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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로 영업하는 교회
성전주의 신앙과 예배의 상업화
  • 신성남 (canavillage@yahoo.com)
  • 승인 2016.03.15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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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하루 종일 마음이 울적했던 기억이 있다. 근래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에 빠진 여동생이 찾아와 도움을 간절히 구했지만, 이를 외면한 교인이 그 다음 달에 가족 동반 해외여행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또 장사가 잘돼서 부자가 된 어느 집사가 거액의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치면서 막상 너무 궁핍해 생계를 걱정하는 동생 가족은 별로 돌보지 않아 동네에서 '공공의 적'이 되었다는 말도 들었다. 왜 우리는 이 지경까지 망가졌을까. 도대체 우린 교회에서 무엇을 배웠기에 이 모양이 되었을까.

일부 교회에서 잘못 가르치는 것은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교회당 건물을 신성시해 '성전'이라고 가르치는 것도 그러하다. 무지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알고도 고의로 그러는 건지 그 깊은 속내를 알 수 없다. 왜 어떤 목회자들은 틈만 나면 교인들을 오도하는지 모르겠다.

오늘날 어떤 교회들은 수백 억 또는 수천 억의 돈을 걷어 화려한 예배당을 높히 세운다. 이로 바벨탑이나 성황당처럼 신도들을 유혹한다. 초신자들은 성숙한 신앙을 미처 알기도 전에 성전주의, 예배주의, 성장주의와 함께 기복 신앙부터 먼저 배우기도 한다. 더구나 그 육식 공룡 같은 건물은 대형 마트 하나가 동네 시장 전체를 죽이는 것처럼 동네 작은 교회를 줄줄이 도살하고 있다.

성도가 성전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 벽돌 덩어리를 성전이라고 주장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건 그의 머리가 돌이라는 말과 같다. 그런 거짓말이 나오는 이유는 목사가 뛰어나게 무식하거나, 아니면 양심이 지극히 결여된 경우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고 하셨다. 물론 여기서 다시 일으킬 성전은 부활하실 예수의 몸, 즉 그리스도의 지체인 '신약 교회'를 의미한다.

성전을 허물라고 하신 이유는 어린양 예수가 온전한 제물이 되어 앞으로는 구약 율법에 따른 성전 제사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 사역 이후 구약의 성전, 제물, 제사장이 폐지되었다. 아울러 반드시 성전에서 바쳐야 했던 율법의 십일조도 함께 사라졌다. 사도들의 초대교회에 제사와 십일조가 시행된 기록이 전혀 없는 이유다.

신약시대의 성전과 제사장은 성도들 자신이다. 사도 바울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고 설파하신 그대로다.

따라서 오늘날 적지 않은 교회에서 '성전 건축'이라는 용어를 쓰거나, 교회당 건물을 무슨 성전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사실 대단히 용감하고 무지한 행동이다. 이제 해 아래에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들 자신 외에 다른 건물 성전이란 결코 없기 때문이다. 예배당은 그저 모임의 편리를 위한 처소일 뿐이다.

초대교회가 '솔로몬 행각', '다락방', '회당', 그리고 '가정집' 등에서 모인 이유도 건물 자체에는 아무런 특별한 영적 의미가 없었기에 그런 것이다.

그러면 과연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이런 초보적 사실을 정말 몰라서 만날 그 얼어 죽을 '성전 타령'을 할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적어도 교회학교 교사 정도면 모두 알 만한 이런 기본 지식을 신학 전공자인 목사들이 모를 리 없다. 아마 십중팔구는 자신의 양심을 속이며 신도들을 기만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정말 몰랐다면 그는 목사로서 자질이 매우 부적격한 사람이다.

만일 예배를 드리는 특별한 장소이기에 그 건물이 거룩한 성전이 된다고 주장한다면, 예식장이나 식당에서 예배하면 그 예식장과 식당이 갑자기 성전으로 둔갑하나. 그리고 그런 식이라면 예배당 화장실은 무슨 '거룩한 뒷간'이라도 되는가.

