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출간된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의 신간 <알라>(IVP)가 뜨거운 감자다. 여러 신학자들이 양초에 불을 붙이고 있을 때, 볼프는 양초 대신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댕겼다는 한 리뷰가 눈에 띈다. 그 말처럼 볼프는 정말 다이너마이트를 점화한 것일까?

기독교 신학에서 핫이슈를 다루는 작품이 나올 때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전제가 있다. 신학은 하나의 건축과 같아서 신학자가 신학이라는 건축물을 올릴 때는 밑그림, 즉 조감도를 마련한다는 사실이다. 한 신학자의 주장을 이해하려면 그 설계도면을 먼저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중심보다는 외양을 보는 데 익숙하나, 하나님은 외양이 아닌 중심을 보신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지식인 '신학'의 주장을 접할 때는 외양이 아닌 중심을 보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신학적 성찰 태도일 것이다. 어떤 신학적 건물의 특정한 외적 디자인만 언뜻 보고 그 건물을 세운 목적, 구조, 토대까지 섣불리 예단하는 우를 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다", 복합적이고 심층적인 명제

▲ <알라(Allah) -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은가?> /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 백지윤 옮김 / IVP 펴냄 / 416쪽 / 2만 2,000원
▲ <알라(Allah) -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은가?> /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 백지윤 옮김 / IVP 펴냄 / 416쪽 / 2만 2,000원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다"는 볼프의 주장은 함축적인 맥락을 담은 명제다. 그것은 일면적인 주장이라기보다 다면적이고 복합적이며 심층적인 명제이다. 볼프가 사용하는 "공통의 하나님"이란 표현을 처음 들으면 종교다원주의 신학에 토대를 둔 말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그것이 오랜 기독교적 전통에 서서, 오늘날의 기독교와 이슬람의 관계를 다루는 복음주의 정치신학을 구성하는 원리임을 알게 된다.

볼프는 영원한 구원에 관한 특별계시 차원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창조 세계와 현세 생활과 시민사회에 관한 일반계시 차원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 이해가 동일한 대상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존재론적으로는 동일한 신을 예배한다는 의미다. 즉, 인식론적으로는 신 이해가 다르지만, 존재론적으로는 동일한 대상이라는 뜻이다.

볼프는 그런 공통의 토대에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어떻게 하면 하나의 정치적 지붕 아래서 더불어 사회적 공동선을 이룰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의 정치신학적 특징을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종교개혁 전통에서 본 기독교와 이슬람의 관계

볼프의 복음주의 정치신학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는 기독교 전통의 위대한 신학에 터 잡아 동일한 신학적 건축양식을 선보이고 있다. 먼저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를 살펴보자. 루터는 이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완전히 잘못 아는 것은 아니라고 인식했다. 도덕성에 있어서는 오히려 기독교인들보다 높다고 인정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독교가 아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비해, 이슬람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지적했다. 구원론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루터의 주된 관심은 영혼 구원에 있었다.

▲ 루터는 이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다만 구원론에서 결정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이슬람이 일반계시의 차원에서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기독교와 공유한다고 보았다. 이슬람이 누렸던 일반은총의 도덕적·학문적 성과를 높이 샀을 뿐이다. 그는 이슬람이 '이 세상의 삶'을 위해서는 높이 평가받을 수 있으나, '장차 올 세상의 삶'을 위해서는 그렇지 못하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장 칼뱅(Jean Calvin)의 입장을 살펴보자. 그는 <기독교강요>와 성서 주석을 통해 이슬람을 기독교와 한줄기에서 나온 분파로 보았다. 칼뱅은 아브라함이 이슬람교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는 이슬람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며 예배하지만, 그들은 약속의 자녀 이삭을 통해 이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언약에는 속하지 못하므로 하늘에 도달하지는 못한다고 보았다.

