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김영봉 목사(와싱톤한인교회)의 '종려 주일' 예배 설교문(2016년 3월 20일, 본문: 누가복음 19장 28-40절, 제목: 무엇이 위대함인가?)입니다. 허락을 받아 전문을 싣습니다. - 편집자 주

1.

도시 예루살렘은 높은 산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육중한 화강암 돌벽돌로 쌓은 벽에 둘려 있는 천혜의 요새입니다. 이 도시는 가파른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 성벽에 만들어진 문을 통해 들어가야 합니다.

예루살렘 도시의 동편에는 올리브산(개역 개정판에는 '감람산')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는 기드론 골짜기가 깊게 드리워 있습니다. 올리브산에서 건너다 보면 기드론 계곡 건너편에 있는 예루살렘시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지금은 무슬림 사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원의 돔을 금으로 장식해 놓았기 때문에, 건너편에서 보면 그 위용이 더 대단해 보입니다. 또 하나,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금문'(the Golden Gate)이라고 부르고, 예수님 당시에는 '자비의 문'(the Gate of Mercy)이라고 불렀던 동쪽 문입니다. 그 문은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빈틈없이 막혀 있습니다.

▲ 예루살렘 동쪽 벽에 있는 '금문'(the Golden Gate). (사진 제공 김영봉)

이 문은 무슬림 제국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폐쇄되었고, 십자군이 탈환하면서 다시 개방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문을 지금처럼 완전히 밀봉한 것은 1541년에 술레이만 대제(Suleiman the Magnificent)가 한 일입니다. 이 문을 밀봉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으려는 이유였고, 다른 하나는 메시아가 오실 때면 이 문을 통해 들어오실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금문을 막는다고 못 들어온다면 메시아라 할 수도 없습니다만, 그렇게 함으로써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희망을 조금이라도 꺾어 보려 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력에 따라 '종려 주일'(Palm Sunday)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려나무 가지를 하나씩 들려 드렸습니다. 2,000년 전 오늘, 예수님은 바로 이 금문을 통해 예루살렘성으로 들어오시고, 닷새 동안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시다가 체포되어,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십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한 주간을 '고난주간' 혹은 '수난주간'이라 부릅니다. 사순절의 마지막에 오는 이 주간에, 믿는 우리는 더욱 많이 기도하고 자주 금식해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참여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교회는 매년 고난주간에 금식을 하고 금식한 끼니만큼의 금식 헌금을 드려서 '굿네이버스'를 통해 결식아동을 돕고 있습니다. 평소에도 해야 할 일이지만 고난주간에는 더욱 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의 건강 상태에 맞춰, 그리고 여러분의 영적 수준에 맞추어 '고난주간 금식 운동'에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예루살렘의 성벽에는 동서남북으로 돌아가면서 여러 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올리브산에서 출발하여 금문을 통과해 들어가셨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당시의 앞뒤 정황을 살펴보면 분명히 의도가 있습니다. 다른 문이 아니라 금문이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늘 저는 누가가 기록한 본문을 읽었습니다. 이 기록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십니다. 어느 곳에 가면 매어 있는 새끼 나귀가 있으니 풀어 오라고 하십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주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십니다"라고 대답하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가 보니,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의 신통력에 놀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초월적인 능력으로 새끼 나귀를 찾아오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미리 누군가에게 아무도 타지 않은 새끼 나귀를 구하여 어느 곳에 매어 놓으라고 부탁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가 누가 와서 끌러 가면 "그 새끼 나귀를 왜 푸는 거요?"라고 물어서 "주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십니다"라고 말하면 내어 주라고 당부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질문과 대답은 일종의 암호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역시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던 마태가 도움이 됩니다. 그는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스가랴서 9장 9절을 인용합니다. 예언자 스가랴는 메시아가 올 것을 예언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메시아가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오실 것이다! 이것이 예언자 스가랴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메시아'를 흔한 말로 바꾸면 '왕'입니다. 왕이 나귀 새끼를 탔다?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왕의 위엄과 권위와 권력에 어울립니까?

저는 집 근처에 있는 공원을 걷다가 가끔 말 탄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 옆을 지나갈 때면 저 자신이 얼마나 왜소하게 느껴지는지요? 커다란 트럭이 지나갈 때는 전혀 그런 느낌이 없는데, 말을 탄 사람 옆을 지나가면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기계와 살아 있는 생명은 이렇게 다릅니다. 말을 탄 사람에게서는 위압감이 느껴집니다. 그러니 전신 무장을 하고 말에 올라 앉은 장군 혹은 화려한 예복을 입고 말에 올라 앉은 왕을 상상해 보십시오. 당장 그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할 만한 위엄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새끼 나귀를 탄 왕이라? 이것은 광대에게나 어울립니다. 웃기자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해 메시아가 이렇게 우스꽝스럽고 초라한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예언을 생각하고 이렇게 연출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문이 아니라 금문을 택하신 것입니다. 메시아는 금문을 통해 예루살렘에 임한다고 사람들이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1541년에 금문을 봉쇄한 술레이만 대제는 헛일을 한 셈입니다. 메시아는 이미 1,500년 전에 금문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3.

