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현의 누군가를 위한 '사이다'
연재를 시작하며

나는 신학 박사도, 선교학 박사도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장로교회에 다니다가 20여 년을 감리교에서 신앙생활을 했으며, 성결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던 성도다. 신앙의 배경이 이렇다 보니 교단은 어디인지, 신학은 어디서 했는지, 어떤 특정한 교단 스타일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는 유치원 시절부터 태권도를 시작하여 평생을 체육관에서 땀에 절은 도복을 입고, 먼지 때가 가득 붙은 발바닥을 털어 가며 퀴퀴한 땀 냄새와 함께 뒹굴었다. 나는 평생을 체육관에서 보낸 체육인이면서 연예인과 정·재계 인사들의 경호원으로 오랜 시간을 보낸, 직장 생활의 쓴맛과 단맛을 모두 경험해 본 사회인이기도 하다.

내 글에는 성경 구절 인용도 없고, 뛰어난 글쟁이들의 화려한 비유도 없다. 평신도 선교사로 살아가면서 선교지에서 느낀 소회들이나, 평생을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깨달은 것들을 솔직하게 적을 뿐이다. 다만 이 글이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모두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 되길 소망한다. - 필자 주

(박상현 선교사 인터뷰 바로 가기)

"교회는 보수적이고, 확실하며, 도덕주의적인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경향이 있다. 음탕하고, 자유분방한 자들, 혹은 상처 입고 소외된 사람들은 교회를 피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한 가지뿐이다. 우리 목사들의 설교와 성도들의 행동이 예수가 사람들에게 미쳤던 그런 영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목사와 성도들이 예수가 선포했던 것과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팀 켈러(Timothy Keller) 목사가 <The Prodigal God>[역간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베가북스)]에서 외친 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그만 욕먹게 하는 것도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많은 성도들은 새로운 신자를 교회로 인도하는 것보다, 교회에서 상처받거나 실망하여 떠난 이들을 다시 교회로 인도하는 것이 확실히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교회에 데려다 놓으면 교회 공동체가 다 알아서 해 줄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새로운 신자를 찾기 바쁘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당연히 둘 다 중요하다. 하지만 백날 "선교해야 한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외쳐 봤자 스스로 '크리스천'이라 고백하는 우리 삶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 최소한 도덕적이거나 윤리적, 또는 상식적이지 않으면 아무리 당신이 목사이건, 선교사이건, 장로이건, 집사이건 당신의 직분과 직책이 소용없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게 뭘까

지하철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 피켓을 들고 외치면,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교회로 사람들이 찾아오던 시절이 있었다. 분명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부흥하던 1970~1980년대 한국교회는 학생과 청년들로 넘쳐 났다. 교회는 뜨거웠고 성도는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부흥의 시기를 체험했던 세대는 장로와 권사가 되었는데, 그들의 자녀는 어디에 있는가. 여전히 우리는 부흥했던 과거 모습들만 회상하며 한국이 세계 최빈국에서 10대 경제 대국으로, 세계 최대 교회 건축물이 있는, 선교사 2만 명을 파송하는 나라로 성장했다고 스스로 칭찬하기 바쁘다.

어떤 선교사를 보내고 있으며 어떤 선교사를 보낼 것인지, 세계에서 제일 큰 한국의 교회들이 어떻게 교회로서 기능하고 있는지, 경제 대국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고 있는 크리스천 리더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제는 지난 일을 자화자찬하지 않고, 어떻게 후손들에게 참된 믿음을 물려줄지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교회에 학생이 없다. 청년이 없다. 얼마 전 자체 기도원을 보유하고 있는 서울의 중형 교회 학생부 수련회에 갔는데, 참석 인원이 13명이었다. 담당 전도사에게 물어보니, 성도가 1,000명에 육박하는데, 교회 집사도 자녀들을 수련회에 안 보낸단다. 학원 스케줄 때문에.

교회를 떠났거나, 예수를 믿지 않는 대부분의 비기독교인이 기독교 안티가 되어 가고 있다. 사역을 위해 희생당했던 목사와 선교사의 자녀들은 부모를 본받아 같은 길을 걷는 게 아니라, 죽어도 그 길은 안 가겠다고 마음먹는다. 왜 그럴까. 이 땅의 교회가 욕을 먹는 이유, 예수님이 오해받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래 전, 고 옥한흠 목사가 설교 시간에 나누었던 유명한 일화가 생각난다. 인도를 식민 지배하던 영국이 간디의 비폭력운동 앞에 무릎 꿇고 철수할 때, 간디가 그들을 향해 외쳤단다. 당신들이 믿는 예수는 가져가고, 성경 속의 예수는 두고 가라고. 그들이 믿는 예수는 그들이 만든 예수였지 성경 속 예수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 후 인도에서 사역하던 서양 선교사가 간디에게 찾아가서, "인도에 힌두교가 이렇게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기독교도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물었다고 한다. 간디는 이렇게 답했다.

"첫 번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답게 사십시오. 두 번째,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세 번째,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이 이야기를 듣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게 도대체 뭘까' 한참 생각했다. 하루도 안 빠지고 새벽 기도회에 나가고, 꼬박꼬박 십일조를 내며, 주일 성수는 당연지사, 주차 봉사와 식당 봉사를 하고,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 등으로 교회를 섬기는 모습.

