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종교> / 강남순 지음 / 새물결플러스 펴냄 / 304쪽 / 1만 3,000원

매서운 추위를 뚫고 새벽 기도를 인도하고 돌아오니, 침대 위에서 아기가 엉덩이를 내밀며 뱃속에 있었던 모습처럼 아주 편안하게 천사처럼 잠자고 있었다. 그 따뜻한 모습을 보면서, 이런 추위 속에서 제대로 된 이불 하나 덮지 못하고 추위에 떨면서 잠자고 있는 아기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얼마 전 보트를 타고 그리스로 건너가다 파도에 휩쓸려 시체로 떠 내려와 세계를 안타깝게 했던 3살짜리 시리아 난민 쿠르디가 떠올랐다.

모든 인간은 똑같이 존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 땅의 아기들은 모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런데 한 아기는 침대에서 추위를 모르고 꿈속을 노닐고, 한 아기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전쟁을 경험하고 음악 대신 총소리를 듣고 자란다. 자의식도 약한 나이에 목숨을 걸고 대양을 건너야 한다. 생의 고문을 견뎌야 한다.

코즈모폴리터니즘 사상은 인간이라는 조건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권리가 주어져야 하고, 무조건 환대를 베풀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 세계에는 이런 평등과 환대가 이미 오래전부터 파괴되고 부셔져 있다.

저자는 21세기가 당면한 이슈인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코즈모폴리터니즘에서 찾는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주제에 가까워 보이는데, 저자는 이를 철학적이고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진지하게 성찰하며 대안을 제시한다.

한 인간은 지역성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지만, 동시에 우주에 속해 있기도 하다. 이런 소속성을 강조하는 개념이 코즈모폴리터니즘이다. 그래서 국적, 신분, 나이, 문화에 상관없이 이 땅에 태어난 인간은 동등하고 평등한 존재로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사상이 세계의 영구적 평화를 위한 길이라고 설득한다.

무엇을 믿는가 < 무엇을 행하는가

저자는 이 평화를 위한 길을 종교의 영역으로 넓힌다. 종교에서 '무엇을 믿는가'보다 '어떻게 행하는가'가 더 본질적인 것이라 설명한다. 제도화된 종교로 교회를 절대선으로 간주하여 신의 이름으로 신의 뜻을 져버리는 기독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삶이 가르치고 지시하는 정신인 '타자를 향한 사랑과 환대'를 추구하고 '공동체가 없는 자들까지 책임지고 연대하는 삶'을 사는 게 참된 것이라 한다.

어떤 교회에 등록하거나 주님을 자신의 주인이라 맹목적으로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실제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기에 부족해 보인다. 교리에 정통하고 교회 성장을 위해 헌신하는 삶으로도 충분하지는 않다. 그래서 저자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했던 길을 따라가는 일이라고 한다.

그 길은 무조건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환대하고, 용서하는 길이다. 그 불가능성에 열정적이고 철저하게 자신을 투신하는 것이다. 자기 삶에 안주하지 않고, 인종적·국가적·문화적 한계를 넘어 연민의 시선을 끝없이 확장하는 것이다.

저자는 '내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 말을 인용하며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하는가"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성찰해야 된다고 한다. 저자는 우리 신앙의 진실성과 기독교 가치가 구체적인 일상에서 타자와 맺는 관계로 증명된다고 한다. 타자를 향한 환대와 보살핌, 타자와의 연대, 이웃을 향한 섬김이 참종교라는 말이다.

저자가 말하는 21세기가 요구하는 종교의 의미와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정의와 사랑, 책임과 연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가 되었다. 기독교가 사람이 만든 법과 질서로 제도화되어서 폭력적으로 차별과 정죄를 하거나 권력으로 살인을 하는 근본주의를 탈피해야 된다는 것도 수긍되었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말이 기독교에서는 무서운 선언 같아 보였다. 왜냐하면 저자가 말하는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배고프고 헐벗고 병든 사람을 돌봐야 한다는 것은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선한 사업이 기독교의 특징이 될 수 없다고 보였다.

또한 인간은 공평하지 않고 하나님만이 공평하시다.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 구제해야 하고, 어디까지를 이웃의 경계에 포함시켜야 하는지 상대적이고 흐릿하다. 이런 상대적인 가치로 참종교를 구분한다면, 기독교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수준으로 전락할 것으로 보였다. 도대체 어디까지 실천해야 하고, 무엇까지 주어야 하는 것인가.

예수를 따르는 길, '무조건적인 환대'

저자는 마태복음 25장에 최후 심판 이야기를 예로 들며, 차별 없고 조건 없는 무제한적 환대가 심판의 기준이라고 말한다. 성만찬 사건을 설명하면서, 예수님이 자신의 몸과 피를 제자에게 제공하신 행위가 예수를 따르는 길이 '무조건적인 환대'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 준 것이라 해석한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도 영생과 구원은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고 환대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선 필자는 저자가 코즈모폴리터니즘과 환대의 관점에서 이 본문을 해석한 것이 새로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과연 최후 심판이 소자에게 냉수를 주었나, 안 주었나로 정해지는 것이라면 기독교가 너무 도덕적이고 감정적인 게 아닌가 생각됐다. 저자의 윤리적인 해석이 신학을 무너뜨리는 것 같다는 우려에서였다.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성령의 역사로 중생되어 보증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 마지막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나면 확신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저자의 논리가 신학을 흔드는 것처럼 위태하게 느껴졌다.

