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영화 '귀향' 첫 대사다. 숨박꼭질…. 술래에게 들킬까 조마조마한, 그 안타까운 감정은 러닝타임 내내 관객을 지배한다. 물론 그 안타까움은 일상에서 느끼는 가벼운 감정이 아니다. 두려움, 분노, 역겨움, 소외에 노출되어 짓밟히는 조선 소녀들 존재 그 자체에서 느끼는 무거운 안타까움이다.

'귀향'의 차별성

'귀향' 개봉 소식을 들었을 때, 1930년 이탈리아에서 행해진 유대인 학살을 배경으로 한 1999년 개봉한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떠올렸다. 이 영화는 유대인 학살을 배경으로 부성애를 다루어, 기존 유대인 학살 장르와 구별되는 가치를 확보했다.

보편적으로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들은 서구적인 엄격함과 사실성을 특징으로 한다. 영화에 나타나는 학살과 억압에 대한 분노가 남성적이다. 사실에 바탕한 엄격한 남성적 분노는 복수와 심판을 자연스럽게 수반한다. 관객은 강한 충격과 함께 그것을 내면화한다.

전쟁 학살 장르가 갖는 남성성 때문에 전쟁에 대한 아픔과 문제의식이 가부장적인 기류에서만 논의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인물과 부자 관계를 통해 전쟁과 학살이 주는 아픔을 좀 더 가깝게 전달하려 했다. 그 시도가 매우 훌륭했지만, 남성성에서 드러나는 특징과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전시 상황에서 벌어진 일본의 악행을 고발한 다른 영화들은 어떨까. 그 역시 서구에 의해, 서구적으로 다루어진 영화들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오리엔탈리즘 표출이 농후할 수밖에 없다. 실질적인 피해를 입은 동양권 관객들이 공감하기에 한계가 있다. 

존 라베의 '난징 대학살'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중국 내에서 상영이 금지됐던 영화다. 공산당 차원에서 영화를 통해 반사적으로 드러나는 전쟁 당시 중공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고, 일본과의 외교적 입장을 우선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어찌 되었건 기본적으로 서구인이 만들었기 때문에, 정서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중국에서 공감대를 이루기 어려운 작품일 수밖에 없었다. 

근간에 중국에서 루추안의 '난징! 난징!'과 장이머우의 '진링의 13소녀'는 청일전쟁 당시 일본의 난징 학살을 고발하는 영화다. 이 작품들은 여전히 서구적이고 가부장적 관점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진링의 13소녀'에서 장이머우가 그리는 중국 여성 이미지는 서구를 따라가 영화 주제와 상충된다. 이 때문에 분열되어 혼돈스럽기까지한 부분이 있었다.

'귀향'을 일반적인 학살 장르와 비교해 지나치게 소녀 감성적이고, 유약하다고 평하는 관객들이 있다. 서구적 가부장적인 표현에 길들여져 좀 더 강하고, 사실적인 폭력에 대한 고발을 기대했기 때문에 약간의 실망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적 표현에서 강도가 떨어진다고 반드시 고발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짓밟힌 소녀는 무엇을 느낄까

'귀향'이 다루고자 한 것은 분노와 그에 상응하는 복수, 심판이 아니다. 그 자체로서의 '슬픔'(sorrow)이다. 이는 지금까지 전쟁 학살 장르에서 접하지 못한 매우 독특한 것이다. 실상 영화 어디에도 복수를 충동하는 직접적 장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수와 심판을, '슬픔의 공감대' 안에서 관객의 자발적 선택에 맡긴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관객에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윤리 의식을 고취한다. 이런 현상을 영화 그 자체만으로 끄집어내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도 일본군 '위안부' 사안을 둘러싼 현 한국과 일본 사회 그리고 전 세계적인 관심에서 오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현시대적 사안과 감성을 놓고 본 '귀향'의 독특성은 시의적절하다.

'귀향'은 철저하게 소녀들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민(강하나)의 엄마(오지혜)가 손수 만들어 건넨 노리개는 안전을 지켜 주는 부적의 역할을 하는데, 그 노리개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과 여성 심리가 강하게 나타난다.

▲ '귀향' 스틸컷. 영화에서 중심 소재로 등장하는 괴불 노리개.

이제 할머니가 되고, 한복 제작자가 된 주인공 영옥(손숙)은 손수 노리개를 만들어 그때의 불안과 슬픔을 지속적으로 기억해 내면서도, 내면적 상처를 외롭게 자가 치유한다. 그뿐 아니라, 그 노리개는 성폭행을 당하고 신내림을 받은 은경(최리)에게 과거 영옥(어린 시절에는 영희)의 친구인 정민의 영혼이 빙의하는 매개가 된다.

조정래 감독은 인터뷰에서 소녀 배우들의 심리 상태에 관심을 두고 촬영을 진행했고, 이후에는 심리 치료까지 받게 했다고 말했다. 여성 입장을 존중하는 남성 감독의 진정성이 화면에서 진하게 묻어난다.