이에 더하여, 그는 기독교가 폭력이나 강제나 세속적인 방식이 아니라 상대를 깊이 배려하고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슬람과 소통해야 한다고 말했다. 역사적으로도 칼뱅은 가난한 프랑스 종교 난민들을 위해 조성한 "프랑스 기금"을 프로테스탄트 신자뿐 아니라, 제네바 토착민들, 유대인들, 그리고 이슬람을 믿는 터키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유연하게 사용했다. 상호 지원을 위한 공적 자선을 촉진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교회와 인류 공동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당시 만연했던 외국인 혐오와 난민 배척의 제노포비아 현상을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칼뱅의 태도는 그의 신학적 건축양식이 지닌 복합적 구조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의 신학은 세 부분으로 된 동심원(concentric circle) 구조로 되어 있다. 이 동심원은 세 개의 파장을 지닌다. 동일한 성령님은 독특하게 구별된 방식으로 서로 다른 파장에서 각각 역사하신다.

가장 바깥 자리에 있는 주변적인 원은 창조 세계에서 펼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포함한다. 중간의 원은 인간 사회를 위해 필요한 공간을 둘러싼다. 중심부 가까이 자리한 가장 안쪽의 원은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사역과 연관된다. 이처럼 칼뱅의 사상은 창조 세계와 인류 사회와 교회라는 다양한 층으로 구성된다. 간단한 단수적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라는 원 안에는 특별계시가 있고, 원 밖에는 일반계시가 있다. 그러나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는 동일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특별은총은 교회의 영적인 공동선을 위해서 베푸신 것이고, 일반은총은 인류의 사회적 공동선을 위해서 베푸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나 루터도 대체로 이와 동일한 신학적 조감도를 지닌다.

사회적 공동선 위한 공통의 하나님

볼프가 말하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사회적 공동선을 위한 공통의 토대인 "공통의 하나님" 이해는 두 번째 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즉 특별계시와 특별은총이 아니라 일반계시와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루터와 칼뱅은 동심원적 신학 구조의 두 번째 원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을 강조했다.

루터와 칼뱅은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인류의 공동선을 정치, 경제, 학문, 예술, 복지 등 다양한 차원에서 펼쳐 냈다. 이런 점에서 볼프의 <알라>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지향하는 구원신학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보편성을 지향하는 정치신학을 한데 묶어 낸다. 새로운 다이너마이트라기보다 오래된 양초의 현대적 재발견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볼프가 <알라>에서 보여 준 신학적 양식은 루터와 칼뱅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사상과도 상응한다. 카이퍼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공통적으로 믿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앙고백이 일종의 공통 기반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통된 신을 섬긴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볼프는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과 두 종교의 관계가 지금과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며, 공동선을 위해 협력할 수 있게 될 것이라 봤다.

양측은 인간의 본성과 상황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이해한다. 풀러신학교 총장 리차드 마우는 카이퍼가 이슬람에 대해 다소 양가적인 감정을 드러냈다고 평가한다. 이슬람에 관심이 깊었던 카이퍼는 구원신학의 관점에서는 엄격한 부정적 평가를 내린다.

하지만 그 유명한 <칼뱅주의 강연>에서 '이슬람교'(Islamism)를 다신론적·범신론적 '이교'(paganism)와는 구분했다. 이교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인하는데, 이슬람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엄청난 존재론적 간극에 정통한다. 이교와 이슬람, 양자를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입장에 있다고 보았다.

카이퍼는 이슬람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이교를 막는 역할을 해낸 점은 인정했다. 또한 이슬람이 유일한 창조주 신앙을 모든 피조물과 인간 생활 전체에 선포하고 침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에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카이퍼가 볼 때, 일반은총은 "시민의 덕목, 가정적인 느낌, 자연스러운 사랑, 인간적인 덕목의 실천, 공공 의식의 개선, 진실성, 사람들 사이의 상호 신뢰, 그리고 경건히 누룩으로서 사는 삶을 찾아 살피는 일"이다. 그의 일반은총 목록은 볼프가 <알라>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함께 추구하기를 바라는 사회적 공동선에 관한 내용과 상당 부분 중첩된다.