금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서쪽에 있던 정문에서도 요란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총독 빌라도가 거대한 군사를 이끌고 보무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고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로부터 유대 총독으로 임명받은 빌라도는 주로 지중해변에 있던 가이사랴에서 머물렀습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거대한 원형극장과 경주장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총독은 유대인 자치 정부인 산헤드린과 대제사장에게 내정을 맡기고 가이사랴에서 향락을 즐겼습니다. 다만,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축제 기간 동안에는 거대한 군사를 대동하고 예루살렘으로 옮겨 와 성전 북쪽에 있던 안토니아 요새에 머물렀습니다.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행차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연출했던 것입니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소요와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기 몇 년 전, 즉 주후 26년에 유대 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부임한 초기 몇 년 동안 몇 차례의 반란이 일어났고 빌라도는 잔혹하게 진압했습니다. 그 잔인함에 유대인들은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라도는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의도적으로 위세를 드러냈습니다. 빌라도는 거대한 전차에 타고 있었고, 그 뒤로 말을 탄 기마병들이 따랐으며, 전신 무장한 보병이 뒤를 따랐습니다. 화려한 깃발들이 허공을 메웠고, 무기들은 햇볕에 번쩍이며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행렬의 앞과 뒤에서는 행차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진동했습니다.

왕이라면 그 정도의 위세를 가져야 했습니다. 빌라도의 행진은 로마제국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로마제국의 깃발이 꽂히면 아무도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팍스로마나'(Pax Romana)였습니다. 로마 황제는, 오직 로마만이 평화를 준다고 그리고 오직 로마의 평화만이 영구하다고 선전했습니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평화의 이름으로 잔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의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동쪽문에서 예수님이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서쪽 문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오늘 복음서를 읽는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기록해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금문에서 예수님을 맞이한 사람들, 그리고 처음 복음서를 읽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은 기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금문에서 예수님의 행진을 본 사람들 그리고 처음 복음서의 기록을 읽은 사람들은 이 본문을 읽을 때 한 가지 질문 앞에 마주 섰을 것입니다.

"누가 진짜 왕인가? 누구의 힘이 진짜인가?"

대답은 뻔해 보입니다. 열이면 열, 빌라도가 진짜 왕이고 빌라도의 힘이 진짜 힘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금빛 찬란한 전차에 올라 수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저벅저벅 진군해 들어오는 빌라도에 비해 새끼 나귀를 타고 뒤뚱뒤뚱 들어오는 예수님은 너무도 초라해 보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맞아들인 이유는 갈릴리에서 보여 주었던 기적의 능력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전차와 기병과 보병을 한 번에 물속에 수장시킨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에게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들어오시자 예수님은 기적을 끊으셨습니다. 몇몇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는 기록은 있습니다만, 갈릴리에서 하셨던 것을 비교하면 '기적을 끊으셨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그분은 예루살렘의 종교 권력자들과 진리의 싸움만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들에게 고발 당하여 총독의 군사에게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빌라도의 힘에 의해 진 것입니다. 진짜 힘은 예수님이 아니라 빌라도에게 있었던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사흘 만에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려 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힘은 기적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힘은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을 낮추고 비우고 약해져서 섬기는 힘이었습니다. 그 힘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당신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셔서 모든 왕의 왕이요 모든 주의 주로 높여 주셨습니다.

그 후에야 제자들은 깨달았습니다. 빌라도의 힘은 세상을 구원하는 힘이 아니라 억압하고 파괴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약한 힘 즉 섬기는 힘, 낮아지는 힘, 비우는 힘, 자신을 내어 주는 힘은 세상을 구원하는 힘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준 후 몇 년 되지 않아 사마리인들에 대한 지나친 처리로 인해 황제로부터 문책성 소환을 받고 해임되었습니다(주후 36년). 그 이후로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 기록이 없습니다. 빌라도가 그렇게도 되기 원했던 로마 황제들도 한때 절대 권력자처럼 행세했지만 대부분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4.

