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편 사색> / C.S. 루이스 지음 / 이종태 옮김 / 홍성사 펴냄 / 196쪽 / 1만 2,000원

C.S. 루이스의 글은 언제나 깨달음의 기쁨을 준다.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것을 잘 보지 못한다. 친구가 와서 "바로 네 옆에 있잖아"라고 말해 줄 때, 늘 자신의 옆에 있던 것임을 알고 허탈해하거나, 기쁨을 느낀다. C.S. 루이스의 글은 우리에게 이런 느낌을 준다.

이번에 읽은 <시편 사색>(홍성사)도 마찬가지다. 책 읽는 게 어찌나 재밌던지 연속해서 몇 번을 읽었다. 더구나 유진 피터슨의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IVP)을 번역한 뛰어난 번역가인 이종태의 역본으로 읽는 것은 이 시대 우리들에게 축복이다. 그는 단순히 단어 대 단어로 번역하지 않는다. 원문의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지도록 전달하는 재주가 있다.

물론 이 책에 어려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C.S. 루이스가 가지고 있는 인문학적 배경을 우리가 따라갈 수 없기에 느끼는 어려움일 것이다. <시편 사색>에서 저자는 시편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주제들에 파고든다. 이 책에서는 심판, 저주, 죽음, 아름다움, 율법, 묵인, 자연, 찬양, 기독론적 해석, 말씀과 같은 주제들을 다룬다.

시편에서 말하는 기쁜 소식, '심판'

먼저 시편에서 말하는 심판이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러한 심판대 앞에 누가 감히 설 수 있겠는가. 그런데 시편을 보면 심판을 바라고 고대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이것은 형사재판이라기보다는 민사재판의 심판이다.

시편에서는 심판의 날이 오는 것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심판의 날에 "부당하게 재산을 강탈당한 수백만, 수천만 사람들의 억울한 사연이 마침내 받아들여지는 날이기 때문"이다(22쪽). C.S. 루이스는 "내가 옳다"는 확신과 "나는 의로운 사람, 선한 사람"이라는 확신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30쪽).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선한 사람은 없기 때문에 자신을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어떠한 사안에 대해서는 자신이 옳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좀 더 착한 사람인가 좀 더 악한 사람인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시편에서 말하는 심판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 문제를 하나님께서 바로잡아 주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심판을 기대하는 것은 자신에게 아무 죄가 없어서 자신 있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그 억울함을 풀어 주실 것이라는 소망 말이다.

저주 시편 어떻게 읽어야 할까

시편에는 원수를 저주하는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태도는 예수님께서 원수마저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에 맞지 않다. 하지만 사실 원수에 대한 사랑은 신약에서 비로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등장하고 있다(레 19:17-18; 출 23:4-5; 잠 24:17).

그렇다면 왜 시편에서는 원수에 대한 저주가 자주 등장하는가? 복수심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C.S. 루이스는, 이런 표현을 죄악을 저지르는 것에 대한 자연적인 결과임을 상기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한다(38쪽).

"그러한 증오심은 잔인하고 부당한 행동이 낳은, 일종의 자연법에 따른 결과입니다. 이는 악행이 갖고 있는 한 가지 속성입니다. 어떤 사람의 자유나 재산을 빼앗아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그의 순수성도, 더 나아가 그의 인간성도 빼앗게 될 수 있습니다." (41쪽)

하지만 이러한 증오심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나 정당한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C.S. 루이스는 이렇게 증오심에 불타오르는 것은 그만큼 선과 악의 문제에 민감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도덕 불감증에 있는 사람은 의분을 일으키지도 않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법을 알고 민감하게 여기는 사람일수록 의분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시편에서 증오심이 불타오르는 것은 그들의 악행은 하나님께서도 미워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에 '천국'이 안 보이는 이유

시편에서 죽음을 말할 때 거의 내세에 대한 믿음이 표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죽는 것은 그냥 죽는 것일뿐 그 이상은 아니라는 관점처럼 보인다(시 89:47; 39:6; 49:10; 30:9; 6:5; 88:12; 49:19). 물론 몇몇 구절에서는 부활에 관한 표현이 있기도 하지만(시 30:3; 116:3), 신약에서 부활과 내세에 관한 관점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과 비교하면 이러한 사실은 우리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사실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은 것은 구약성경에 부활 사상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C.S. 루이스는 이러한 사실은 고대 이집트의 문헌에 보면 마치 가장 중요한 일은 현재가 아니라, 사후에 행복을 보장받는 것인 것처럼 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죽음 이후 세계에 대한 관심이 무조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사실 '천국'이 하나님과의 연합을 의미하지 않고 '지옥'이 그분과의 결별을 의미하지 않는 곳에서는, 천국이나 지옥에 대한 믿음은 해로운 미신에 불과하다." (63쪽)

하나님은 계시를 점차적으로 우리들에게 더 많이 보여 주셨다. 그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이 고대의 잘못된 내세관에 이끌리지 않기 원하셨기 때문에 구약에서 내세 사상이 그렇게 많이 보이지 않는다고 진단한다.

