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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지긋지긋했던 겨울이 가고 사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봄이 찾아왔다. 꽃구경하기 이른 시기지만, 저 밑 남도에는 매화꽃이 피기 시작했다. 분홍, 연노란 매화꽃 봉오리가 고개를 내밀 즈음, 농부들은 겨우내 창고에 잠자던 농기구를 꺼내 든다. 곡괭이로 밭을 갈고, 삽과 호미로 땅을 파 씨앗을 심는다.

봄기운이 완연한 3월 중순, 전남 보성군 벌교읍을 찾았다. 한때 목사였던 이가 농부로 변신해 농사를 짓고, 지방선거에도 나가는 등 독특한 삶을 살고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주인공은 바로 최혁봉 씨(44). 그를 만나기 위해 벌교로 향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산'으로 올랐다.

차를 타고 산과 산 사이에 있는 좁은 도로를 따라 7분 정도 올라갔다. 밭밖에 보이지 않는, 여섯 가구만 사는 아주 작은 산골 동네가 나왔다. 산 중턱에 오르자 황토색 집이 보였다. 최 씨 가족이 사는 보금자리다. 어머니와 아내, 아들 넷과 살고 있다.

전화를 걸자, 최 씨가 잰걸음으로 마중 나왔다. 방금 전까지 일하고 온 듯 옷에 먼지가 가득하다. 악수를 건네는 손의 촉감이 거칠면서도 따뜻했다. 덥수룩한 머리와 기다란 수염 탓에 '자연인'처럼 보였다. 황토로 지은 집으로 자리를 옮겨 최 씨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아내 유혜숙 씨(45)도 함께했다.

신앙인으로 살고 싶어 '자연'을 택하다

최혁봉 씨는 스무 살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어릴 적 동네 문방구 아저씨가 목사가 돼 교회를 개척했다. 최 씨는 간암에 걸린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교회에 다녔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는 신앙생활을 하며 안정과 행복을 느꼈다. 아버지의 변화를 목격하면서 실존 문제를 생각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은 계속됐다. 다니던 한국해양대학교를 그만두고 총신대에 입학했다. 다니던 교회가 예장합동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신학교 생활은 기대에 못 미쳤다. 오히려 답답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신학보다 해방신학과 공동체신학에 관심이 많았다. 관련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신대원 졸업 후 목사 안수까지 받았지만 목회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신앙을 지키며 살 수 있을지 고민했다. 문제의 원인을 '공간'에서 찾았다. 언제부터인지 도시 생활이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처럼 불편했다. 결론을 내렸다.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떠나자.'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살 곳을 알아봤다. 맘에 드는 곳도 있었지만 땅값이 비싸 선택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한겨울 낯선 땅 벌교를 찾았다. 산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따라 올라갔다. 당시 마을에 있는 한 어르신에게 빈집 없냐고 물었다. 마침 한 집이 비어 있었고, 이틀 뒤 바로 계약했다. 2005년 어머니와 아내, 자녀들을 데리고 인천에서 벌교로 이사했다.

▲ 인터뷰는 최 씨가 직접 지은 황토 집에서 진행됐다. 약 5m에 다다르는 천장 높이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어머니, 아내, 아들 넷이 이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처음이 어려웠다. 최 씨 부부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꽤나 걸렸다고 했다. 아내 유혜숙 씨는 "시댁, 친정, 친구들 모두 인천에 있어서 그리웠다. 1년간 남편 몰래 많이 울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사실 유 씨는 남편이 목회를 하는 줄 알고 따라왔다. 최 씨는 벌교에 오기 3년 전부터 아내를 설득했다고 말했다. '공동체 사역' 이야기를 꺼내며 농촌에 대한 환상을 심어 줬다고 말했다.

벌교에 올 때까지만 해도 먹고사는 문제는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최 씨에게는 자유를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이 더 중요했다. 몇 안 되는 마을 사람들과 교류하며 농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의 밭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첫해 수입은 100만 원도 안 됐다. 부업 삼아 순천에 나가 막노동도 했다. 벌교에서 자리 잡기까지 딱 5년이 걸렸다.

지금은 전업농이다. 키위와 고구마를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1,000평 과수원에서 키위를 생산한다. 화학비료, 농약, 거름을 일체 쓰지 않는 '자연 농법'을 고수한다. 5,000평 밭에서는 고구마와 배추, 감자, 생강, 고추 등을 재배한다. 역시 농약이나 화학비료는 사용하지 않는다. 생산량은 떨어지고, 노동력은 곱절로 들어가지만 이런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가 있다.

"고구마 심는 계절이 돌아오면 새벽부터 나가 일해요. 농약을 안 쓰니 노동력은 배로 들어가죠. 조금 힘들지만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는 게 신앙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죠. 무농약, 자연 농법으로 만든 수확물을 거둘 때면 보람도 느끼고, 힘든 것도 잊어 버리죠." - 유혜숙 씨.

