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0년 5월 30일, 한인섭 교수(서울대 법대)가 새길교회에서 설교한 내용입니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삶을 그린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의 개봉에 즈음해 나누기에 적합한 내용이라 생각해 전문을 옮깁니다. 긴 문단을 나누고, 맞춤법을 고쳐서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요한계시록 21:1, 3-5)

I

오늘 말씀 나누고 싶은 것은 성경이 아니고 찬송가입니다. 베드로, 바울 같은 옛날 옛적 외국인이 아니고, 20세기 이 땅에서 살아간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초점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이야기입니다. 할머니의 옛날 이바구처럼, 그냥 주저리주저리 냇물같이 흘러갈까 합니다.

옛날 찬송가로 261장, 지금 찬송가로 582장은 '어둔 밤 마음에 잠겨'를 펴 주시기 바랍니다. "작사 김재준, 작곡 이동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두 3절까지 있지요. 1970년대에는 2절까지밖에 없었는데, 83년인가 찬송가 재편하면서 3절이 들어갔습니다. 유심히 보면, 1~2절과 3절은 느낌과 내용이 다릅니다.

가사를 봅시다. 1절에서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가 언제일까요. 아마 일제하이겠지요.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물론 우리나라고요. "빛 속에 새롭다"는 것은 그야말로 광-복이 아니겠습니까. 그 감격을 잊지 말고 그 빛을 우리의 삶 속에 실현하여 생명탑을 놓아 가자고 하고 있습니다.

2절은 그 시대 선각자들이 늘 부르던 내용이지요. "일꾼을 부른다"는 것과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강산 위해"(580장, 남궁억 작사)와 같이 삼천리강산(고요한 아침의 나라)을 남달리 사랑했던 우리 선각자들은 스스로 "일꾼"이 되어, "일하러 가세"의 자세가 충만합니다.

그런데 3절은 좀 다릅니다. "새 하늘 새 땅"을 염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새 하늘 새 땅"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네요. 21장 1절부터 보니,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중략) '보아라 (중략)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아픈 것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계 21:1-4, 새번역)

광복된 나라만으로 새 하늘 새 땅이 그저 오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다시 새 하늘 새 땅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고, 죽음이 없고, 슬픔과 고통과 울부짖음"이 없는 곳을 향한 꿈을 꾸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무딘 제가 1-2절과 3절 사이의 미세한 차이를 처음부터 알았을 리 없습니다. 알게 된 내력을 말씀드리지요. 얼마 전 저는 '인권 변론 한 시대'라는 제목으로, 1970~1980년대에 홍 변호사님이 변호한 인권 변론에 대한 상세한 증언을 들었습니다. 준비 작업으로 홍 변호사님이 보관하고 계신 재판 기록 4만 5,000장을 받아 전산화를 완료했습니다.

그 바탕 위에 16주, 50시간 동안 홍 변호사님을 서울대에 모셔 기록하면서 상세한 증언을 들었습니다. 당시의 형사재판의 모습과 피고인, 변호인의 활약과 고투를 들으면서 전율하고 감동하고 눈물이 고이곤 했던 순간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1976년 명동 3·1 구국 선언 사건이 있습니다. 아마 민청학련 사건과 더불어 70년대 최대의 반유신 운동이자, 가장 주목된 재판이 진행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정일형, 이태영 등과 함께 천주교 신부님들(함세웅, 윤반웅, 김승훈), 그리고 기독교 목사님들(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서남동 등)이 대거 참여했습니다. 그 일을 성사시킨 중심에 문익환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 개인적으로 볼 때, 종교로부터 사회 현장, 그리고 감옥으로 첫 발을 내딛게 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홍성우 변호사님은 문익환 목사님의 담당 변호사로서, 문 목사님이 옥중에 계실 때, 면회를 했습니다. 그때 문 목사님이 "내가 한 소절을 불러 줄 테니까 잘 기억하라"고 하여, 홍 변호사님이 그걸 암송했습니다. 당시는 변호사도 필기구 지참이 허락되지 않을 때입니다. 그것을 적어서 문 목사님의 가족에게 전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찬송가의 3절입니다.