자신이 섬기는 교회 안에서 어마어마한 헌신과 봉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김 집사가 있다. 늘 "난 이렇게 봉사했어", "난 이만큼이나 헌금했어", "나만큼 헌신한 사람도 없을 거야", "이 정도면 충분해". 그렇게 자기만족에 빠져 천국에 가기 위한 보험으로 교회에 다니는 김 집사. 그런데 어느 날 수요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로 향하는 김 집사에게 직장 상사가 이렇게 묻는다.

"어이, 김 부장 교회 다녔어?"
"…아, 네."

내가 속해 있는 가정과 직장, 그리고 어떤 공동체든 내 삶이 그들과 구별되지 않으면 세상은 절대 우리 삶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구별된 삶은, 늘 성경을 들고 다니고, 술잔이 오가는 회식 자리와 모임은 무조건 피하며, 믿지 않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기독교인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면서 교회에 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고, 예수님이 궁금해져야 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우리 삶에 일어날 수 있을까. 늘 믿는 사람들과 밥 먹고, 믿는 사람들과 영화 보는 등, 믿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영향을 준단 말인가. 이런 고민이 있기는 한가.

살면서 실수도 할 수 있고, 실패도 할 수 있다. 스스로 도덕적이지 못하게 살 수도 있는데, 비판과 정죄도 구분 못하고, (내 머릿속에 넣어 둔) 내게 유리한 성경 말씀을 앞세워 습관처럼 정죄하기 바쁘지 않았는가. 그런, 사람들을 이해 못하는 다양성이 기독교인들에게 부족하다는 생각을 나만 가지고 있을까.

"목사님, 저는 교회 가자고 한 적 없어요"

복음을 외치기 전에, 성경을 들이밀기 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꼭 갖춰야 할 게 있다. 최소한 도덕적이고, 상식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기본적인 인격과 소양을 갖추는 것이 우선이다. 기독교인이라고 티를 내고 살았던 당신이 비상식적일 때 욕은 하나님이 먹는다. 오해는 예수님이 받는다.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연예인들이 많이 모이는 한 교회의 예배를 영상으로 본 적이 있다. 예배를 마치고 그들을 불러내 토크 콘서트를 했다. 진행을 맡은 목사가 한 배우에게 묻는다.

"A 자매는 어떻게 교회에 나오게 되셨어요?“
"저는요. B 언니처럼 살고 싶어서요.“

목사가 B 자매에게 어떻게 전도했느냐고 묻는다. B 자매의 대답이 가관이다.

"목사님, 저는 전도한 적 없어요. 복음을 전한 적도 없고요. 교회에 가자고 한 적도 없어요."

이 영상을 보는데 내 자신이 한참 부끄러웠다. B 언니처럼 살고 싶어서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B 언니가 믿는 하나님이 궁금해 예배에 참석하다가 믿음이 생기고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삶에 이런 일들이 얼마나 일어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효과적인 선교, 100번 1,000번 생각해도 가장 효과적인 전도는 당신의 삶을 통한 선교, 당신의 행동을 통한 전도다. 그렇다면 비기독교인에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까. 오래 전 TV에 방영된 '양심냉장고'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사회에 있는 많은 법칙 중 우리가 당연시 생각하고 잘 안 지키는 규범을 찾아, 그 규범을 지키는 양심적인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프로그램이었다. 실패할 것 같았던 '양심 냉장고'는 국민들의 엄청난 호응을 받으며 큰 성공을 거뒀다. 누가 보지 않아도 양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보면서 국민들은 감동을 받았다. 희망도 보았다. 무엇보다 시민들에게 질서를 지키는 것에 대해 큰 동기 부여를 해 주었던 프로그램이다.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양심 냉장고'를 받은 사람들의 종교를 통계 냈는데, 50명 중에 49명이 기독교인이었더라. 추위에 벌벌 떠는 노숙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 주는 시민을 몰래 촬영하여 통계를 내 봤더니 10명 중 9명이 기독교인이었더라. 한 지역의 독거노인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 주고 물심양면 도움을 준 이웃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더라….

만약,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면. 우리 주변에서 교회를 비판하고 예수님을 오해했던 사람들의 마음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할 것이다.

'아, 역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르구나.'

그냥 그리스도인이어서는 안 된다

늘 가시적인 성과를 쫓고 거대한 숫자의 구렁텅이 빠져 있는 우리에게 이런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볼 수 있는 능력(분별력)이 있다면.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고, 너무 느린 방법 같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확신하건대, 교회를 욕하던 많은 비기독교인의 생각이 변하고 그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에겐 예수님이라는 좋은 롤모델이 있지 않은가.

남들이 다가가지 못하던 나병환자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었던 예수,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소외된 자들에게 다가갔던 예수.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하나님께 대들었던 요나를 보고, 오히려 넝쿨로 그늘을 만들어 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통해 당신께서 창조한 피조물을 향한 셀 수 없는 사랑을 보여 주셨듯이, 우리도 무언가 보여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인간의 몸으로, 우리들 곁에서 삶으로 보여 주셨던 것처럼. 우리 주위의 수많은 비기독교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목사가 되기 전에, 선교사가 되기 전에, 장로·권사·집사가 되기 전에 갖추고 점검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껍데기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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