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회가 닿는 대로 글을 쓴다. 그리고 그 글을 다양한 매체에서 발표한다. 이렇게 글을 쓰고 발표하는 일을 하는 목사는 그리 많지 않다. 물론 한국교회 대부분의 목사는 자기가 했던 설교를 묶어 설교집으로 편찬하는 일을 하곤 하지만, 나처럼 끊임없이 글을 써 대는 목사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고든콘웰신학교 재학 시절 만난 어떤 목사는 음식을 잘하는 전문 쉐프였다. 그래서 그 목사는 항상 요리를 했고 그의 요리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어떤 목사는 연극을 하기도 하고, 어떤 목사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것처럼 나는 글을 쓴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각각 독특하게 창조하셨으며 단 한 사람도 똑같이 만들지 않으셨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독특한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고전 12:21) 하였다. 손은 손의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발은 발의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글을 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다. 성경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말씀한다. 따라서 글을 쓰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이다. 물론 내 속에는 항상 교만이 도사리고 있고, 표면적인 목적 속에 가리어져 있다. 악한 동기가 작용할 때가 없는 것이 아니다. 모든 선한 일을 하는 중에 악한 동기가 살며시 스며들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마르다가 주님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다가 오히려 시험에 빠지고,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구제하고 기도하면서 교만해졌던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늘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경건하게 설 수 있도록 자신을 살펴보곤 한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몸부림을 친다.

나는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다가 은혜를 받거나, 성경을 해석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이 있을 때 글을 쓰면서 주의 은혜를 한 번 더 생각한다.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방법이 각각 다른데, 나는 글을 쓰면서 묵상을 하고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셈이다. 어떤 사람을 노래를 하면서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림을 그리면서 주의 놀라운 솜씨를 드러낼 수 있다. 나에게 글쓰기는 깊이 있는 묵상을 위한 도구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글을 쓴다. 하나님 뜻을 분별하여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사명인 목사이다. 나는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설교를 한다. 설교의 목적은 예배의 자리에 나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가르침으로써 영적인 진리를 깨닫게 하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삶을 변화하도록 돕는 것이다. 나는 성도들을 영적으로 목양할 때 직접 만나서 상담하기도 하고, 권면하고 위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자타가 인정하는 화려한 언변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단시간에 상대방을 만족시키는 상담을 해 줄 수 있는 번지르르한 달변가도 아니다. 전통적으로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와 상담을 통해 말을 많이 함으로써 그들의 신학과 목회관을 설명해 왔다. 물론 나 또한 수많은 설교와 상담을 하지만 내가 택한 또 하나의 도구는 글쓰기다. 전통적 방법에만 머무르려 하지 않고, 나는 글을 쓰며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려 한다. 하나님 뜻을 더 정확하게, 더 많은 사람에게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다.

글은 아주 유용하고 효과적인 도구다. 예배당 안에서 설교를 한다면, 그 예배당 안에 참석한 사람들에게만 전달될 것이다. 하지만 그 설교를 영상이나 음성 파일로 만들어 인터넷이나 방송 매체에 제공하면, 예배당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런데 글에는 그 이상으로 널리 파급되는 효과가 있다.

나는 글이라는 매개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끊임없이 해 왔는데, 놀랍게도 짧은 글의 형식을 통해 엄청난 수의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음을 발견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 글을 올리면 나와 친구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그 글을 읽을 수 있고, 더 나아가 그 친구의 친구에게도 전달되면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엄청난 파급력을 보여준다. 한 번 글을 올리면 적어도 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전파된다고 한다.

실제로 내가 쓰는 칼럼 형식의 글은 기독교인들에게만 친숙한 설교라는 포맷과는 달리, 불신자들도 쉽게 읽고 공감할 수 있다. 내 글 속에는 언제나 복음의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어서, 글을 읽고 당장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지는 못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이 복음을 향해 열릴 수 있게 준비하는 역할은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시의성이 있는 문제에 대한 성경적 답변과 고민을 말함으로써 성도들이 바른 생각과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감사하게도 내 글이 SNS에서 계속해서 공유되고 전파되면서 사람들 마음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쳤다. 실망과 좌절을 겪던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주님을 보면서 위로를 얻기도 하고, 사랑이 메말라 가던 가정들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기도 했다.