그러니 582장의 작사자는 김재준+문익환 목사님이 되는 거지요. 스승(김재준)이 1~2절을 쓴 것을 이어받아, 제자(문익환)가 옥중에서 쓴 게 3절입니다.

II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아!" 하고 탄성이 나왔습니다. 3절의 앞부분은 바로 문익환 목사님이 자신의 고향을 떠올리면서 쓴 구절로 보였거든요. "맑은 샘 줄기 용솟아"는 바로 그의 고향 북간도의 용정이고요. ('선구자'에서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가 떠오르지 않나요) “거칠은 땅에 흘러 적실 때"는 그의 고향 마을 앞을 흐르던 해란강의 줄기입니다. "기름진 푸른 벌판이 눈앞에 활짝 트인다"는 것은 그의 심상 속에 새겨진 고향의 풍경을 압축한 것이지요. 옥중의 고통을 겪을 때, 사람들은 꿈속의 고향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요.

'고향' 하면 누구나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지요. 그런데 자신의 그 이미지는 다른 사람과 절대 같을 수 없습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하는 시인과,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라는 시인의 고향은 완전히 다르지요.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의 고향과 "박꽃 피는 내 고향, 담 밑에 석류 익은 아름다운 내 고향"도 다 다릅니다.

문익환의 고향은 북간도 용정의 명동촌이라고 합니다. 제가 2004년 6월, 제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느낌은 "넓은 들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6월이어서 들녘이 푸르고 무성해서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문익환의 고향, 명동촌으로 가면, 우리는 한 인물을 반드시 만나게 됩니다. 윤동주입니다. 윤동주의 집과 문익환의 집은 저녁 연기를 서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습니다. 윤동주는 문익환과 동갑이고, 갓난아기 때 문익환의 모친의 젖을 같이 빨고 자랐습니다. 명동소학교 같은 반이었고, 은진중학교도 같이 다녔습니다. 평양숭실학교에도 같이 다니다가, 신사참배 물결에 반대하여 자퇴하여 고향에 돌아와 다시 용정 광명학원 중학교에 편입한 것도 같았습니다. 둘 다 공부를 아주 잘 했고요.

▲ 학창시절 찍은 사진. 뒷줄 중앙 문익환, 오른쪽 윤동주.

차이도 있습니다. 윤동주는 소년 시절부터 시인이었습니다만, 문익환은 윤동주에게 눌려 시는 쓰지 못하고 있다가, 70대의 만년에 이르러 일련의 시를 쏟아 냅니다. 역사의 격랑 속에 뛰어들면서 체험을 시로 남긴 것이지요. 문익환의 호가 늦봄이니, 역사 현실에 대한 직접 참여도, 시적 작업도 늦바람처럼 찾아온 것이지요.

이제부터 실은 윤동주 이야기를 좀 하려 합니다. 윤동주 시를 모르는 분은 한 분도 없지요. 민족 시인의 영예를 안은, 이 지고지순한 시인에게 얽힌 몇 가지 이야기를요. 윤동주 시 중에서 기독교적 신앙관이 스며 있는 시가 여러 편 있습니다. 그중 한 편만 오늘 소개합니다. '팔복'이란 시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천국이 저들의 것임이요/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하략)"(마 5:3-10)라는 구절은 우리 모두가 일생 동안 읽으면서 위로받고 힘을 얻는 그 내용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윤동주는 그가 살고 있던 시대 상황 속에서, 위로를 간절히 바랐건만 위로받을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다음과 같이 됩니다.

팔복
마태복음 5장 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永遠(영원)히 슬플 것이오.
(1940. 12.)

팔복은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를 위한 구절입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거론하면서, '복이 있나니'(blessed are those who…)라고 되어 있으니, 이 세상에 복 없이 살아갈 듯한 이들에게 얼마나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입니까.

