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여전히 해고 노동자들이 거리에 있다. 차갑고 긴 겨울을 길에서 보낸 해고 노동자들은 협상에 나서지 않는 회사, 옛 동료들의 무관심, 사회의 지탄을 한 몸으로 받아내며 오늘도 하루를 버틴다.

▲ '십자가의 길 걷기'는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해고 노동자들과 함께 걷기 위해 기획됐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사회보장정보원은 보건복지부 산하 준정부 기관이다. 2012년 12월 28일 고객관리부 소속 상담사 42명이 일괄 해고됐다. 2013년 무기 계약직 전환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부당 해고였다. 해고자 중 두 명만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KTX 해고 승무원은 한국철도공사를 상대로 1, 2심에서 승소했지만 대법원에서 판결이 뒤집어졌다. 한국철도공사가 승무원을 직접 고용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10년의 긴 싸움은 이 판결 하나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20대 청춘으로 한국철도공사에 발을 들였던 해고 승무원들은 이제 30대, 누군가의 엄마가 돼 있었다.

사회보장정보원·KTX 해고 노동자들의 특징은 일반인에게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알려지지 않았거나 잊혀지고 있거나. 싸움·투쟁이라는 단어에 사람들은 쉽게 피로감을 느끼고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길

고난주간을 맞아 이들을 기억하고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있다. 대한성공회 길찾는교회(민김종훈 신부) 교인, 혁명기도원, 도심 속 수도 공동체 '신비와저항' 소속 기독교인 30여 명이다. 이들은 사회보장정보원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 KTX 해고 여승무원들과 함께 길을 걷기 위해 시간을 냈다.

3월 23일 수요일 오후 7시 서울 도심 한복판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충무로역 남산스퀘어빌딩 앞에 사람들이 모였다. 해고 노동자 네 명이 함께했다. 회사를 마치고 온 사람들, 행사 소식을 듣고 인천에서 온 인천나눔의집 교인, 인터넷에서 소식을 접해 나와 봤다는 60대 남성까지 참석자는 다양했다.

2.25킬로미터 걷기를 시작하기 전 민김종훈 신부가 '십자가의 길 걷기'를 설명했다. 그는 예수님이 따뜻한 교회 안도, 으리으리한 건물 안도 아닌 '거리'에서 걸으셨다는 점을 강조했다.

"어제 함께했던 사람들이 오늘 냉정하게 돌아설 때,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배신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며 길을 걸어가셨을까 묵상하다 이 길을 계획했습니다. 험난한 해고 노동자들의 길에 동참하자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억울하고 답답한 일을 당한 해고 노동자를 편드시는 분이기에 우리도 그분을 따라 그냥 함께 걷는 것입니다."

▲ 충무로역에서부터 서울역까지 약 2.25킬로미터 거리를 걸었다. 민김종훈 신부와 해고 노동자들이 성화를 들었다. 유인물을 손에 든 사람들이 뒤를 따랐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간단한 기도를 마치고 30명의 무리가 길을 나섰다. 충무로역에서 시작해 명동 중심가를 가로질러 회현역을 지나 서울역까지 가는 여정이다. 가는 길에 만나는 시민에게 나눠 줄 유인물 400부도 준비했다.

명동에 들어서자 이내 무리에게 시선이 쏠렸다. 화려한 네온사인 사이로 성화를 든 무리들이 지나갔다. 노래도 구호도 없다. 외치는 소리도 없다. 상점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지나가는 인파의 떠드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침묵 속에 해고 노동자들의 아픔을 되뇌이며 걸었다.

행진은 회현역을 지나 서울역까지 계속됐다. 행진에 함께하지 못한 사람들이 서울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성공회 예식에 따라 성찬례가 진행됐다. 행인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서울역 광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바쁘게 지나가던 중에도 예배하는 사람들을 힐끗 보고 지나갔다.

▲ 사회보장정보원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 봉혜영 씨가 발언했다. 그는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말하는 순간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가던 길을 멈추고 예식에 참여한 사람도 있었다. 자신을 성공회 교인이라고 밝힌 30대 여성은 이런 행사가 있는 줄 몰랐다고 했다. 퇴근하는 길에 우연히 예식하는 모습을 봤고, 유인물을 읽어 본 후 함께하고 싶어 남았다고 했다. 사회 약자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직접 나설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성찬례까지 참여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했다.

해고 노동자들과 십자가의 길을 걷고 성찬례를 나눈 이유는 하나다. 성찬례를 집례한 민김종훈 신부는 말했다.

"예수님은 우리끼리만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하고, 신자는 고난받는 이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 이 길을 함께 걸은 것이다."

▲ 많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함께 모여 해고 노동자들과 걷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