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도에 사는 김호영 씨(1급 뇌병변 장애인)는 지난 19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써 왔다.나는 그 사연을 방송국에 제보했다. 페이스북에도 올렸다. 그랬더니 <뉴스앤조이> 기자에게 연락이 왔다. 기자는 김호영 씨를 만나 인터뷰를 했다.

기자는 김호영 씨가 현재 교회를 나가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보였다. 일기 곳곳에 남아 있는 기록을 토대로 '그가 교회를 떠난 이유'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기사가 나가고, 몇몇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 모두 김호영 씨가 교회를 떠난 사실을 두고 안타까워했다. 그 반응의 모양은 조금씩 달랐다.

교회가 장애인을 돌아보지 못하는 현실을 두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물론' 있었지만, 교회가 사람을 보고 가는 곳이라면 사교 모임과 무엇이 다른가 하면서 "교회는 하나님을 보고 가는 곳이지 사람을 보고 가는 곳이 아니다"고 하는 사람도 '여전히' 있었다. 어떤 이는 김호영 씨가 관계 맺는 데 소극적이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네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했다. 나는 이런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자꾸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대놓고 말해 보자. 우리는 교회에 왜 나가는가? 예배하러 간다고 말할 것이다. 맞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교회에 간다. 그런데 그뿐인가. 교회에서 우리는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고, 그 사람들과 '함께' 교제한다.

김호영 씨도 교회에 가서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고 사람들과 '함께' 교제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것이 어려웠다. 주일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회에 가서 시간을 보냈지만, 누구 하나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있어도 없는 존재. 아니, 없으면 더 좋을 존재였다.

김호영 씨는 그 속에서 오랫동안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교회를 떠났다. 그리고 현재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 누구에게 문제가 있는가. 교회에서는 그를 무시한 적도 없고 업신여긴 적도 없는데, 스스로 자격지심에 그런 느낌을 받고 교회를 떠난 것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 보자. 야고보서를 보면 부자와 가난한 자를 대하는 모습을 두고,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한다. 차별은 다른 게 아니다. 다르게 대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의도적으로 그를 무시하고 업신여기지 않았다 해도, 그를 다른 사람과 다르게 대했다면 그를 차별한 것이다.

한 장애인이 이런 말을 했다.

"한국교회는 속도와 효율에 매몰되어 있다."

장애인은 속도와 효율에 밀려 교회 중심에서 자꾸 배제, 소외되고 있다. 함께하려고 해도 끼리끼리 놀라고 하며 밀쳐 낸다. 그저 도움받을 존재로만 여기고 교제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모멸감을 느끼게 한다.

왜 그렇게 조급한 것인가. 조금 늦게 가면 어떤가? 조금 천천히 가면 안 되는가? 그렇게 함께 갈 수는 없는가? 그게 사랑 아닌가?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이렇듯 교회는 서로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하나님 보고 가는 곳이지 사람 보고 가는 곳 아니다"는 말은 하면 안 된다.

▲ 정용균 목사. ⓒ뉴스앤조이 최승현

그 말은 교회가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개인 몫으로 돌려 버리게 한다. 그 말을 따르면, 김호영 씨가 교회를 떠난 것은 교회 책임이 아니라 김호영 씨 책임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 말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참 말이 안 되는 말이다.

김호영 씨가 관계에 소극적이었다고 지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 또한 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유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 교회 책임을 회피해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잊지 말라. 교회는 하나님을 보고 가는 곳이지만 사람을 보고 가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교회는 교회다워지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세상이 알게 될 것이다.

정용균 / 목사.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부산장애인전도협회를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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