영화에서, 어떨 것 같다고 추측되는 정민 아버지의 감정이 잠시 비추어진다. 하지만 영화는 이보다 딸을 잃은 어머니의 감정에 중심을 두고 있다. 그런 의도가 더 강하다. '귀향'은 철저히 여성의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필자 역시 남성 관객으로서 이 영화를 보는 여성 관객들은 무엇을 느낄까, 내가 느끼는 것과 차원이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영화 속 인물과 공감을 형성하는 데서 남성으로서 어느 정도 소외감을 느끼게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그 소외감으로 '귀향'을 보아야 한다. '소녀는 무엇을 느낄까', '같은 소녀로서 무엇이 느껴지는가?' 소녀로 살아 보지 못한 남성, 또는 남녀 불문, 그 일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온전히 공감할 수 없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영화 속에서 정민의 영혼에게 빙의된 은경이 '성폭행 피해자'라는 사실 때문에 조금은 그 고통에 시대적·문화적으로 근접하게 된다. '귀향'에는 지금까지 전쟁과 학살 장르 영화들이 표출한 복수심을 수반하는 남성적 분노가 담겨 있지 않다. 철저히 여성적 슬픔을 표현하는데, 여기에는 충분한 당위성이 있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슬픔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의 '한'을 보여 주고 있다.

'귀향'은 한국적 정서를 반영하여 서구 남성적 특성을 가진 대학살과, 전쟁을 주제로 한 유대인 학살 영화와 차별성을 두어 작품으로서 독창성을 뿜어내고 있다. 소녀로서 마땅히 품어야 할 소망을 잃어버린 소녀의 한을 불러온다.

▲ '귀향' 스틸컷.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는 정민(위), 통곡하는 정민 어머니와 아버지(아래).

'배제된 성적 대상'으로서 여성 이미지

영화상에서도 영옥(손숙)은 '정신대 피해 신고'를 하려고 주민 센터에 간다. 그러나 여러 복잡한 심정(여성으로서 성적 수치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이 문제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 이러한 신고가 개인사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갈등에서 오는 감정)이 연출된다. 그녀는 결국 신고를 포기하고 뒤돌아선다.

그때 남성 직원은 냉소적으로 말한다. "누가 신고하겠어. 좀 그렇잖아." 이 사안을 품행이 바르지 못한 여성이 마땅히 가져야 할 성적 수치로 한정해 바라보고 있음이 나타난다. 이에 할머니 영옥(손숙)은 분개한다.

일본군 '위안부' 캠프를 탈출하여 살아남은 영옥이 보낸 처녀 시절은 영화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이야기 구조상 보여 줄 필요도 없다). 영옥의 어린 시절, 영희(서미지)와 정민(강하나), 피해 소녀들, 할머니가 된 영옥(손숙), 집에 침입한 강도에게 성폭행당하고 빙의를 통해 정민을 현실로 불러오는 은경(최리). 이렇게 여성 이미지를 제한하고 있다. 성숙한 여성 이미지만 배제한 할머니와 소녀다.

근간에 문제가 되는 일본과의 '위안부' 졸속 협상,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 할머니들에 대한 한국 극우 단체들의 폭력성 발언은 보편적으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보는 역겨운 편견에서 출발한다. '귀향'은 할머니와 소녀로 여성 이미지를 제한하여, 이런 편견의 진입을 원천 봉쇄하고 있다. 

현재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을 철거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여성이 대통령인 한국 정부는 이러한 일본의 요청을 들어줄 틈을 보고 있다. 몇 년 전, 극우 성향의 일본 디자이너는 소녀상을 성적인 이미지로 바꾸어 인터넷에 유포하기도 하였다.

왜 그들은 이 소녀상에 집착하는 것일까? 순수를 표방하는 소녀상은 그들(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당한 일을 극명하게 반영하는 성적인 이미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이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영하는 의미화된 기호이기 때문이다. 그들(소녀상을 거부하는 이들)은 모두 '소녀'라는 거대한 죄책의 기호를 파괴하여 은폐하고 싶은 것이다.

영화는 오히려 성폭행 이후, 정민의 영혼이 빙의한 은경을 통해 영옥의 처녀 시절을 뛰어넘는다. 성인 여성 이미지를 과감히 배제한다. 오직 소녀와 할머니의 이미지를 영화상에서 담아낸다. 이로써 '귀향'은 정치적 저항과 일본 만행의 고발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다른 학살 영화들이 취한 사실적 표현보다 역설적으로 더 강력한 저항과 고발성을 드러난다. 일본군 '위안부'가 갖는 폭력성과 비인간성에 어떠한 타협도 허락하지 않는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다.

▲ '귀향' 스틸컷. 은경에게 빙의한 정민과 만나는 영옥(위), 귀향 굿을 하는 은경(아래). 