그런데 윤동주의 시대에, 1940년의 시점에, 어떤 기대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섣불리 "복 받을 것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비현실적이고, 어쩌면 혹세무민적인 허언이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어려움을 신앙으로의 도피를 통해 해결할 순 없을 테니까요.

'팔복'에 대한 윤동주의 초고를 보면, 그의 괴로움이 역연합니다. 처음부터 영원한 절망으로 생각한 게 아닙니다. 그의 초고를 보면, 맨처음에 "저희가 슬플 것이요"로 씁니다. 그렇게 쓰니 너무 슬프지요. 그래서 힘을 얻기 위해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요"로 고칩니다. 조금 더 힘을 얻긴 하는데, 그 말이 참 공허합니다.

그래서 현실을 직시하여 "저희가 오래 슬플 것이요"로 아프게 고백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오래"일까 하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윤동주는 "오래"를 지우고 그 자리에 "영원히"로 고칩니다. 구원이 없는 시대, 무한대의 슬픔을 미화하지 않고, 눈을 부릅떠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로 아프게 마무리 짓습니다.

그러면 이런 시대에 젊은 시인이 할 일은? 바로 '팔복'을 쓴 시점(1940)의 다음 해에 그는 '십자가'(1941. 5. 31), '별 헤는 밤'(1941. 11. 5), 그리고 '서시'(1941. 11. 20)를 씁니다. 영원히 슬픈 시대에 그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십자가'에서 그는, "외로왔던 사나이/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십자가가 허여된다면//목아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어 가는 하늘 밑에/조용이 흘리겠습니다"고 고백합니다. 현실을 혁명적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조용히라도 피를 흘리겠다는 자기 다짐을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신의 시를 모으면서 '서시'로써 말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그러나 시대 상황은 그런 슬픔과 외로움, 그리고 순연한 희생의 각오를 다지고 있기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윤동주는 동경과 경도의 대학으로 유학길을 떠납니다. 향학에의 의욕은 끝이 없는 것이고요. 그런데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장애가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일본으로 가려면 배를 타야 하는데, 도항하기 위해서는 도항 증명서가 필요합니다. 당시 조선 이름으로는 도항 증명서가 발급되지 않았습니다. 창씨개명을 강요당한 것이지요. 일본행을 포기해야 하느냐 어쩌느냐의 고민 속에서, 그는 창씨개명을 미루고 미루던 그는 '참회록'을 씁니다.

'참회록'에서 그는, 자신의 처지를 망한 "왕조의 유물"처럼 여깁니다. 나라가 망한 다음에, 개인의 존명도 보존할 수 없게 된 처지, 그러면서 유학을 선택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만 24년 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고 자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탄으로 그치고 살아갈 순 없는 일, 그 어느 즐거운 날을 고대하면서,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든가"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그 어느 즐거운 날"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냥 꿈꾸는 게 아니라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는 일상적 노력의 다짐과 함께 말입니다.

'참회록'의 초고를 보면, 그의 번민과 관심, 의지를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아래 낙서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데, 시인의 내면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지요. "시인의 생"이란 말도 있고, "생존/생활"이란 말도 있습니다. 산다는 게 무엇이냐, 시를 쓴다는 게 무엇이냐는 실존적 번민에 잠못 이루는 정경이 선합니다. 그중 결정적인 것은 "도항/도항 증명"이란 말입니다. '참회록'의 직접적인 동기가 도항과 창씨개명을 둘러싼 고민에서 비롯됨을 시사해 주는 것이거든요. 

