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목사가 교회를 떠났다. 교인들이 목사를 쫒아낸 것도 복잡한 교단 정치에 휘말려서도 아니다. 도시의 가난한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하던 목사는 자연이 주는 단순한 삶에 매료돼 농촌에 터전을 잡았다. 시골 교회에서 목회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농사만 짓고 사는 전업농으로 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11년을 살았다. 교회를 떠나 무임목사로 오래 있다 보니 노회에서는 목사를 면직 처리했다. 노회에서 처음으로 안수받은 여성이었다. 하지만 '목사' 타이틀에 미련 두지 않았다.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으려 하지 않고 깨끗이 벗어 버렸다.

박후임 씨는 '목사' 직함 없이 농촌에 깊숙이 스며들어 살고 싶었다. 마을 할머니들에게 농사를 배우고 그들과 함께 뒹굴었다. 함께 울고 웃다 보니 어느새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삶이 곧 목회가 된 박후임 씨를 만나러 전라북도 진안으로 향했다.

▲ 박후임 씨는 전업농이다. 오미자를 키워 엑기스를 파는가 하면 집 주변에서 농사를 지어 지인들과 나눠 먹는다. 집 뒤편 닭장에서 토종닭들을 지켜보는 박후임 씨. ⓒ뉴스앤조이 이은혜

17년 맡고 있던 교회를 떠난 까닭

서울 구로동에 있는 새터교회는 1987년 어린이방으로 시작됐다.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공장 여성과 자녀들을 돌보던 새터교회는 기독교 여성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다. 여성 노동자가 맘 놓고 일할 수 있도록 어린이집을 운영했고, 학교가 끝난 초등학생이 올 수 있도록 공부방도 만들었다. 중심에는 여성 목회자들이 있었는데 박후임 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박후임 씨는 이곳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새터교회에 줄곧 있었다. 왕성하게 활동했던 2005년, 박후임 씨는 새터교회를 떠났다.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서 생활한 도시인이었던 그는 남편과 함께 아무 연고도 없는 전라북도 진안으로 내려갔다.

가난한 여성들과 함께 17년을 사역한 박 씨가 왜 갑자기 시골로 내려갔을까. 그는 1999년 1차 안식년 때 교회를 잠시 떠나 있었다. 그때 교회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했다.

"여러 교회 다니면서 설교 듣고, 예배를 드렸어요. 교회 안에 있을 때 안 보이던 것들이 교회와 거리를 두니까 보이더라고요. 여성운동을 오래 해서 세상을 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세상으로 나오니까 내가 모르는 게 더 많고 교회에 길들여진 나를 보게 됐죠. 여성운동을 하면서 타이틀을 여러 개 갖고 있었는데 그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교회를 떠나니 교회라는 틀의 한계가 보였다. 하나님이라는 큰 존재를 담아내기에 교회라는 그릇은 너무 좁아 보였다. 게다가 교회 안에서는 자기가 아는 하나님만 절대화해서 이야기했다. 새터교회에서 17년을 보냈지만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삶을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박후임 씨는 남편 이재철 씨와 함께 1,000만 원을 들고 귀농했다. 부부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농사지으며 청년회를 조직하고 한글학교를 시작하는 등 마을 살리기에 주력했다. (사진 제공 박후임)

목사님이 '후임 씨'로 불리기까지

박후임 씨는 남편 이재철 준목(한국기독교장로회)과 1,000만 원을 들고 귀농했다. 마침 지인이 동네 빈집을 소개해 줬다. 가진 것은 많지 않았지만 시골에서의 삶은 소박하고 단순했다.

도시 생활을 탈피하려고 부러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물건을 사고 싶은 욕구도 생기지 않았고 무언가 소비하지 않아도 크게 문제될 것 없었다.

시골에 오기 전에는 도시에 살며 공동체 생활에 익숙하다고 자부했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공동체 습관이 몸에 뱄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농촌 마을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공동체성이 강했다. 마을 사람들은 상대방 사정과 상관없이 시도 때도 없이 집에 찾아왔다. 아침 일찍 전화해 그날 일정을 갑자기 통보하기도 했다.

당황스러운 날들의 연속이었지만 박후임 씨는 처음 농촌에서 보낸 3년이 정말 소중했다고 추억한다. 농사를 배우려고 마을 할머니들을 좇아다니며 얻은 것이 많았다. 도시 문화에만 갇혀 있던 자아가 깨지는 시간이었다.

"도시에 살면서 사람들을 섬겼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엄청난 섬김을 받던 삶이었어요. 목회자로서 누렸던 것, 익숙했던 것이 하나하나 벗겨지는 과정이었죠. 전도사님, 목사님으로만 불렸지 '후임 씨' 심지어 '어이!'라고 불린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불리고 나니까 오히려 신선하더라고요."