우리는 어떤 죽음을 기억하는가

언젠가 기독교순교자기념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기독교 신앙을 위해 목숨을 잃은 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간직하고 기리기 위한 것이 분명하다. 헌데 기념관은 '반공'이라는 두려움, 공격성, "다시는 공산당에 의해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로 해석되는 교훈적 메시지를 부각하고 있었다. 불편함을 느꼈다. 과연 그것이 기독교적 희생의 의미일까,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애국'이라는 대의를 위한 희생, '로맨스'를 위한 사랑의 희생, '가족'을 위한 공동체적 희생 등 다양한 죽음을 기념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를 대속하셨다는 사적인 영웅적 죽음으로 이해하려는 기독론이 지배적이다. 

과연 예수의 십자가가 '영웅적 죽음'일 수 있을까? 바울은 예수의 죽으심을 죽음 그 자체로 보면, 예수의 죽음이 세상이 판단하는 것처럼 무가치하다고 말한다. 

"의인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로마서5:7-8,RNKSV)

예수의 죽음과 그 명분은 무가치한 것이며, 예수는 죄와 악으로 무고하고 비참하게 죽었을 뿐이다. 아벨의 죽음도 무가치하다. 하나님께 그 억울함을 호소하는 죽음이다(창 4:10). 그러니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런 죽음과 호소에 귀 기울이신다고 하신다.

그러한 희생의 죽음은 그 자체로 무가치하다. 그 호소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은 정의롭기에 거룩하시고, 자비하기에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아무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무가치하고 외면당한 죽음만이 정의와 자비의 하나님을 지시한다. 이때 비로소 예수님과 아벨의 죽음에 가치가 있다. 자랑삼을 최고의 가치로 변한다. 성경은 결코 예수의 십자가를 영웅으로 기호화하지 않는다.

교회는 어떤 죽음을 기념하는가. 혹시 영웅적인 죽음만 의미 있게 여기지 않는가? 이로써 영웅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기고, 그런 영웅적 희생을 통해 교회와 기독교라는 '종교성'과 '집단'에 헌신하게 조작하려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예수의 죽음마저 영웅화하는 것은 아닐까?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이 세계적으로 수십만에 이르고, 그중에 조선인이 다수라고 한다. 남한에서 피해 신고를 한 사람은 대략 250명 정도이고 북한도 200명 정도라고 한다(2007년도 통계). 돌아오지 못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하나님은 기억하신다

아무도 기억지 않을 그 많은 죽음을 하나님은 기억하신다. 세월호 침몰로 인한 무고한 청소년들의 죽음은 어떤가. 교회는 이를 기억하고 있는가. 그 밖의 무가치하게 희생된 죽음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는가. 성찰이 필요하다.

교회는 이념 차이 없이, 무고한 희생으로 일어난 비참한 죽음에 관심을 가져 진상을 밝히는 일에 힘써야 하지 않을까. 그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지 않을까? 어디 육신의 죽음뿐인가. 인격과 영혼이 파괴된 희생자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리라. 

애국과 사랑을 위한 떳떳한 죽음들은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를 나타내고 지시할 이들은 오히려 죽기 싫어 살려 달라고 외친다. 이렇게 죽을 수 없으니 구조해 달라고 외치는 것이다. 연약하고 소외된 자들의 죽음이다. 70~80년 전 그와 같은 죽음이 역사적 사실로 있었고, 이러한 죽음은 세계 곳곳에서, 지금 이 한국 땅에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일본에서도 '귀향'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이는 이 영화에 다른 전쟁과 대학살을 다룬 영화들과 다른, 동서를 넘어 보편성을 띠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귀향'만이 갖는 독창적인 표현법 때문이다.

영화 '귀향'은 예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 테이블에 놓인 떡과 포도주와 같다(고전 11:23-26). '귀향'은 무고한 죽음으로 악의 실태를 고발한다. 영화 밖에서도 악에 대응하는 의로운 움직임이 자발적으로 일어나도록 강권하고 있다.

끝으로, 일본군 '위안부' 소녀들의 영혼들이 나비가 되어 곳곳으로 흩어져 날아가는 장면이 여운으로 남는다. 꼭꼭 숨어도 들킬 수밖에 없는 소녀들의 위태로움…. 그 소녀들의 순수와 신비를 지켜 주지 못한 국가와 어른들은 무엇을 성찰해야 하는가? '귀향'은 '성찰의 의무'와 그에 따르는 '행동의 책임'에서 우리를 도망치지 못하게 한다.

김용노 / 미국 템플대학교(Temple Univ.) 영화와미디어예술학과(Film and Media Arts), 미동부 웨스터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M.div) 졸업. 2006~2010년 C국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이후 한국에 들어와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대학원 출강('대중문화이해', '청년문화사역', '기독교문화관' 강의), '교회잉크'를 개척해 사역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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