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생각했다. 맞다. 예수님은 메시아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한 메시아는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들이 기다려왔던 메시아라고 기대했다. '메시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기름 부음받은 자라는 뜻이다.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그리스도가 된다. 이 말은 왕을 세울 때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왕이 될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즉위식을 거행했던 것에서 유래한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왕이 되어줄 '메시아'를 기대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으면서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외세에 의해 착취당하고 고통을 당했다. 그러면서 그 옛날 다윗 왕조의 영광을 되찾을 날을 고대하였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다윗의 후손 중 다윗과 같은 왕이 다시 일어나 그 시절에 누렸던 영광을 되찾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이스라엘 민중은 환호했다.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장정들만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이셨을 때, 광야에서 40년간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했던 모세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 되기만 한다면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될 것만 같았다. 예수님은 로마의 하수인인 세리들이 이스라엘 민족의 피를 빨아먹는 현재의 상황을 해결해 줄 유일한 대안으로 예수님이 떠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있는 저 로마제국과 더불어 싸우자'고 외치면 다 함께 무장봉기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 예수님이 등장하기 얼마 전, 이스라엘 민족은 마카비 형제가 이끄는 무장봉기를 통해 외세를 축출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했던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 혁명은 오래가지 못했고 혁명을 이끌던 집안은 타락의 길을 걸었다.  그 경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상당한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 앞에 새로운 소망이 나타났다. 갈릴리 출신의 예수님이다.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이 좀 마음에 걸렸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그들을 배불리 먹여 주고 자유를 쟁취하게만 해 준다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은 없었다.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메시아라고 소개했던 세례요한의 실망은 더더욱 컸다. 예수님을 소개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으니 지금쯤이면 로마 군을 무찌르기 위한 구체적인 세력을 규합했어야 했다. 마카비 형제가 순식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대단한 전투 성과를 올리며 시리아 군을 무찌르는 혁혁한 전과를 세운 바 있는데, 그 마카비 형제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으로 생각되는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었다. 

예수님은 병을 기적적으로 치유하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당장 로마 군을 무찔러 주지 않는 예수님에 대한 실망감이 커져만 갔다. 아니 예수님은 로마 군을 무찌르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만 같았다. 더구나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세리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시고만 있는 게 아닌가?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소개했던 세례요한은 사람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 11:3) 

세례 요한의 답답함이 묻어있는 질문이었다. 메시아라면 그렇게 한가하게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없는 것이었다. 세력을 규합해서 로마군을 무찌를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아니었다. 사실 그들의 문제는 로마군의 압제하에 있다는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탄의 압제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죄를 저지르며 살아간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로마 군을 무찌르는 것으로 그들의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훨씬 더 시급한 문제였다. 예수님은 로마 군을 무찔러서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그들을 죄의 사슬에서부터 구원하는 영적인 '메시아'였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대답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 11:6) 

또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 18:36)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여러 가지 비유를 사용해 사람들을 가르쳤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나님나라는 이스라엘 민족이 생각하고 고대하던 하나님나라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이스라엘 민족이 생각했던 하나님나라는 다윗이 무력으로 외세를 정복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영화를 누리며 살게 만드는 것이었다. 다시 그런 시대가 오는 게 바로 하나님나라가 회복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이 가르친 하나님나라는 그런 게 아니었다. 전격적인 변화를 기대하던 이스라엘 민족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께서 말한 하나님나라는 마치 겨자씨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결국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고난을 통한 하나님나라의 회복을 가져오는 메시아라는 개념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당혹스러움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님에게 실망감을 느끼고 배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마 16:21)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기 시작하셨을 때, 그를 붙들고 베드로가 항변했다고 했다.(마 16:22)  한국말로 항변했다고 번역된 이 말은 사실은 꾸짖었다는 뜻이다.

놀랍지 않는가? 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꾸짖고 있는 바로 그 장면이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의 답답함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마태복음 16장 23절을 보면, 놀랍게도 예수님이 그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다.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기대하는가? 우리는 어떤 교회를 기대하는가? 우리는 어떤 신앙생활을 기대하는가? 과연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인가? 아니면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난주간을 앞에 두고 나의 모습을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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