윤동주는 연희전문을 거쳐 일본의 입교대(동경)를 거쳐, 동지사대학(경도)에 유학합니다. 유학 중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걸려 징역 2년을 받고, 복역 중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獄死)합니다. 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2월입니다. 실로 일제 말기의 발악으로 참 많은 인재들이 죽어 갑니다.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 송몽규도 그로부터 한 달 뒤에 죽고, 또 그로부터 한 달 뒤엔 김교신의 죽음(1945. 4.)이 이어집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을 마치면서 '서시', '별 헤는 밤'을 포함한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제목으로 한정판 시집을 인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 그런 시집이 나올 수 있을지도 의문이거니와 그의 신변에 무슨 화가 닥칠지 몰라 주위에서 만류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집은 간행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일본까지 갖고 갔던 모든 시는 체포되면서 압수되었고, 이후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의 시는 어떻게 보관될 수 있었을까요? 그의 시는 어떻게 시집으로 인쇄되어 나올 수 있었을까요?

윤동주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필사본을 우선 3부 만들었습니다. 그중 1부는 연희전문의 이양하 교수에게, 1부는 아우 같은 후배 정병욱에게 줍니다. 1부는 본인이 갖고요. 이양하에게 간 필사본은 행방을 알 길 없고, 윤동주의 소장 원고는 흔적이 없고요. 정병욱은 윤동주를 흡사 연인처럼 다정다감하게 지냈습니다. 윤동주 시집에 대한 답례로 정병욱은 윤동주 졸업을 맞아 현대 시집을 선물하면서, 시를 써 주었습니다.

정병욱 역시 1943년에 이르러 학병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전장으로 떠나기 전 정병욱은 전남 광양의 자기 집에 들러, 어머니에게 자신의 물건과 함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필사본을 맡기면서, 특별히 "일본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게 잘 보관하시고, 혹시 전장에서 죽고 못 돌아오거든 해방을 기다렸다가, 연희전문학교에 가지고 가서 여러 선생님들께 보여 드리고 발간을 상의하시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이를 마루 밑에 숨겨둔 항아리 속에 넣어 잘 보관했습니다. 정병욱은 다행히 살아 돌아왔습니다.

연희전문에서 만난 또 한 명의 절친한 친구 강처중은 참회록과 일본에서 윤동주가 편지로 보낸 시편을 귀중히 보관해 두고 있었습니다.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해방 후 용정에서 서울로 와서, 정병욱, 강처중과 만나 그 시를 모아 드디어 1948년 2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내게 됩니다. 총 31편입니다. 당대의 시인 정지용의 심금을 울리는 서문과 함께 말입니다.

정지용은 윤동주의 시를 보면서,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이 없이!"라고 탄식하면서, 그의 시를 "冬섯달의 꽃,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라는 절구로 압축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윤동주의 여동생은 갖은 고생 끝에 북한 지역을 돌파하여 1948년 12월 서울에 도착합니다. 그는 윤동주가 시를 쓴 노트를 갖고 남하하여, 그 노트의 시와 다른 시를 보태어 1955년에 증보판을 발간하게 됩니다. 이렇게 한 시대의 상징이 된 윤동주의 시편은 그를 아끼고 안타까워한 많은 이들의 지극한 정성과 역사적 기적이 합쳐져서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또 다른 궁금증은요, 윤동주의 고향에서 윤동주는 어떻게 알려졌을까 하는 점입니다. 윤동주를 둘러싼 명동촌의 어른들은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 등을 보배처럼 아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형무소에서 사망하게 되니 그 애통함은 말할 수 없었겠지요. 그의 가족이 일본에 가서 유해를 확인하고, 화장한 다음 뼛가루를 용정으로 갖고 와서 묻었습니다. '시인 윤동주 지묘'라는 당시에 특이한 묘비명을 새겨서 말입니다.

그토록 그를 아는 이들은 그의 시인 됨에 대해 아끼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남북이 분단되면서, 그를 아는 이들은 남하하였습니다. 시집이 1948년 서울에서 나왔으니, 북간도에서는 그의 시집의 존재조차 거의 몰랐겠지요. 냉전 시대하에서 남한과 북한, 남한과 중국 간 교류가 단절되니, 윤동주의 이름은 남한에서만 추모와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다 한-중 교류의 길이 열리게 된 1990년 전후하여, 한국(남한)의 많은 인사들이 윤동주의 고향과 생가를 방문하면서부터, 연변 지역에서 윤동주 추모 열풍이 불었던 거지요. 일종의 한류 열풍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윤동주 생가라는 안내판이 만들어지고, 추모비가 새겨진 게 1990년대 중반입니다.