이 사건의 의미를 생각하면 '종려 주일'이라는 이름은 잘 맞지 않습니다. '나귀 주일'(Ass Sunday)이라고 부르는 게 옳습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진정한 힘은 말을 탄 장수처럼 군림하고 위압하고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나귀를 탄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비우고 섬기고 희생하는 사실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이야기를 읽고 묵상하면서 우리도 같은 질문 앞에 섭니다. 과연 인간의 위대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진실로 강한 힘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진실로 강한 사람인가? 어떤 나라가 진짜 강한 나라인가?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가지게 만듭니다. 그중 하나가 '트럼프 현상'(Trump Syndrome)입니다. 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n Great Again!)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중을 열광시키고 있습니다.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그가 제시한 방법들은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무슬림들의 입국을 막고, 멕시코 국경에 담을 쌓고, 그동안 다른 나라와 체결한 모든 무역협정을 취소하고, 다른 나라들과 싸워 빼앗긴 것들을 모두 되찾아 오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나라의 이름들을 나열하면서 "우리는 싸워서 이길 것입니다"라고 외칩니다. 미국민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할 태도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미국민들을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자신이 공화당 후보가 되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위협이면서 또한 선동입니다.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폭동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미국과 다른 강대국들을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인류 공동의 문제를 위해 하나로 단합해도 어려울 판에 모두를 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미국이 다시금 위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와중에 더욱 놀라운 일은 트럼프 현상을 떠받치고 있는 가장 든든한 지원자들이 바로 '복음주의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주의 기독교인'은 신앙고백이 분명하며 스스로를 '거듭난 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분열과 갈등과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후보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지난 주에 다트머스 대학교(Dartmouth College)의 종교학 교수인 랜덜 발머(Randall Balmer)는 <LA타임스>에 '트럼프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지지는 놀랄 일이 아니다'(Evangelicals’ Support of Trump Shouldn’t Come as a Surprise)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실었습니다.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이미 오래 전에 기독교적인 양심과 도덕성을 버리고 세속적 가치를 추종해 왔기 때문에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게 요지입니다. 복음주의자들이 예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이유에 대해 관심을 끊은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거대한 군사들을 이끌고 입성하는 빌라도가 더 매력 있어 보입니다. 도날드 트럼프는 오늘의 빌라도인 셈입니다.

5.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강한 것이고 인간의 위대함이 무엇에 있는지를 생각하게 해 준 사건이 또 하나 있습니다. 구글의 자회사인 딥마인드에서 만든 인공지능 컴퓨터 알파고(AlphaGo)와 세계 랭킹 5위의 이세돌 9단의 대결이 그것입니다. 

저는 '바알못'(바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입니다만, 그 대결에 대해서는 관심이 컸습니다. 그 대결에 관한 논평이 연일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 분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저는 관심있게 그 글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중에 제게 공감이 된 글이 몇 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만화가 박재동 화백의 글입니다. 그는 이 대결을 지켜보면서 처음에는 이세돌 9단을 응원하다가 나중에는 알파고가 이기기를 간절히 응원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흥미롭습니다.

"왜 나는 알파고가 이기기를, 그것도 간절히 바라는 것인가? 그것은 장차 알파고가 발전되면 지금 같은 국영수의 시대가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이 지배하는 시대가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에 힘이 좋은 자가 무리를 지배하던 시대가 활 잘 쏘는 자에게 밀려 지나가고, 그 다음은 무사의 시대가 시험을 통과한 관료의 시대로 교체되어 간 것처럼, 이제 똑똑하고 머리 좋은 사람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중략) 똑똑한 지배자로부터 벗어나 사람의 의미, 사람의 기쁨, 진정한 즐거움, 그런 것들이 화두이자 세계의 대세가 되는 새 시대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의미를 살리기 위해 원문을 약간 수정했음)

공감이 되지 않습니까? 인공지능이 발달하면 머리 좋은 사람들, 계산 잘하는 사람들, 눈치 빠른 사람들, 약삭빠른 사람들, 머리 잘 굴리는 사람, 잇속 빠른 사람들은 오늘날처럼 승승장구할 수 없습니다. 알파고 같은 기계들이 더 빠르게, 더 정확하게 계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되면 힘이 센 것도, 암기력이 좋은 것도, 지식이 많은 것도 힘을 못 쓸 것입니다. 기계가 못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인간의 진짜 힘이고 또한 인간의 진짜 위대함입니다.

또 하나 소개할 글은 서울대학교 재학생이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세돌의 패배에 대해 "인간의 위대함이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이렇게 씁니다.