악행하는 자들과 멀리하라

C.S. 루이스는 '시편'에 하나님을 향한 즐거움이 표현되어 있다고 본다. 마치 다윗이 법궤 앞에서 뛰놀았던 것과 같은 기쁨 말이다. 이 시기에는 마음속에 있는 순수한 신앙적 요소와 나머지 다른 요소들(즉 사람들과 함께 제의에 참여하면서 얻게 되는 즐거움)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은 채 섞여 있다. 때로는 엄격하게 구분되기도 한다(시 50:12).

시편에서는 율법을 가리켜 꿀보다 단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쉽게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당시 이교도들과 비교할 때 이해할 수 있다. C.S. 루이스는 시편에 기록된 율법에 대한 즐거움은 마치 우리가 "견고한 것을 접촉할 때 느끼는 즐거움 같은 것"이다. "지름길을 찾다가 그만 진창길을 만나 한참 고생한 후에 마침내 단단한 길을 밟게 되었을 때의 기분 같은 것"이라고 묘사한다(89).

시편에서는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한다고 기록하고 있다(시 139:21). 이러한 표현은 누군가를 하나님의 원수로 판단해 버리고, 그들과의 관계를 끊어 버린다는 점에서 바리새파 같은 태도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베풀었던 것과는 상반된 태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악을 행하는 자들과 가능한 한 함께 가지 않는 것이 현명함을 노래하는 것이다. C.S. 루이스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과 가까이 지낼 수 없을 만큼 우리가 너무 고결하고 선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은 그런 사람들과 지내도 될 만큼 충분히 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02쪽).

우리는 악인들과 함께하면서 말과 표정과 웃음으로 그들을 묵과하고 묵인하라는 유혹을 당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여 죄악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악인들과 함께하지 않는 선택을 할 필요가 있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찬양', 즐거움의 완성

시편은 자연을 노래한다. 특별히 성경의 관점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과 자연 만물을 묶어주는 동시에 그 둘을 떼어 놓는 표현이다. C.S. 루이스는 이 세상 자연 만물을 바라보고 자연을 숭배한다면 그것은 "자연에게서 말을 빼앗아" 가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118쪽). 마치 어린이가 우편배달부 유니폼에 매료되어 그에게서 편지를 받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시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하기도 하고 권고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정말 좋은 것이 있을 때에는 혼자만 즐길 수 없고,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느끼는 그 경탄에 참여할 것을 동참하게 권유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136쪽). 그뿐 아니라 C.S. 루이스는 찬양이란 "우리의 내적 건강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라고 진단한다(135).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거슬리는 대상과 마주한 것이 아닌 한" 건강한 사람은 찬양을 하게 되어 있다. C.S. 루이스는 더 나아가 우리가 찬양을 할 때에야 비로소 즐거움이 완성된다고 말한다. 연인들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칭찬한다. 이는 단순히 찬사를 표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렇게 표현하지 않으면 그들의 즐거움이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들은 마음속에서 감흥이 떠오를 때, 그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해 시나 음악, 그림으로 표현한다. 그런 점에서 천국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상태는 지루한 상태가 아니라, 사실 가장 최고의 복락 상태라 할 수 있다.

C.S. 루이스는 시편이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말씀으로 사용된다는 점을 설명한다. 시편 저자들이 한 말은 그리스도의 사건 속에서 충만한 의미가 드러나는데, 이것을 단순히 우연으로만 치부하면 안 된다고 설명한다.

높은 산에 내린 눈이 초봄에 오랫동안 녹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더 높은 산이 있다면 일 년 내내 눈이 녹지 않는 산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의 두 번째 의미를 가지고 읽는 것이 유익이라고 한다. 어쩌면 이러한 설명은 예언에 대해 극단적 회의를 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대로 설득력이 있는 설명이 될 수 있다.

C.S. 루이스의 글은 보배들이다. 때로는 그의 표현이 근본주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불편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통쾌하고 설득력이 있다. C.S. 루이스의 <시편 사색>은 단순히 시편에 대한 해설이라기보다는 시편에서 볼 수 있는 신학적 난제들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설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이 책을 3번 연거푸 읽었다. 읽을수록 매력에 빠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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