지금 연변 자치주의 국어 교과서에는 윤동주의 시가 자랑스럽게 등장합니다. 윤동주 시집도 한글로 나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전부 남한에서 나온 책을 그냥 그쪽 인쇄체로 찍은 것이지만, 몇 편의 동시를 발굴하여 추가하고 있습니다. 연변 쪽의 평가는 이렇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바로 중국 조선족 문학의 선두 주자이며 중국 조선족 시인이기도 한 것이다. (중략) 문학사적인 견지에서 무엇보다 홀시하지 말아야 할 것은 (중략)그의 시어의 특징이거나 시어로 형상화된 화자의 개서 속에 중국 조선족 문화의 냄새가 다분하다는 이 점이 간과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중략) 윤동주 시인의 시들에는 밤하늘의 정경과 함께 달이며 별, 그리고 바람이라는 시어가 아주 많다. 연변 지역의 밤하늘, 특히는 가을의 밤하늘에서 뭇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그 야경을 보지 못하고서는 윤동주가 읊조린 하늘이요 별들에 대해 리해하기 힘들 것이다. 달과 바람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연변 쪽에서 윤동주를 연변 지역 조선족의 대표 시인으로 음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같이 윤동주는 그가 태어난 고향인 북간도로부터 서울, 일본에 이르기까지 추앙받고 있는 것이지요. 

III

문익환의 기억 속에서 윤동주는 늘 함께 합니다. 같이 젖먹던 사이고, 10대까지 가장 소중한 기억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문익환의 뒤늦은 시도 윤동주에 대한 기억에 힘입고 있고요. 문익환의 시집 중 <옥중일기> 머리말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동주형! (중략) 나같이 평범한 시인도 감옥에 들어오면 시가 쏟아져 나오는데, 형 같이 타고난 시인이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억울한 죽음을 날마다 숨 쉬며 얼마나 절절한 시들을 짓씹었을까?"

이렇게 문익환은 감옥에 가면 윤동주 감옥을 생각하고, 시를 쓰면 윤동주의 시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문익환의 모든 시에는 윤동주에 대한 상념이 떠날 길이 없지요. 문익환이 일흔에 쓴 시 한편을 소개하지요. '동주야'라는 제목입니다.

너는 스물 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 달 먼저 났지만
나한텐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 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 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 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꾸오까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 속에서 흐느끼며 빠져나간 꿈들
온몸 짓뭉개지던 노래들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너의 피 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

▲ 윤동주 시인과 문익환 목사. (MBC 영상 갈무리)

김재준은 윤동주와 무관했을까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김재준은 1936년에 은진중학교에서 교목이자 성경 교사로 부임합니다.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일류 지식인이 북간도의 시골 중학교에 부임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데, 문익환의 부친 문재린 목사의 강력한 요청으로 가능했습니다. 그 직전(1935년)에 문익환과 윤동주는 은진중학교를 졸업하니, 아마 중학교에서 직접 김재준 목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김재준이 은진중에서 직접 가르친 제자는 강원용, 안병무, 문동환 등입니다.

문동환이 남긴 사진에 김재준 교사가 같이 있습니다. 김재준은 윤동주와 송몽규가 연희전문 졸업할 때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멀리서부터 서울까지 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김약연-문재린-김재준의 슬하에서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 문동환, 강원용, 안병무가 신앙과 인생을 배워갑니다. 그 점에서 은진중학교는 참 한국 신학의 기적의 모태이자 한국 민주화의 요람이었던 셈이네요.