"몇 년 전 대학 후배가 일주일간 지내며 일을 도와준 적 있어요. 마지막 날 후배 아내와 5살짜리 딸이 왔어요. 아이가 맨발로 밭에서 뛰어노는 것을 보고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만약 우리가 농약과 제초제를 썼다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거예요." - 최혁봉 씨

자연 농법으로 지은 작물은 도시 사람들과 공유한다. 최 씨를 포함한 6명의 농부와 26가구가 꾸러미 교류를 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각 가구에서 수확한 작물을 보내 주는 것이다. 반응이 좋아 올해 6월부터 50가구로 늘리기로 했다.

최 씨는 남녀 사이에 인연이 있듯 땅과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징광산 중턱에 자리 잡은 최 씨는 앞으로도 땅과 교감하며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농부, 열혈 녹색당원 되다

▲ 최 씨는 열혈 녹생당원이다. 4·13 총선을 앞둔 가운데 녹색당 홍보에 여념이 없다. 매일 아침 아내와 처형과 함께 벌교읍내로 나가 피케팅을 한다. (사진 제공 최혁봉)

정치 활동에도 열심이다. 그는 기독교가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도 정치범으로 몰려 죽음을 맞았다. 종교가 정치 개입을 터부시하는 것은 나이브하다는 입장이다. 철저히 정치적이되, 기득권에 편승하는 것은 더 철저히 지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씨는 녹생당원이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그의 가치관을 뒤흔들었다. 유한한 지구 환경 속에서 무한을 꿈꾸는 인간의 이기주의가 빚은 인재(人災). 이듬해 원전 폐기를 주장하는 녹색당 창당 소식을 접하고, 바로 가입했다. 자연과 생명을 맨 앞에 두는 녹색당 가치가 최 씨의 신앙과 들어맞았다. 그는 당원들과 함께 강정 해군기지, 밀양 송전탑 등을 찾아 반대 운동도 전개했다.

제비뽑기로 녹색당 전남도당 당원협의회 공동운영위원장에 선출된 그는 2014년 6월 지방선거 전남 도의원에 출마했다. △농민 기본 소득제 실시 △귀농 정책 활성화 △농촌 지역 무료 에너지 자원 지원 확대 등 여러 공약을 내걸었다. 지역민 반응이 예상보다 좋았다. 비록 낙선했지만, 22.01%라는 높은 지지를 얻었다. 당시 지방선거에 나선 녹색당 출마자 가운데 가장 높은 지지율이었다.

최 씨는 누구보다 정직하게 선거를 치렀기에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선거법이 강화됐다고 하지만, 알게 모르게 금품과 향응이 오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한 주민은 최 씨에게 "막걸리도 안 사주면서 뽑아 달라고 하느냐"고 불평했다.

공동운영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난 최 씨는 현재 평당원으로 있다. 직책에 상관없이 당 활동에 열심이다. 4·13 총선을 앞두고 매일 아침 벌교읍에 가서 녹색당 홍보를 위한 피케팅을 한다. 같은 당원인 아내와 처형도 그를 따라나선다.

"녹색당이 추구하는 가치가 '이상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생각해요. 후쿠시마 사고 현장 반경 30km 안은 아무도 살 수 없게 됐어요. 바다로 유출된 방사능은 지금 우리 식탁에 오르고 있고요. 원전이 제공하는 편리함이 있지만, 결국 '화'는 우리 또는 후대에 돌아올 수밖에 없어요. 무분별한 산업화와 근대화에서 벗어나자는 게 결코 이상적인 이야기는 아니죠. 이번 총선에서 3%의 지지율만 얻으면 국회의원 비례대표가 선출돼요. 국회 안팎에서 생명의 가치를 홍보하면 시민들도 적극 동참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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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최혁봉이 꿈꾸는 세상

그에게는 꿈이 있다. 고령화되는 농촌 사회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정부가 나서서 구조를 바꿔야 한다. 농촌에서도 먹고살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해 줘야 한다.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도 많다. 20년 전 쌀 가격이 지금과 별 차이 없고, 갈수록 늘어가는 GMO(유전자 변형 생물) 수입 문제 등이다. 한국의 1년 쌀 생산량은 400만 톤 정도인데, GMO 수입량은 1년 1,000만 톤이 넘는다.

최 씨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며 농사짓고, 사회 약자들을 돕고 있다.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 대회를 하다 쓰러진 농부 백남기 씨를 위해 고구마를 팔아 100만 원을 후원하기도 했다.

한때 목사였던 최 씨는 앞으로도 '농부'로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이 만든 땅과 인연을 맺었으니, 아낌없이 사랑하고 교류하겠다는 것이다.

"농촌이라는 공간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 원리대로 살아가는 모습이야말로, 참신앙인이지 않을까요."

흙냄새 묻어나는 최 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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