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거차도에는 아빠가 있다. 세월호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서, 아빠들은 끊임없이 카메라를 응시한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뉴스앤조이-최유리 기자] 바람이 매섭다. 거센 바람에 파란 천막이 나부낀다. '리멤버 0416'이 적힌 노란 현수막도 펄럭댄다. 천막에서 나오면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멀리 배 몇 척과 바지선이 보인다. 세월호 인양 작업 중인 상하이샐비지 소속 선박이다. 배 안에 노란 크레인이 왔다갔다 한다. 세월호 가족들이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다.

안산과 광화문에 있던 세월호 가족들은 지난해 9월, 동거차도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겨울을 났다. 가족들은 정부에 세월호 인양 상황을 현장에서 직접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해수부는 여러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인양하는 사람들이 부담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대신 한 달에 한 번 2~3명이 볼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가족들은 그것만으로는 현장을 확인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때문에 세월호 현장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베이스캠프는 동거차도 중심에 있는 동두산 중턱에 자리 잡았다. 진도 팽목항에서 동거차도까지 배로 두 시간 거리다. 배가 들어오는 곳에서 20분을 더 걸어 올라야 캠프에 다다른다. 세월호 사건이 아니었으면 어느 누구도 올라가지 않았을 법한 숲을 지난다. 곳곳에 노란 리본이 묶여 있다. 이정표를 대신한다.

아빠들은 반별로 돌아가면서 동거차도에 들어온다. 한 번 오면 일주일 정도 머문다. 베이스캠프에는 하루씩 돌아가며 상주한다. 베이스캠프 안에는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온다. 전기장판을 깔았다. 라면을 끓여 먹을 수도 있다. 초기에는 야외에 간이 화장실도 만들었다.

밖에서 보면 넓직해 보이지만 짐이 많아 사람 몇 명 누워도 자리가 꽉 찬다. 바닷바람 때문인지 천막 보수도 여러 차례 했다. 천막과 비닐로 쌓고 끈으로 동여맸다. 큰 돌을 밑에 깔아 바람을 막았다. 실내 공기는 싸늘하다. 세월호 아빠들은 이곳에서 6개월을 버텼다.

▲ 동두산을 올라가려면 숲을 지나야 한다. 세월호가 아니었다면 길이 났을지 의문이 드는 곳이다. '노란 리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새 보금자리 위해 동거차도에 모이다

3월 11일 새벽 3시와 4시, 서울에서 7명, 부산에서 6명이 진도 팽목항으로 향했다. 천막을 튼튼한 돔으로 바꾸기 위해서다. 아침 9시 30분 팽목항에서 생선잡이 배를 타고 동거차도로 들어갔다.

프로젝트를 제안한 정진훈 목사(에덴정원교회)와 돔 짓기를 돕는 서울하우징 김영만 대표, 서울 성미산학교 선생님과 학생들, 봉사자들의 요리를 해 주기 위해 온 50대 여성, 선교 극단 디아코노스 배우들이 함께했다. 세월호에 관심 있던 사람들이었다.

정진훈 목사는 "아는 목사님 이야기를 듣고, 천막 사진을 보니 더 튼튼한 베이스캠프를 만들어 드리고 싶었다. 3년 전 교회당을 돔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그때 도움 받았던 김 대표님에게 같이 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해서 함께 오게 됐다"고 말했다. 김 대표 역시 흔쾌히 받아들였다.

봉사자들은 김 대표 지시하에 1박 2일간 돔 텐트 2개를 만들었다. 산 중턱까지 차가 올라갈 수 없어 자재를 직접 들어서 운반했다. 도안을 보며 조립도 했다. 직접 못을 박고 삐져나온 나무를 잘랐다. 다들 서툴어서 조립했다 풀었다 반복했지만 쇠막대기를 올리고 천막을 덮어 새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세월호 아빠들도 동참했다. 이곳에서는 다들 누구 아빠로 불린다. 성함을 물어도 누구 아빠라고 답한다. 영석 아빠, 호성 아빠, 애진 아빠, 민성 아빠, 준영 아빠, 건우 아빠, 민정 아빠. 영석 아빠는 음식 봉사를 자원한 50대 여성에게 "우리 아이들 고기 먹었어요?"라며 성미산 아이들을 챙겼다. 애진 아빠는 한 청년에게 돔을 지탱하는 기둥에 머리를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이들은 봉사자들과 돔을 만들다가도 틈틈이 천막 텐트 앞쪽에 모였다. 세월호 인양 현장을 망원경으로 관찰하고 카메라로 촬영했다. 기록 일지도 남겼다. 정부 관청에서 구체적인 인양 상황을 말할 때,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적는 것이다. 연거푸 담배를 피우며 기자에게 여러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 동거차도에 모인 자원봉사자들이 바닥 데크를 깔고, 못을 박고 돔을 씌우기 위해 작업한다. 아빠들도 작업에 뛰어들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배에서 나오기만 했어도…"

"저기가 사고 지역인데, 동거차도와 멀지 않다. 아이들에게 배에서 나오라고 이야기만 했어도, 바로 코앞인 동거차도에 올 수 있었을 거다. 구명조끼를 입지 않았어도 바닷물에 어느 정도 뜰 수는 있었다. 어민 배가 많이 왔으니 구조될 수 있었을거다. 이렇게 바로 앞인데, 나오기만 했어도…"

애진, 건우 아빠와 이야기를 나눴다. 세월호 가족들은 특별조사위원회 활동 기간 연장을 주장하고 있다. 이전 특별법에는 특조위 활동 기간을 '구성을 완료한 시점'부터 1년으로 잡고 있고 6개월을 연장할 수 있다. 총 1년 6개월이다.

