.

십 대들에게 콘돔 사용법을 가르쳐 줘야 한다고 하면 섹스를 조장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성교육도 조심해야 한다는 식으로 가르친다. 청소년은 성욕도 없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들이 섹스를 입에 올리면 사람들이 놀라는 것 같다."

악플과 추근거림 사이

책을 펴낸 후 은하선 씨는 쏟아지는 악플과 늘 함께였다. '레즈년(레즈비언)이 떠든다', '십 대 때 섹스한 게 자랑이냐', '임신한 게 자랑이냐', '저런 여자랑 무서워서 결혼하겠나' 등등 온갖 종류의 여성 혐오가 담긴 댓글이 은 씨 기사에 달렸다.

"여자가 거침없이 섹스를 말하는 데다 지금은 동성을 사귄다고 하니까 '쟤는 문란한 애, 갈 데까지 간 애'라고 낙인찍는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다 문란하다고 하고 정도가 심하다고 한다. 섹스에만 국한되지 않는 것 같다. 학교에 대자보를 붙이든, 데모를 하든, 세월호 집회에 나가든 모두 도가 지나치다고 말한다."

댓글을 볼 때마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은 하지만 책을 출판한 것과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후회는 없다. 그를 이해하는 주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활동을 하는 걸 모르는 부모님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얼마 전 모든 걸 알게 된 후 그녀가 하는 일을 결국은 받아들여 주셨다.

악플이 있는가 하면 그녀를 귀찮게 하는 남자들도 많았다. 자신과 하룻밤을 보내겠느냐고 메시지를 보내는가 하면 아내와 잠자리에 문제가 있다고 무턱대고 상담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개인적인 성생활을 이야기하며 해결책을 묻는 사람도 있었고 음란한 내용이 담긴 메일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글들이 올 때 무시하면 된다고 조언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은하선 씨는 이 모든 내용을 캡처해서 자신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렸다. 공개적인 자리에 글을 올리니 남성들의 추근거림도 사라졌다.

▲ 은하선 씨가 전시 중인 곰돌이 인형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곰돌이 인형은 그가 직접 제작한 딜도를 착용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왜 섹스만 쾌락이라고 말하나

<이기적 섹스>에 보면 '주님이 섹스하지 말래?'라는 장이 있다. 여기서 그는 교회가 불안감을 이용해 사람들 마음을 편협하게 하는 것을 비판한다. 2014년 교계를 떠들썩하게 한 자칭 예언자 홍혜선 씨는 '자위행위를 하고, 야동을 보고, 낙태하면 지옥 간다'고 외쳤다.

은하선 씨는 이 이야기가 홍혜선 씨에서 끝나지 않았다고 본다. 지금도 한국교회는 '항문 섹스 아웃'을 외치고 있다. 성에 대해 엄격한 교회가 이상하게도 '항문 섹스'라는 말을 전파하는 데는 열심이다. 사회적으로 다른 현상에 대해 목소리 높이는 경우는 잘 없는데, 왜 굳이 '성(性)'에만 열을 올릴까. 그는 이 부분이 이상하다.

"일부 대형 교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강남 지역에 있는 성당, 일부 신부들도 마찬가지다. 신자들 돈 받아서 매일 아침 좋은 거 먹으러 다니고 선물 받고 좋은 차 탄다. 본당 세우고 남은 돈으로 차 사고 그런 신부들도 봤는데, 사실상 그게 쾌락과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다. 교회는 다른 부분은 굉장히 세속적인데 성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순결을 요구한다. 돈과 명예, 권력을 따르며 느끼는 쾌락은 괜찮고, 나중에 성공하면 좋은 사례로 소개까지 한다. 한국 사회는 성폭력을 '폭력'의 문제가 아닌 '성'의 문제로 가져 간다. 성폭력을 불륜이나 간음과 같은 범주에 올려 놓고 '음란의 영'이라고 묶어서 이야기하는데 절대 같은 선상에서 논의할 문제가 아니다."

'동성애 반대' 한국 교회 수호 위한 최후 보루?

은하선 씨는 그동안 남자들을 만나왔지만 지금은 여성을 만나고 있다. 그에게 '동성애 반대'를 외치는 한국교회가 어떻게 비치는지 궁금했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문제를 외부에서 해결책을 찾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미워해야 할 대상을 찾아야 하는데 마침 동성애가 이슈가 되고, 그들이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성 이슈를 더 부각시키는 것 같다. 구약에 보면 지금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성애 문제가 더 많다. 동성애는 몇 군데 나오지도 않는데 그걸 찾아서 남을 쉽게 정죄하고 탄압한다. 섹스는 이야기하기 쉬운 주제인 것 같다. 자극적이니까."

오랫동안 신앙 테두리 안에 있던 그녀는 교회가 가르치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모두 '틀리다'고 말하는 교회 문화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다. 그의 눈에 한국교회는 사회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역주행하는 곳이었다.

"목사가 설교 때 모든 여자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고 결혼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듯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여성이라면 '당연히'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결혼해서 자녀를 낳는 정형화된 길을 당연시한다. 그 외 다른 선택을 못 하게 하는 건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부터 조금씩 다르게 생각해야 할 것 같다."

▲ 은하선 씨는 섹스만 쾌락이라고 말하는 교회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 그는 교회가 왜 부와 명예, 권력을 쫓으며 느끼는 쾌락은 죄로 여기지 않는지 궁금해 했다. (사진 제공 은하선)

섹스에 자유롭다 ≠ 섹스를 많이 한다

은하선 씨에게는 섹스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못 하도록 틀을 만든 남성 중심적인 사회가 문제였다. 그 틀을 깨고 '섹스'를 말하는 여성들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자기처럼 하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다.

"내가 누구한테 당신이 원하는 대로 섹스를 즐기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본인이 선택할 문제다. 하지만 섹스에 무지한 여자를 '깨이지 못한 사람'처럼 표현하는 건 문제가 있다. 반대로 표현을 많이 하는 여자들을 문란하다고 하는 것도 문제 있는 거다. 이런 사회 풍토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

제 책을 가끔 자유롭게 섹스하라는 메시지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유는 좋지만 항상 남자들의 자유만 이야기했다. 남자들은 자신들이 섹스하고 싶을 때 한 여자와 섹스하기 위해 자유를 들이미는 경우가 많았다.

섹스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횟수로 오독하는 경우도 있다. 섹스를 하지 않는 것도 섹스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남자들은 '이 여자는 섹스에서 자유롭대. 섹스를 많이 하나 보다. 그럼 나랑도 자 주겠지'라고 생각한다. 섹스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섹스에서 자유롭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다."

자유롭게 '섹스'를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은하선 씨는 <이기적 섹스>와 비슷한 책을 하나 더 펴낼 생각이다. 글쓰기를 하나님이 주신 또 다른 달란트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 반응이 좋았던 섹스 토크도 고려하고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여러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자리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나는 자신의 섹스 욕망에 솔직한 여성이 21세기의 신여성인 것처럼 추앙받는 것도, 서른이 넘도록 섹스 경험이 없는 여성이 뒤처진 여성인 것처럼 조롱거리가 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건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잣대다. 누군가의 경험과 자신을 비교하거나 파트너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지금 자신의 욕망에 귀 기울이는 여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 <이기적 섹스>(동녘)에는 '주님이 섹스하지 말래?'라는 장이 있다. 그는 가톨릭 교인으로서 교회 안에서 경험한 이야기, 한국교회를 보면서 느낀 점 등을 썼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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