물론 카이퍼의 일반은총은 죄에 맞서는 장벽으로서는 지속 불가능하다. 그것만으론 인간의 죄 된 본성을 갱신하고 정복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여기에 기독교와 이슬람의 차이점이 있다. 일반은총은 단지 인간 본성의 파국적 결말을 피할 수 있도록, 그 본성을 강제적으로 억제하고 제지하는 정도의 역할은 감당한다. 이슬람은 여기에 속하는 그룹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카이퍼는 특별은총을 받은 기독교가 거룩해져야 할 만큼 거룩해지지 못하고 종종 세상에 실망을 끼치는 데 반해, 이슬람을 포함한 이 세상은 때때로 우리를 놀라게 할 정도의 선한 일을 일반은총으로 해낸다는 점에 주목했다.

톰 라이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서로 연결돼 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 진영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스스로 겸손히 여기며 이슬람을 존중하는 태도를 갖는 것은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독교가 이슬람을 포함한 이 세상을 바르게 대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 "왜곡된 선이지만 악은 아니다. 그것은 왜곡이라는 의미에서는 악이지만, 존재 자체로 악은 아니다"라고 했던 리처드 니버의 말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이슬람이 하나님에 대해 왜곡된 신앙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마귀를 예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 것은 이슬람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서로의 신앙을 그 자체로 악으로 간주하는 극단적 시각은 분명 지양되어야 한다.

카이퍼는 로마 가톨릭이 이스라엘의 제사장직과 갈보리의 십자가와 로마제국의 세계 조직이라는 세 가지 잠재력이 연합하여 만든 산물이라면, 이슬람교는 이스라엘의 단신론과 나사렛의 선지자와 코란주의자의 전통이 결합된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는 이슬람 문명이 일반은총에 의해 인류 발전의 넓은 흐름에서 로마 가톨릭 문명과 함께 세계사에 공헌했고, 그 이후 칼뱅주의 문명이 등장했다고 평가했다. 카이퍼가 보기에 기독교와 이슬람은 대화를 통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의를 위해 봉사하는 사명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고 이해하도록 서로에게 알려 줄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동일한 신을 예배하며 신을 비슷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양쪽이 공동으로 공공선을 추구할 수 있는 도덕적 틀은 충분히 견고하다. 나는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이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에 반대한다"는 볼프의 주장은 카이퍼의 사상과 충분히 상응하는 대목으로 보인다.

현대 복음주의자로 넘어와 21세기의 C.S. 루이스로 불리는 영국 신학자 톰 라이트(Tom Wright)를 살펴보자. 그는 이 세상을 만드신 누군가가 존재하고, 세상을 바로잡는 일을 하신다는 점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일종의 사촌 지간이라 여기는 것이다.

물론 이 세 전통은 차이점도 많지만, 세속의 다른 철학과 종교들과 비교해 볼 때 '정의에 대한 열정'에서 큰 공통점을 갖는다.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은 악의 피해를 심각하게 입은 인간에 대해 공통된 이해를 지닌다. 사회적 공동선 회복을 위해서는 인간이 더 나은 지식이나 사회적 조건을 갖추는 것보다 외부의 도움, 즉 신적 구조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가 있다.

이처럼 톰 라이트는 하늘과 땅이 겹치고 맞물리는 유일신론 세계관이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정도에 있어서는 그보다 덜하지만" 이슬람교의 토대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세 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

복음 전도 위해서도 이슬람 존중해야

마지막으로 총체적, 전 세계적, 전 교회적 복음주의 신앙고백서로 알려진 1974년 1차 로잔 대회의 로잔 언약과 1989년 2차 마닐라 선언, 그리고 2010년 3차 케이프타운 서약을 살펴보고자 한다.

로잔 언약은 우리의 구세주가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한분이시며 복음도 오직 하나임을 확신하면서도, 복음 전도 '방법'에는 다양성이 있다고 인정했다. 즉 "상대방을 이해하려면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대화도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것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치러야 할 "제자도의 대가" 중 하나이다.

물론 "사람과의 화해가 곧 하나님과의 화해는 아니다"는 제한은 두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의 울타리를 헐고 비그리스도인 사회에 스며들어 가야 한다"고 선언한다. 마닐라 선언에서는 복음주의가 종교다원주의, 상대주의, 혼합주의와는 거리를 두었음을 밝히면서도, "과거 우리가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무지, 거만, 무례 혹은 대적의 태도를 취하는 잘못을 범해 왔다. 우리는 이에 회개한다"라며 잘못을 시인하는 태도를 취한다.

