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개혁을 위해서는 바른 교회론이 필요합니다. <뉴스앤조이>는 현 한국교회의 상황을 돌아보고, 예수께서 고민하셨던 교회의 참모습을 살피면서, 오늘날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주원규의 해체의 교회' 연재를 재개합니다. 주원규 목사(동서말씀교회)의 연재 칼럼은 매월 첫째 주와 셋째 주 토요일에 게재됩니다. - 편집자 주

트럼프 열풍의 난해성

이걸 참 뭐라 해야 할지 난감하지만 미국에서의 트럼프 열풍이 심상치 않다. 약간은 괴팍한 느낌의 헤어스타일 소유자인 그가 버라이어티나 서바이벌 예능 프로가 아닌 CNN이나 <뉴욕타임스>에 얼굴을 비칠 때만 해도 일종의 해프닝쯤으로 취급했더랬다. 외신이나 해외 토픽에 등장하는 가십 거리 정도로만 여겼던 것이, 거리는 멀지만 정서적으로는 꽤 가까운 나라 미국에서 일어난 공화당 경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이었다.

이런 비교가 적당할지 모르지만 한국의 시청자, 대다수 시민들은 트럼프를 한국의 허경영 정도로 취급했음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트럼프의 과격 발언, 인종차별적이고 근본주의적 발언들의 허접한 수준은 논외로 하더라도 기초 시사 상식이나 간단한 경제, 외교 상식조차 알지 못하는, 가진 거라곤 돈과 부동산, 누구나 동경함직한 예쁜 모델을 세 번째 아내로 둔 부동산 재벌이란 정체가 전부인 인물이 공화당 유력 대선 후보로 떠오른 것이다.

이 사태를 처음 접한 이들 대부분은 금방 가라앉을 찻잔 속의 태풍 정도로 생각했다. 미국 내 여론분석가, 정치평론가 등을 비롯한 많은 언론도 천박한 입을 가진 트럼프가 지구 평화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고자 나섰다는 것 자체가 미국에 대한 수치라고 말했다. 언론이 '미국의 수치'라는 식의 과격 표현까지 숨기지 않으며 트럼프를 깎아내렸던 것은 그의 망언 때문이다.

유색인종, 특히 멕시코 사람들을 범죄 유발자, 암덩어리로 매도하거나 전국의 무슬림을 색출해 따로 격리해야 한다든지 하는 식의 과거 히틀러식 전체주의 발언을 여과 없이 쏟아낸 데에 언론은 경악했다. 어디 그뿐인가. 오지랖 넓은 트럼프, 경제 걱정까지 빼놓지 않으며 미국 내 생필품이 'made in china'로 넘쳐난다는 이유로 자신이 권력만 잡으면 중국 제품에 40% 이상 슈퍼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국제 경제 생태계를 자신의 말 한마디로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식의 망상에 사로잡힌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적어도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트럼프를 지지하거나 그의 편을 든다는 게 수치스럽단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당연히 트럼프는 외면받게 될 이색적인 트러블메이커 정도로 만족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미국 경선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슈퍼 화요일에 트럼프가 거의 모든 지역에서 완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공화당 당원 대부분이 트럼프에 열광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젠 트럼프의 독주를 막기 위해 다른 두 공화당 후보가 단일화를 모의하는 등 전열을 재정비하지 않으면 공화당 경선 자체가 김빠진 맥주처럼 싱겁게 트럼프의 승리로 돌아갈 위기에 빠져 버렸다.

물론 아직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다. 실제로 민주당 후보와의 최종 승부가 남아 있긴 하다. 하지만 최종 승부가 나오기도 전에 우리는 미국이란 거대 국가를 휘감아 버린 이른바 트럼프적인 미국에 대한 당혹감을 거두기 어렵다. 한바탕 자조 섞인 웃음 한 번 터뜨리고 그칠 줄 알았던 트럼프 현상이 공화당을 중심으로 대세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퓨리터니즘(Puritanism)의 이중 모순