나는 종종 내 글을 읽은 사람들에게 여러 피드백을 듣곤 한다. 힘든 기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주님을 바라보면서 소망을 얻게 되었다는 고백부터, 고민하던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답변을 얻게 되었다는 피드백까지 다양한 반응을 듣는다. 그런 반응을 대할 때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람들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깨트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응답도 들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감사할 뿐이다.

나는 꾸준히 우리 교회 주보에 글을 실어 왔다. 최근 어떤 분이 내가 글을 쓰는 것을 우려하는 것을 보았다. 글을 쓰려면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하는데, 이러고 있을 시간에 목사 본연의 일을 하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는 게 그분 생각이었다. 이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글을 쓰는 것이 내게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드는 것이 아니다. 글을 자주 쓰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말보다 글이 더 쉬운 표현의 도구다. 나의 아내 또한 글쓰기를 즐겨 한다. 아름다운 자연으로 소풍 가거나, 감격스런 일을 겪었을 때면 그날 밤 침대 위에 종이와 펜을 들고 앉아 순식간에 시와 수필을 거미줄처럼 쏟아 내곤 한다. 그 글을 읽으며 사람들은 말한다. 며칠 밤을 세며 머리를 쥐어짜도 나오지 못할 감동스런 글이라고 말이다.

둘째로,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목사로서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복음을 아주 쉽게 풀어서 설득해야 하는 내게 특화된 아주 잘 맞는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셨기 때문에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적어도 선지자라면 그들을 멀리하고 선지자 본연의 일을 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수님 사명에 맞는 일을 하신 것이다. 잃었던 자들을 찾아가신 것이고 그들에게 천국의 잔치에 초대하신 것이었다. 나는 글이라는 방식을 사용하여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물론 전통적인 방식의 목회를 병행하면서 말이다.

나는 특히 젊은이들이 글을 읽고 긍정적인 반응을 해 오는 것에 고무되곤 한다. 기성세대에 통했던 목회 방식이 젊은이들에게는 잘 먹혀들지 않는다. 반면에, 젊은 세대는 글에 반응한다. 그래서 대화를 나누고, 생각을 다듬어 간다. 더 나아가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있던 사람들과 믿음의 길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으며 관심을 보이는 것에 고무된다. 확실히 글은 그들에게 다가가는 도구임에 틀림없다.

아쉽게도 목사들이 글을 쓰는 영역에서 불교의 스님들과 천주교의 신부·수녀들에게 밀리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의 상황이다. 서점가를 장악해 버린 이들의 책이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장악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뿐 아니라 이런저런 매체에서 발표되는 그들의 글이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장악한다. 우리가 최고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효과적으로 전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 선한 일에 내가 조금이나마 사용되기 위해 나의 갈 길은 아직 너무 멀기만 하다.

바울 사도는 말로 직접 소통하는 데 뛰어나지 못한 사람이었다(고후 11:6). 그래서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쓴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는 반면, 직접 만나보면 몸도 유약하고 말하는 것도 시원찮다고 비난했다(고후 10:10). 그래서 고린도교회 내에서는 유창한 달변가였던 아볼로(행18:24)를 지지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고전 1:12).

하지만 아볼로는 한때 유명했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바울이 쓴 글들은 지금까지 20세기에 걸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고 그들의 삶을 바꾸어왔다. 내 글은 바울의 글에 비할 것은 못되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 그들의 삶에 긍정적이고 선한 영향을 끼치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은 바울의 마음과 같다.

언젠가 선플(선하고 좋은 댓글) 운동이 벌어진 적이 있다. 인터넷 상에서 악플(악성 댓글)이 활개를 치며 사람들을 절망 가운데로 몰아넣고, 증오가 넘쳐나게 만드는 것에 대안으로 나타난 것이 선플 운동이었다.

악플 하나에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심지어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면, 선플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갖게 하며 따뜻한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선한 글들은 더더욱 필요할 것이다. 요즘처럼 부정적인 뉴스와 주장이 넘쳐 나는 이 시대에 한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글쓰기를 할 필요가 있다. 부족하지만 거기에 일조하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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