여기서는 "힘으로 전도하려던 기독교의 태도가 성령을 근심하게 했다"고 솔직히 인정했다. 반면에 "이슬람 국가들이 복음에 대해 좀 더 개방적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또한 복음을 공개적으로 정직하게 전하겠다고 하면서 "그것을 듣는 이가 전적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에 따라 결단하게 하겠다"고 서약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마닐라 선언은 "우리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민감하고자 하며, 그들의 회심을 강요하는 어떤 방법도 거부한다"고 했다. 복음 전도의 획기적이고 인격적인 전환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 선언은 기독교에 대한 자유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를 갖기를 간절히 바라는" 열망을 담고 있다.

2차 로잔 대회의 마닐라 선언과 3차 로잔 대회의 케이프타운 서약은 모두 세계인권선언에 기초해 있다. 그리고 기독교와 이슬람이 서로 신앙의 고백과 실천과 전도의 자유를 "상호 인정할 수 있는 권리"로 만들어 갈 것을 지향하고 있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슬림과 친구가 되지 못한 것을 회개"하며, "우리는 진리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타 종교에 관한 거짓과 왜곡을 조장하는 행위를 거부하고 대중매체와 정치적 수사를 통해 인종차별적 편견과 증오와 공포를 일으키는 것을 고발하고 이에 저항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타 종교인들과의 대화가 의미 있는 활동임을 확언"하고, "이러한 대화는 기독교 선교의 일부로서 타당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타인에 대한 경청의 태도와 결합된 모습이다"라고 표명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복음주의 헌장인 로잔 언약, 마닐라 선언, 케이프타운 서약은 근본주의 혹은 자유주의로 치우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존 스토트가 적절히 평가한 것처럼, 개인 복음과 사회참여를 "가위의 양날, 새의 양 날개"로 삼아 지난 40년을 달려왔다.

볼프는 <알라>에서 사회적 공공선을 위해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학적 대화와 공적 현안을 담아내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는 반세기에 걸친 복음주의 로잔 운동의 거대한 물결 위에서 항해하는 건강한 복음주의 정치신학의 최선봉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 볼프의 <알라>는 '무슬림들에게 건네는 악수'라고 할 수 있다. 볼프는 자신의 저서 <알라>를 '무슬림에게 보내는 공개 초대장'이라고 지칭하며, 무슬림들이 자신의 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입장을 재고하길 바란다고 했다.

두 종교가 협력할 수 있는 '공통 공간' 마련하자

살펴본 것처럼, 볼프는 루터, 칼뱅, 카이퍼, 라이트와 같은 기독교의 위대한 프로테스탄트 전통과 전 세계 복음주의 운동인 로잔 대회의 도도한 흐름과 공감하는 신학 양식을 갖고 있다. 그는 이 바탕 위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통의 하나님"에 근거한 사회적 공동선을 추구하는 복음주의 정치신학을 세워 간다.

조직신학자 벌코프는 일반은총 교리가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볼프의 <알라>는 일반계시와 일반은총 차원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인류의 사회적 공동선을 위해 협력할 수 있는 공통 공간을 마련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일반계시 차원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존재론적으로 공유하는 공통의 유일신 이해를 이야기한다. 더불어,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인식론적으로 공유하는 신에 대한 경외와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볼프는 기독교인과 무슬림의 신이 존재론적으로는 동일하며, "그 동일한 신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그것이 함께 살아가는 시민사회의 공공선을 추구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해 보자는 입장에 서 있다. 볼프는 종교적인 다원주의가 아닌 정치적인 다원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볼프는 "이 책을 기독교인을 위해 쓰고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 책은 무슬림들에게 보내는 공개 초대장이기도 하다. 이 초대장에서 나는 그들에게 나와 함께 생각해 보기를 그리고 만약 이 책을 읽고 그들의 마음이 움직인다면, 이 글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재고해 보기를 바란다"고 촉구한다.

볼프의 숨은 의도가 무엇인가 말들이 많은데, 나는 이것이 볼프의 본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볼프는 정치신학자이면서도 기독교를 변증하는 조직신학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다만 그는 "진실하고도 관용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싶어 한다.