▲ 마을 할머니들이 써 내려간 글은 소중한 자산이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한 평생 농사만 지으며 살았다는 우리 어른들의 삶이 그대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공단 여성에 머물던 눈길이 마을 할머니들에게

그렇게 '후임 씨'로 불리며 할머니들과 정신없이 3년을 보냈다. 3년이 지난 후 자기 중심으로만 생각하던 시각이 바뀌며 마을 할머니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마을에서 평생 농사지으며 묵묵히 자리를 지킨 마을 어른들의 삶을 더 알고 싶었다. 그들의 삶도 소중하고 귀한데 스스로 열등하다 생각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었다.

할머니들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한글학교를 시작했다. 할머니들 대부분은 한글을 몰랐다.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워 자기 이야기를 글로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손에 힘이 없어 글 쓰기 힘든 연로한 분들과는 이야기 수업을 진행했다. 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할머니들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풀어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가난하고 힘든 과거를 이야기할 때는 눈물을 쏟아 냈다.

한글학교와 이야기 학교는 농한기에만 운영했다. 하지만 농번기를 보내고 온 할머니들이 그동안 배운 한글을 잊어 먹기 일쑤여서 매주 한 차례 진행하는 것으로 바꿨다.

어린 나이에 시집 와 못 배운 게 한이 된 할머니들은 삐뚤빼뚤한 글씨로 보고 싶은 어머니, 먼저 세상 떠난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아들딸 자랑과 떨어져 사는 손주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연필 끝에 꾹꾹 눌러 담았다. 한글 배우는 즐거움을 표현한 시도 있다.

나는 아직 못다 한 일이 있어서
조그만 더 있다가 저 세상 갈깨
못 다한 일이 무어야고
나는 지금 제일 행복해
못 배운 글 눈 빠지게 배우는 중인데
더 배우고 갈깨
나는 글쓰기와 시쓰기 재미 있어서
지금은 즐거워 행복하게 잘 지내
사라온 인생길 허무하게 살았는데
지금은 행복해

배덕임 할머니 (할머니의 정서를 전하기 위해 원 글 그대로 옮겼다.)

박후임 씨 혼자 이 모든 일을 진행한 것은 아니다. 박 씨가 다니던 봉곡교회가 지원했다. 할머니들을 돕기 위해 한글학교를 시작하면 어떻겠느냐고 교회에 제안했다. 2008년 시작한 행복한 노인학교는 이후 도예·미술·조각 등 분야를 넓혀 갔다.

▲할머니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물건들도 마을 박물관에 전시됐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할머니들의 삶을 보존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마을 박물관도 기획했다. 진안군이 '지역 기여 사업'으로 350만 원을 지원했고 봉곡교회 출신 김동엽 목사(목민교회) 가족은 소유하고 있던 폐교를 제공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진을 모았다. 집에서 쓰던 오래된 물건을 가져왔다. 시집올 때 떡을 담아 온 바구니, 이불 싸개, 어머니가 주신 오강이 모였다. 그렇게 학선리 마을 박물관이 만들어졌다.

박후임 씨는 할머니들이 자존감을 어느 정도 회복한 것에 만족한다. 이제 박 씨는 어른들이 기쁘게 자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목회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아니지만 돌아보니 할머니들과의 삶이 곧 또 다른 목회였다.

목사가 아니어도 괜찮아

농촌에 가면 목회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또 다른 목회의 장이 열렸다. 박후임 씨는 교회 안 목회가 아니더라도 지금 살고 있는 삶 자체가 목회라고 생각한다. 목회가 목사 직업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사업을 하든, 공장에서 노동을 하든, 농사를 짓든, 장사를 하든, 목회를 할 수 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 뜻을 함께 나눌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면 삶을 사는 것 자체가 목회가 될 수 있어요. 일상을 살며 매 순간 하나님 뜻을 구하며 살면 되는 것 아닐까요.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야죠.

그런데 그게 안 되니까 평일에는 내가 살고 주일에 교회 가서 하나님 만나는 것이죠. 나 따로 하나님 따로에요. 교회 나간다고 다 하나님 만나는 게 아닐 수 있어요. 억지로 나가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내 안에 기쁨과 감사가 있는지 살펴봐야 해요. 없다면, '내가 정말 하나님 뜻대로 살고 있는가' 고민도 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목사로 17년을 살았고 농부로 11년을 살았다. 목사로 산 세월이 더 길지만 농촌에서 맛보는 단순한 삶도 나쁘지 않았다.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지만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 후회는 없다. 좀 덜 누리고 적게 먹더라도 나무와 땅이 있다. 하나님의 섭리대로 살 수 있는 진안이 좋다.

▲ 박후임 씨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읍내 중학교 여학생들에게 나눠 줄 면 생리대를 만들고 있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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