더구나 이미 술집이나 유흥업소로 간판을 바꾼 유럽의 많은 교회당들은 거룩한 성전이 변신한 것이란 말인가. 아니면 그들은 감히 하나님의 성전을 돈 받고 팔아 먹었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들이 천벌을 받아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았는지 묻고 싶다. 특히 박사 학위까지 소지한 대형 교회의 멀쩡한 목사들이 수시로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기만할 때면 구토가 날 지경이다.

반면 "불의에 침묵하는 종교는 필요 없다"고 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일갈이 이들의 거짓말과는 너무나 대조되어 가슴이 아릴 정도다.

'성전 우상화'는 '목사 우상화'의 아류

아무튼 그들은 왜 '성전 신앙'이나 '건물 신앙'을 그토록 집요하게 강조할까. 한마디로 교회당 중심의 신앙생활을 유도하기 위함이다. 그래야 신도들을 눈에 보이는 종교적 미신으로 이끌어 더욱 효율적으로 교세 안정을 추구하고, 사람을 모으고, 돈을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가 빨리 성장할 수 있기에 아주 약발이 좋은 명분이 될 수 있다.

더구나 구약의 성전은 본래 제사하는 곳이다. 성전과 제사장은 불가분의 관계다. 따라서 성전에는 당연히 제사장이 있었으니 오늘날 자신들이 그 역할을 가로채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주의'는 태생적으로 '성직주의'와 이란성쌍둥이다.

우리는 작금의 성직주의를 현대판 '교황주의'라고 비판한다. '건물 우상화'를 추구하는 성전주의자들의 궁극적 속셈은 '직분 우상화'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국 목사직을 교인들이 감히 손댈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만들고자 예배당을 우상화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찌하든 예배당을 성스럽게 포장해, 마치 구약의 지성소처럼 그곳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신성한 장소로 각인시키려 애쓴다. 거기서 예배하면 더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가깝게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세뇌하는 것이다. 이른바 예배의 상품화를 추구한다.

그들은 공 예배를 '인생 최고의 신앙 행위'로 중시하며 강조한다. 그 결과 많은 신도들은 '예배지상주의'에 깊이 중독된 상태다. 예배만 잘하면 복은 따 놓은 당상이라 믿는다. 그래서 주마다 예배는 넘치지만, 삶이 부실하다. 믿음은 있는데 행함이 없다. 열심은 있지만 열매가 없다.

물론 이런 종교적 기만에 십자가 장식이 아주 긴요하게 쓰여지고 있다. 요즘 강단을 '제단'으로, 목사를 '제사장'으로, 그리고 목사님 말씀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자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신약 교회에는 더 이상의 성스러운 단이나, 성스러운 물이나, 성스러운 건물이나, 성스러운 땅이나, 또는 특별히 더 성스러운 인간 따위가 별도로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게 바로 우리가 개신교에서 날뛰며 예배당을 서낭당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중세적 '기독교 무당'들을 엄중히 축출해야 하는 이유이다.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래 이단들이 쓰던 수법이었다. 그런데 수십 년전부터 여의도의 한 대형 교회가 이런 기만적 호칭에 앞장을 서더니, 근자에는 정통 교단의 교회들마저 너도나도 이 몰상식한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물론 매주 교회당에 모여 예배하는 것은 지극히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그게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건물을 우상화해서라도 어찌 하든 교인들의 생활을 교회당 안으로 유도하여 이용하려는 그 인위적 행위와 심보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성전이라는 고상한 명분으로 가능한 자주 모이게 하고, 많이 바치게 하고, 그리고 제사장처럼 군림하기가 좋기 때문이다. 이들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거짓된 수단도 가리지 않는 변절자들이다. 따라서 이단이나 사이비 교회에서처럼 목사의 독선적 '토크쇼'로 공연되는 '관람형 예배'에 대해 매우 조심할 필요가 있다.