<알라>가 다루는 것은 종교다원주의 아닌 정치다원주의

'진실'과 '관용'은 볼프의 <알라>를 관통하는 결정적인 키워드다. 그는 특별계시와 일반계시 모두에서 진실을 말하고자 하고, 특별은총과 일반은총 모두에서 관용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이 세계화된 하나의 세상에서 공존하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서로 관계 맺는 방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볼프는 이 책에서 자신이 "신과 장차 올 세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신과 지금 세상에 관한 것"을 다루려 했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의미가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루고 있지, 구원과 관련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루지는 않았다"고 명시했다. <알라>의 신학적 설계도는 이처럼 명쾌하다. 숨은 의도란 없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종교다원주의라는 다이너마이트가 아니라, 정치다원주의라는 오래된 양초다.

볼프는 <알라>에서 구원신학의 안방을 내주지 않는다. 다만 정치신학의 사랑방을 짓는 일에서 전통적 양식을 새롭게 다듬고 있다. 그는 영원한 하늘의 공간이 아니라, 잠시 공유하는 이 세상의 공간에서 어떻게 더불어 지내야 하는지 서술한다. 그러면서 기독교의 집과 이슬람의 집을 비교하며, 그들이 공존해야 하는 한 마을에서 필요한 긴급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간다.

▲ 그렇다고 볼프가 기독교 하나님의 유일성,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과 같은 복음주의 입장에서의 구원신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다원주의가 아닌 정치다원주의에 주목하고 있다.

"수백만의 극빈층, 물 부족,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되고 있는 환경, 전염병"도 심각하지만, 더 시급한 근본적인 문제는 "사랑을 즐거워하지 않고 즐거움을 사랑하는" 세속적 쾌락주의에 물든 "문화적 질병"이다. 그러한 일들을 서로 논의하고 대처 방안을 마련하려면 마을회관과 같은 공동 공간이 필요하며 그래야 각자의 집들도 온전히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볼프의 <알라>에 대한 논쟁을 보며 필자가 느끼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어떤 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평가하려면 그 책을 최소한 두 번 정도는 꼼꼼히 객관적으로 읽어 보고 하면 좋겠다는 것이다. 저자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하면 곤란하다. 또 저자가 이미 충분히 설명한 내용(예를 들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마치 처음 내놓듯 꺼내면서 저자의 논지를 오도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다음으로 저자의 말을 비판하고 평가할 때는 자신과 상대의 신학적 토대, 설계와 양식을 차분하게 심층적으로 비교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그러면 일면적이고 표층적인 읽기에 빠지지 않고 깊이 있는 생산적 담론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볼프는 구원신학으로는 따듯하게 보수적이고 정치신학으로는 부드럽게 포용적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 종교가 절대 진리와 구원에 이르는 동등한 길이라는 존 힉과 같은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 복음주의자다. 볼프 신학의 건축양식과 이슬람을 향한 정치신학은 기독교의 위대한 신학 전통, 특히 종교개혁 전통의 세 기둥인 루터, 칼뱅, 카이퍼 신학의 건축양식과 이슬람을 향한 입장과 교감하는 부분이 크다. 카이퍼는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인내하시는 시간'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얻을 수는 없다.

리차드 마우의 말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시급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더불어 안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기독교인들이 공적 소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슬림과 대화하는 것이 더 이상 흥미로운 선택이 아니라 긴급하고 필수적인 사안이다. 그런 점에서 분명히 볼프는 더 늦기 전에 꼭 켜야 했던 오래된 양초 하나에 불을 붙였다.

*이 글은 <기독교사상> 3월 호에 일부 게재되었습니다. <기독교사상>의 허락을 받아 싣습니다.

송용원 /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BA),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미국 예일대학교(STM), 영국 에든버러대학교(PhD)에서 조직신학과 칼뱅을 공부했다. 온누리교회, 뉴저지초대교회, 새문안교회에서 부목사로 대학·청년 사역을 했으며, 미국 유학 시절에는 보스턴 온누리교회와 뉴욕 맨하튼 뉴프론티어교회를 개척했다. 현재는 서울에서 은혜와선물교회를 개척하여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초빙교수로 있으면서 기독경영연구원 연구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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