작년 1월 특별법이 제정됐고, 임명장은 3월에 받았다. 예산 지급은 8월에 됐다. 가족들은 실질적 활동은 예산 지급을 한 8월부터 시작됐다고 본다. 정부는 특별법이 시행된 1월부터로 본다. 시작점에 대한 온도차로 정부는 올해 6월 특조위 활동을 마감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가족들은 특별법 개정안에 힘을 보태기 위해 국민 서명도 받았다. 특별법 재정 때는 600만 명이 서명했다. 개정안 때는 3~4일 기간 내에 4·16의 의미를 담아 4만 1,600명의 서명을 받으려고 했다. 당시 날씨도 좋지 않았는데 5만 7,000명이 동참했다. 전주에서만 2시간 30분 만에 4,700명이 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단원고 교실 존폐 문제로 이어졌다. 애진 아빠는 "재학생 학부모들의 의견에 공감한다. 우리가 교실을 안 치우겠다는 게 아니다. 아이들이 생활하던 이 학교만큼은 세월호 이후 어떻게 교육할 것인지 방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방향을 잡지 못하면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안전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세월호 가족들은 내 자식은 죽었지만 이 아이들만큼은 정말 올바르게 교육받았으면 좋겠다고 바란다"고 했다.

건우 아빠도 마찬가지다. 그는 단원고 교실을 대한민국이 안전 사회가 되는 단초 역할을 하는 곳이라 생각한다. 일반 시민과 학생들이 교실을 보면서 경각심을 일으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교육청이나 일부 재학생 부모들이 생각하는 추모 공간이 아니다.

"교실 가면 누구든지 운다. 심각성을 깨닫는다. 더 이상 애들이 이렇게 죽으면 안 되겠구나 생각한다. 수학여행 출발하기 전까지 아이들이 앉아 있던 자리, 수업 마치고 간 모습 그대로 남겨져 있다. 그걸 추모의 공간으로만 생각하니까 안타깝다. 누가 고집을 부리고 누가 이기심을 부리는지 판단이 잘 안 선다."

▲ 돔은 태풍이 와도 문제없도록 설계됐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살아남았지만, 어디론가 숨게 된다

세월호 가족들은 국민들이 잊지 않고 함께하는 것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간담회에 가면 '우리가 뭘 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은데, 항상 '동참'해 달라고 답한다는 것이다. 1차 청문회 때 공간이 좁아서 방청객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당시 밖에서 피켓 시위를 해 준 시민들이 가족들에게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했다.

건우 아빠는 말을 이었다.

"우리 가족들만 뭉쳐서 싸우는 건 사람들이 신경을 안 쓴다. 그 부분만 가리면 되니까. 그런데 대한민국 국민이 움직이면 대통령도 어쩌지 못할 거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공감하고 동참하면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이 일어서면 될 거다.

아들이 둘이다. 큰 녀석이 사고를 당했고, 남은 작은 녀석에게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 아빠 세대가 못 하면 너희들 세대에서 해야지 않겠느냐. 우리가 감히 밑거름이 돼 줄 테니, 여러분이 좋은 나라를 만들라는 소망이 있다. 좋은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봉사자들은 첫날 저녁, 세월호 가족 이야기를 들었다. 동거차도 주민 집에 자리를 잡았다. 이 주민은 지성 아버지와 의형제다. 앞 바다에 일하러 갔다가 지성의 시신을 발견했다. 참사 15일 만이었다. 충격으로 3개월간 술을 달고 살았다. 지금은 세월호 가족이 오거나 방문자가 있으면 집을 내준다.

생존 학생 아버지가 들려 주는 딸의 이야기다. 아이가 세월호 밖으로 나올 때는 물이 어느 정도 차 있는 상태였다. 이미 익사한 아이들이 가슴팍에 부딪혔다. 아이들 머리카락이 지퍼에 껴있었다. 살아 남은 아이는 자기 잘못도 아닌데 어디론가 숨게만 된다고 했다.

자원봉사자 윤은대 씨는 동거차도를 떠나며 말했다.

"그간 사실이 아니었으면 하는 이야기들, 일부 매체에서만 듣고 볼 수 있는 내용을 가족들에게 직접 들었다. 생존 친구들 사후 조치만 봐도 미흡한 부분이 많다. 부당하고 억울한 싸움을 2년간 하고 있다. 직접 가족들을 뵈니 훨씬 더 답답하고 무력감을 느낀다. 그래도 잊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봉사자 떠난 자리 남은 돔 텐트

10여 명 사람들이 1박 2일 동안 두 개의 돔 텐트를 지었다. 8.5평짜리 큰 돔 하나, 4평짜리 작은 돔 하나다. 나무 데크를 바닥에 쌓고 흰 쇠막대기를 올렸다. 수십 개의 쇠막대가 연결되어 둥근 형체가 되었다.

흰 천막을 덮기 전, 구조물에 올라가 튼튼하게 지어졌는지 확인했다. 김영만 대표는 돔이 풍압과 설압에 매우 강한 구조물이라고 설명했다. 태풍이 지나가도 문제가 없다고 했다.

바닥 부분을 보강하기 위해 부자재를 동거차도로 다시 보내기로 결정했다. 2개의 돔 텐트가 지어져 파손 걱정을 덜었다. 세월호 엄마들이 방문했을 때 좁은 공간에 함께 있어야 하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됐다.

현장에 있던 애진 아빠는 완성된 돔 텐트를 보고 "이제는 비바람에도 끄떡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입가에는 옅은 웃음이 배어 나왔다. 비바람 겨우 가릴 텐트 하나에 활짝 핀 유가족 얼굴을 뒤로 하고 육지로 가는 배를 탔다.

▲ 비바람에 끄떡없는 두 개의 돔이 완성됐다. (사진 제공 김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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