필자는 코즈모폴리터니즘이 21세기의 꼭 필요한 사상이고, 이 사상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와 하나 되는 연대 의식을 가지고 연민으로 인류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고 길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코즈모폴리터니즘이 인류가 원하는 사상이 될 수 있겠으나, 인류를 구원하는 사상이 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세계를 구호하는 운동은 되겠으나, 세계를 구조하는 유일한 진리가 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우리는 세계화 시대에 다양한 문제들을 접하면서 살아간다. 그 문제들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문제이고, 모두가 가족이라는 의식으로 처리하고 해결해 가야 한다. 굳이 통계자료를 활용하지 않더라도 너무나 많은 사람이 굶어 죽고, 나라가 전쟁으로 총체적인 병이 들어가고, 기후는 점점 이상해져 간다. 지구는 점점 거주하기 힘든 땅으로 변하고 있다. 점점 황폐해져만 가는 시대 속에 '함께 잘 살기'는 더 요원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필자는 저자의 주장이 신선했다. 단순히 우리의 경계를 넘어 이웃을 사랑하자는 가벼운 말이 아니라, 고대·근대·현대 여러 사상가들 주장을 예로 들며 코즈모폴리터니즘을 설명하는 저자의 학문성과 깊이에 감탄하였다. '호모 사케르'(목숨만 유지한 생명-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아무런 정치적 법적 보호가 없는 인간) 같이, 처음 접해서 어려울 수 있는 단어들, 새로운 개념들을 쉽게 배울 수 있어서 지적 영역이 넓어지는 기쁨도 있었다.

그중 저자는 인류 문제 해결, 코즈모폴리터니즘을 위해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절멸성(mortality)과 탄생성(natality) 개념을 설명하면서 네이털리티에 인식론적 변화가 있어야 이 모든 일이 가능해진다고 주장하는 데 필자는 동의가 되었다. 네이털리티는 사실적 네이털리티, 정치적 네이털리티, 이론적 네이털리티로 구분할 수 있다. 사실적 네이털리티는 인간의 육체적 탄생을 의미하고, 정치적 네이털리티는 행동적 공간으로서의 정신적 탄생을 의미하고, 이론적 네이털리티는 인간의 내면세계가 지니고 있는 희망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 세 가지가 세계를 사랑하고, 인류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소개한다. 나와 타자가 언제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희망적인 존재'라는 인식의 전환이 인류를 희망적이게 만든다. 어떤 고난 속에 있더라도, 그렇게 당연히 죽어 가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언제든지 변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가능성과 기대가 있다는 사실이 인간사에 소망을 불어넣는다. 세계가 아무리 타락했어도, 그 속에 존재하는 인간에게 기적이 일어나면 인간은 새로운 존재가 되고, 새로운 존재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다.

이 부분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저자가 주장하는 게 단순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주장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세계가 파괴되고 심각하게 훼손되었어도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가능성인 네이털리티, 즉 인간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하는가?"

조직이 변한다고 해도, 구조가 건강해도 구성원을 모털리티로만 인식하는 사회에서는 변화가 없다. 서서히 변질되고 왜곡될 뿐이다. 그러나 공동체 멤버가 새 존재가 되고, 이웃이 새로운 존재로 인식이 되어 서로 연대한다면 사회가 변하고 세계가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인간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네이털리티는 중생이고 거듭남이다. 이것은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는 기적의 문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세계와 하나 되는 것은 도덕과 윤리도 아니고 구조의 변화도 아니고 네이털리티를 통해서다. 타인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존재로의 기대와 희망이 있어야 변화될 수 있다.

저자는 성경에서 예수님이 삭개오를 찾아가 "내가 너의 집에 유해야겠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을 예로 든다. 버림받고 소외된 삭개오지만 예수님은 그를 다르게 인식하고 네이털리티로 받아들이셨다. 바울도 이방인을 주님 안에서 새로운 존재이며, 모두가 하나이고 주님 안에서 성전을 짓고 완성해 갈 사람으로 인식한다.

우리는 현재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는 시대를 살아간다. 사람에게는 종교 선택의 자유가 있기에, 우리의 기준이 있더라도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폭력적으로 다가갈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종교의 이름으로 다양한 종류의 폭력을 휘두르고 전쟁을 해 왔다. 소수자를 혐오하고 배척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폭군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왜곡된 신관 때문에 네이털리티를 갖고 있는 존재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고, 기독교는 나쁜 종교로 인식이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폭력적인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예수님 지시를 따르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인데, 이제는 인식론적 변화가 필요하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불평등과 불균형 속에 살고 있는 자들의 삶 속에 들어가 인간들을 분리하는 다양한 경계를 넘어, 서로 연대하고 환대하며 책임지는 삶을 살도록 초대한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생명을 살리는 초청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현대 세계에서 기독교는 배제에 강하고 포용에 약하다. 그래서 사회에서 지탄 대상이 되고 있다. 필자는 이 책에서 십자군 정신을 극복하고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가 될 수 있는 전망을 보았다. 참된 종교가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고, 21세기에 어떻게 영구적인 평화를 이루어 갈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기 원하는 자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글로 서평을 마무리한다.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하는가?"

방영민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전주서문교회 목사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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