"무엇이든 최고로 잘하고, 어떤 상대방도 이기는 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라고 애초에 생각하지를 않는다. 진정한 위대함이 그것에 있었다면, 인류가 꽃피운 화려한 문명은 진작 몰락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이 진짜 위대한 이유는, 어떤 조건에서도 상대방을 분석하고 해부하여 비참하게 이길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친구가 흘리는 눈물을 보고 마음을 바꿔 슬쩍 져 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로봇이 우사인 볼트보다 100미터를 더 빨리 뛸 수는 있겠지만, 옆 레인에 넘어진 친구를 일으켜 주기 위해 입력된 값을 포기하고 달리기를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인류가 인공지능에게 패배했지만, 인류는 여전히 위대하다. 비록 나를 포함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잊은 채 살아가는 '위대함'이지만 말이다."

알파고처럼 이길 줄만 아는 사람들을 키워 내는 세상에 이런 학생이 있다는 것이 인류의 희망입니다. 그렇습니다. 조카와 씨름을 하면서 가끔 져 줄 줄 아는 마음, 홀로 앞서가기보다는 조금 늦더라도 같이 가려는 마음, 홀로 누리며 살기보다는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며 자신의 것을 나누는 마음, 잘 난 사람들과 어울려 신분 상승을 꾀하기보다는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가 돌보는 마음,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권리를 내려놓고 낮아지는 마음, 그런 마음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윗글의 마지막 문장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합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위대함이 무엇인지를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우리는 모두, 위대함은 강해지는 것, 높아지는 것, 커지는 것, 부해지는 것, 유명해지는 것 그리고 싸워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은, 진정한 힘은 약해지는 것, 낮아지는 것, 작아지는 것, 가난해지는 것, 숨어 있는 것 그리고 싸워서 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과 사뭇 대조되는 황제의 행진 장면.

6.

오늘 읽은 본문 바로 뒤에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러 우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우시면서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누가복음 19장 42절)

빌라도가 가진 힘을 유일한 힘으로 생각하고, 서로 강해지고 높아지기 위해 경쟁하면 어떤 사태가 올지, 그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칼과 창으로 이룬 '로마의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강자가 약자를 짓밟아 이룬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자신을 낮추고 비우고 섬기고 사랑하는 것으로만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나귀 주일'에 예수님은 이 땅을 보시고 또 울고 계실 것 같습니다. 우리도 평화의 길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는지를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가 위대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진정한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함으로 인해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눈먼 경쟁과 질주가 두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인류가 인공지능 기술을 발전시켜 서로를 이기려고 경쟁하는 데에만 집중한다면, <사피엔스>(Sapiens)의 저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가 경고하는 것처럼, 인류는 2100년 이전에 인공지능으로 인해 멸망할 수도 있습니다. 인공지능을 사용해 더 빨리, 더 많이, 더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인간 됨에, 인간의 진정한 위대함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우려야 합니다.

트럼프 현상을 보고 염려하는 것은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일으킨 야만의 시대가 다시 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류가 이렇게 계몽되었으니 나치 정권같은 것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트럼프의 유세장에서 거듭 일어나고 있는 폭력 사태를 보면서 제가 너무 순진했음을 깨닫습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은 계속 폭력을 조장하는 발언을 하고, 폭력 사태에 대해 말도 안 되는 변호를 하며, 그런 사태에도 계속 승리하고 있습니다. 나치 독일의 집단적 악마성이 미국 땅에서 결집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생각에 요즈음에는 이 나라에 대한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평화의 길을 아십니까? 인간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하고 사십니까? 혹시 백마를 탄 빌라도를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귀를 탄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것 맞습니까? 로버트 커닝햄(Robert Cunningham) 목사는, 기독교인들이 트럼프를 지지하고 있는 이유는 미국의 기독교가 믿는 바대로 살기를 포기하고 바라는 바대로 살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트럼프는 미국민들이 바라는 바를 구현해 줄 메시아로 자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실은 '바라는 바'를 추구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진정한 평화의 길을 까맣게 잊고 있는 정치도 걱정이요, 과학 문명도 걱정입니다. 또한 진리를 알면서도 타락한 욕망을 따라 사는 이 땅의 기독교인들도 걱정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나귀 주일'에 우리 각자 먼저 자신을 돌아보며 물어 보십시다.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진정한 희망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과연 나는 주님의 길을 알고 있습니까? 과연 나는 주님의 길을 따르고 있습니까? 과연 나는 평화의 길, 진정한 위대함의 의미를 알고 있으며 또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가장 낮은 곳에 임하셔서
가장 높아지신 주님,
모든 이들을 섬기심으로
모든 이들을 다스리시는 주님,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 주님,
진정한 위대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 주님,
저희의 마음을 붙드시어
주님의 뒤를 따라
주님의 길을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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