트럼프적인 미국에 대해 조금 더 분석해 보면 그 바탕에는 공화당이란 가치 이념이 자리 잡고 있다. 물론 트럼프적인 미국은 대증적 군중심리이며, 민족주의적 강요를 통해 자국민의 이익, 더 정확히 말해 흑인, 유색인종, 그리고 무슬림에 의해 침식당해 온 백인의 고유한 생존권 훼손에 대한 발작적 저항으로 진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적어도 트럼프적인 미국의 한 단면이 대증적 열풍이나 착시만으로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트럼프적인 미국의 기저를 잠식한 건 공화당 정신이다. 그 뿌리엔 기독교, 그중에서도 남부 침례교로 대표되는 근본주의적 색채로 가득한 보수주의 신학이 자리 잡고 있다.

보수주의 신학은 좀처럼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보수주의 신학의 근간인 청교도주의(淸敎徒主義), 퓨리터니즘(Puritanism)이 언제 부동산 재벌을 국가의 지도자로 인정했던가. 퓨리터니즘이 언제 자본주의를 찬양했으며, 언제 막말과 경솔한 언행, 인종차별적 발언을 용납했느냐고 따져 물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공화당이 가진 가치 이념의 순결성은 자신의 욕망이 잉태한 또 다른 이면적 잔류물, 욕망의 전리품에 대한 자기 합리화에 세뇌되어 있다.

신의 순수한 계시와 그에 반하는 죄에 빠진 인간 사이에서의 날카로운 구분, 욕망의 반대편에 선 교회, 신앙, 계시에 대한 믿음의 순결성을 강요하는 와중, 순결성의 기준에서 탈락한 불편한 잉여들에 대해선 침묵하거나 전체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며 회개와 각성이란 이름으로 신의 그늘 아래 놓아두었다.

퓨리터니즘은 그 기묘한 방치의 공존에 있어 기겁할 정도로 끔찍한 인간의 욕망이 어느새 신의 축복, 인간은 이해할 수 없지만 신은 이해할 수 있다는 식의 섭리와 계시 차원에 의해 잠식되어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보수주의 신학을 바탕에 둔 교회, 그 교회의 근본 가치를 정치적 어젠다의 근본으로 설정하는 공화당의 이념 바탕에는 트럼프가 말하는 막말과 인종차별적 발언, 국수주의적 발상, 대중의 강박과 두려움에 대한 즉물적 대안 등을 비난하면서도 수용하는 체질이 숨쉬고 있다. 이는 모든 현상이 절대자의 뜻, 신의 영역이라며 합리화하는 이중의 모순을 신성시하게 된 단면인 것이다.

비약이 허락된다면 현 시점에서 광풍처럼 몰아치는 트럼프적인 미국은 얼핏 보면 눈에 보이는 성공과 지구의 심판자임을 자처하는 미치광이의 전체주의 놀음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자웅동체처럼 혐오와 갈구의 두 얼굴로 받아들였던 트럼프적인 교회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솔직하다는 미명하에 거침없이 쏟아 내는 트럼프적 막말, 그 욕구의 배설은 오늘의 교회에 그런 말과 생각을 겉으로는 혐오해 왔지만 결국엔 그것을 욕망해 왔지 않느냐는 치열한 반문을  던지고 있다. 전체주의가 인류 학살의 주범임을 인정하면서도 전체주의의 결과가 어느 한 미치광이, 전능한 악마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라고 떠들어대는 망언 속엔 '히틀러'로 상징되는 전체주의 성립을 가능케 한 광인을 일국의 지도자로 추대해 준 인간 모두의 공범 의식에 대한 성찰은 오간 데 없다.

천민자본주의 기질로 도색된 자국 내 타락한 문화를 '소돔과 고모라' 운운하며 혐오하면서도 맘몬의 지배자가 쏟아 내는 솔직한 욕망에 대해서는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더 은근한 관심을 내보이는 트럼프적인 교회의 이중 모순은 외부의 적을 어떤 식으로든 소환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무슬림이 그들의 적이며, 냄새나고 범죄율 높고 지식수준도 낮은 – 이 역시 순전히 트럼프적인 자의적 해석 기준에 불과하지만 – 멕시코인들이 인종청소 영순위, 외부의 적이 된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한국 사회, 오늘의 한국교회는 트럼프적인 미국, 트럼프적인 교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아니, 최소한 다르기는 한 걸까. 불행하게도 자유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다른 점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본다.