구약의 성전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신성한 장소였다. 하지만 유대 백성들은 성전 제사와 절기만 잘 지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기며 하나님의 임재를 성전 속에 가두고, 정작 사생활에서는 제멋대로 방종하거나 우상을 섬기며 산 경우가 많았다. 엄숙한 제사는 있었는데, 바른 삶이 없었다. 화려한 성전은 있었지만, 진리가 없었다.

이스라엘에 최초로 성전을 세운 위대한 왕 '솔로몬'조차 이방의 처첩들과 우상들 속에서 살았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눈에 보이는 화려한 건물을 세웠다고 능사는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의 이웃이 성전이다

예배당 건물을 신성시하는 그릇된 성전 신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바른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부귀에 탐익했던 노쇠한 왕 솔로몬처럼 '삶이 없는 제사'를 바치는 맹신과 방종의 길이다.

긴 옷을 입은 이리들에게 속지 말아야 한다. '성전주의자'들은 예배당 벽돌로 영업한다. 그러나 건물로 사람을 모으고, 돈을 모으고, 세력을 모으고, 그리고 허세를 떠는 것은 십자가 정신이 아니라 바벨탑 정신이다. 그런 배역한 행위는 변절한 종교 업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야말로 '성전'된 신자가 할 일이다. 따라서 교회당 건물과 교회당 조직과 교회당 모임에만 돈과 시간을 퍼붓지 말고, 자신의 가정과 친인척과 이웃을 균형 있게 도우며 살아야 옳다.

본래 구약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다.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 오셨던 예수 자신이 바로 계시된 말씀(로고스)이시다. 따라서 진정한 성전 신앙은 참성전이신 예수의 가르침인 성경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겸허히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구약이 '성전 중심 신앙' 시대였다면, 신약은 '성경 중심 신앙'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일찍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해 세상 나라들을 향한 '제사장 국가'로 세우셨다. 그러나 그들은 이 거룩한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성전마저 타락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2,000년 전 예수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손수 이 땅에 온 이유이다.

그리고 구약의 '성전 사역'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신약 교회에서는 성도 자신이 성전이다. 뿐만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형제와 이웃이 성전이다.

하나님은 예배당 벽돌 속에 갇힌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 어디에나 계신다. 우리 인생의 모든 영역에 함께 계신다. 특히 소외당하고 있는 우리 이웃의 눈물 속에 계신다. 가난한 자 속에 계시고, 애통하는 자 속에 계시고, 화평케 하는 자 속에 계시고,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속에 계신다.  

오늘날 교회마다 예배는 풍년인데 삶이 빈약하다. 예배는 요란한데 삶이 천박하다. 예배는 고상한데 욕심을 못 이긴다. 수십 년을 예배해도 목사와 교인의 삶이 별로 변하지 않는다. 직위와 감투는 좋아하는데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다. 직분자들마저 그저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시대정신이 되었다. 오죽하면 어떤 이들은 '개신교'를 '개독교'라고 성토할까.

그동안 고가의 대형 예배당을 건축한 교회들 중에 담임목사의 재벌급 초호화 생활이나 세습이나 재정 비리가 없었던 교회가 과연 몇이나 있었나. 이들 대부분은 세인들에게 혹독한 비판이나 욕설을 듣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사랑의교회, 소망교회, 금란교회, 광림교회, 명성교회, 왕성교회, 경향교회, 그리고 충현교회가 그 좋은 예이다. 이 외에도 삼천리강산 방방곡곡 도시마다 일일이 다 셀 수 없이 아주 많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들의 '예배 영업'은 매우 성업중이다. 예배가 넘치는 곳엔 돈도 넘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적 건물로 허풍 떨거나 극장식 예배로 쇼하지 말라. 그건 기독교가 아니다. 공 예배 역시 단지 삶의 일부분이고, 예배당은 그저 돌조각일 뿐이다. 성도가 교회이고, 성도가 제사장이다. 그러므로 바른 삶이 없는 예배란 '제물이 없는 제사'와 같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매주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으셨다. 성도는 예배를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겐 삶이 예배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호 6:6, 새번역)

신성남 / 집사·<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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