이런 사연을 엮고 보니, 가곡 <선구자>의 가사 중에서 한 구절만 바꾸면 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 그 곡이 친일파가 작곡했니 하여 시비에 걸리고 있지만, 그 곡을 폐기해선 안 된다고 봅니다. 그 곡을 부르며 젊음의 절규를 했던 수많은 청춘의 기억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래서 그 곡에서 조금만 가사를 바꾸면 좋겠습니다. 뭔고 하니, "말 달리던 선구자"라는 구절입니다.

당시 만주 벌판에 말 달리던 사람은 일제 장교밖에 없었을 것이고, 말 달리는 행위 자체가 귀했을 것입니다. 그 구절을 다음 중 하나로 바꾸면, 명동촌과 용정, 그리고 은진중학교를 거쳐 간 기라성 같은 선구자들에게 정확히 해당되는 듯도 합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난날 강가에서 (슬퍼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이야기가 너무 돌았나요. 억지로 결말을 지어 볼까요. 찬송가 582장은 참 소중한 사연들로 이야깃거리가 끝없이 연결됩니다. 3절에서 저는 문익환-용정-윤동주-김재준의 삶과 시를 자유연상해 봤습니다. 이 3절에서 윤동주의 그림자를 떠올릴 수 있는지는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찬송가로 돌아와 두 가지 이야기를 더 엮을 수 있습니다. 먼저 "새 하늘 새 땅아"라는 구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새 하늘이 아니라,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일어나는(일어날) 새 하늘입니다. 문익환 목사님이 이 구절을 썼을 때 무엇을 떠올렸을까를 생각하다가 한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4월 혁명의 느낌 몇 토막'이라는 글입니다.

"(1960년) 4월 26일, 나는 몇몇 벗들과 함께 흥분의 도가니로 화해 버린 서울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창경원 앞에서였다.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가 나기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소리는 허름한 옷을 입은 한 노동자의 소리였다.

그는 혼자서 연방 '다들 이렇게 친절해야지!'를 읊조리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 뻑차오르는 감격은 그에게 새 세계를 열어 보여 준 것이리라. 피비린내나는 생존 경쟁 마당에서 모든 사람의 착취와 압박의 대상으로 천애 고아처럼 자신을 외롭게 느꼈을 것이다.

이제 그는 갑자기 모든 사람이 원수가 아니라 친절한 벗이요 형제인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학생들이 자기를 위해서 피를 흘려준 것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나를 위해서, 서로서로를 위해서 피를 흘리다니!' 이 감격을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그는 새 땅에 서서 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리라."

문익환은 또 말합니다.

"진리와 정의가 제자리를 다시 찾고 본연의 모습을 회복한 것이다. 이제 그들은 정의의 새 땅에 굳게 서서 진리의 새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다. 불의와 거짓이 다시 침투해 들어오지 않고 역공세를 취하지 않으리라고 믿으리 만치 어리숙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 땅의 젊은이들이 진리와 정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그 편에 서게 되었고 그것을 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의 두 기둥으로 삼았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 앞에 열린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엑스터시와도 같은 흥분에 사로잡힌다. 우리 몸에 스며들어 오는 맑고 신선한 공기에 우리는 도취한다."

문익환은 4·19의 젊은이들의 희생이 드디어 빛을 보던 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던 그 순간에 '새 하늘 새 땅'을 떠올렸다는 것입니다. 이를 시적으로 표현하면 정확히 이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
1960년 4월
역사를 짓눌던, 검은 구름장을 찢고
영원의 얼굴을 보았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영원의 하늘,
끝나지 않는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마지막 구절은 어떤가요. "인류의 횃불"이 되자는 비원 말입니다. 명동 3·1 구국 선언 사건에서 표출된 그 사상이 이러한 비원을 담고 있을진대, 오늘날 우리의 민주화가 과연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성찰해 볼 잣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복음주의자 쪽에서 이 가사가 어색하다면서 "인류의 횃불" 대신 "복음의 횃불"로 고쳐 달라는 주문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 생각해 볼 질문은 이것입니다. "복음의 횃불"과 "인류의 횃불"은 어디가 얼마나 다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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