놀랍도록 트럼프적인 오늘의 한국교회

전부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한국 개신교를 구성해 온 네 가지 요소는 배타성, 성공지상주의, 반공 이념, 그와 함께 친미 성향일 것이다[한국 개신교의 근본적 네 요소의 발상은 김진호 님의 책, <시민 K. 교회를 나가다>(현암사)에서 차용]. 배타성의 요소는 물론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교회의 정체성과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이 맹신의 바탕 위에 세운 것이 아니라면 배타성의 유효함은 논의의 장에서 충분히 토론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교회의 배타성은 맹신적 바탕의 근간을 뿌리칠 수 없는 무조건 믿음이란 논리에 깊이 함몰되어 있다. 거기에 최근 웰빙의 주제까지 연결된 '잘사는 법' 따위의 신앙 구호는 성공지상주의의 텃밭 위에서 자라난 특용작물이란 혐의를 지울 수 없다. 그와 함께 언제나 교회는 예수의 공공성이나 사회윤리에 대한 각성과 반성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반공 이념의 첨병에 예수의 가르침을 자리매김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겪은 한국교회에서 반공 이념이 차지하는 비중은 교회의 정체성 문제로까지 연결될 정도로 막강하다.

필자는 이러한 세 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결과물이 친미 성향임을 조심스럽게 밝히고자 한다. 근본주의의 수혈은 미국적 퓨리터니즘의 사대주의 변종으로 한국교회에 이식되던 순간부터 시작되어 온 원죄와 같은 불편함이다. 성공지상주의 역시 군사독재와 경제개발 시기에 맞물려 폭발력을 가진 고도성장 시대가 낳은 미국적 자본주의의 아류다.

반공 이념은 또 어떤가. 지구 평화의 수호자임을 자임한 미국적 가치가 가져온 주적 개념은 최소한의 내적 성찰의 과정조차 생략한 채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식의 편 가르기 이념으로 자리 잡았지 않았는가. 이러한 노골적인 친미 성향이 오늘의 한국교회 안에도 그대로 이식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미국 사회의 근간을 휘덮어 버린 트럼프 열풍에 대한 교회의 증오와 은밀한 추종 욕구 역시 한국교회가 사회를 바라보고 사회에 대한 어떤 포지션을 취하는 데 있어 그대로 적용된다는 의혹 또한 쉽게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근본주의적 성향을 띈 보수주의 교회는 뼛속까지 스며든 트럼프적 속물근성에는 역겨움을 드러내면서도 그의 튀는 언행을 통해 나타난 근본주의적 발상에 대해서는 은근한 찬동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기복신앙적 행태를 속물근성이라며 맹비난하면서도 그 근간에 근본주의적 욕구로 도색된 친미 성향의 추종 욕구를 빼닮은 한국교회와 무엇 하나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제는 의식 있는 보수와 진보 이념이 점차 사라져 가는 한국 사회의 정치, 종교적 현실에서도 더 이상 희화화될 수 없는 트럼프적 한국 정치, 트럼프적 한국교회가 본격화되지 말라고 막아 세울 명분이 사라지고 있다. 어쩌면 오늘의 한국교회는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수많은 트럼프들이 강대상 위에서 성도를 향해 돈과 성경을 무기 삼아 삿대질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안타깝게도 미국의 현상은 세계의 현상과 긴밀하게 맞물려 버렸다. 특히나 한국의 종교 현실은 더욱 그렇다. 최근 미국에서 발발한 트럼프적 미국, 트럼프적 교회의 공생관계는 동시에 한국교회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종교 현실의 한 척도임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현실을 자각한다고 뭐가 달라지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 자각은 모든 행동과 결정의 근간이 된다. 오늘의 교회 인식이 내일의 교회에 점진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설령 변화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악은 막아 세우는 차악은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이래저래 서글프긴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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