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에서 아버지에게 구타를 당한 딸이 숨졌고, 1년간 방 안에 방치해 백골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것만 해도 충격적인 뉴스인데, 사건 피의자가 목사였고 더 나아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고 해 더 큰 충격을 준다. 도대체 누가 그런 일을 했을까. 알고 보니 군목 시절, 같이 군목으로 일했던 성결교단 목사가 잘 알고 있는 후배란다. 한 다리만 건너면 연결되는 가까운 사람이 사건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기도하면 아이가 다시 살아날까 해서 그냥 두었다는 보도가 나온다. 건전하고 정상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대답을 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때만큼은 정말로 그랬는지 모른다. 다음 날 아침, 죽어 있는 딸아이를 보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밖에는 매달릴 길이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나님이 그런 경우에 써먹는 편리한 분이 아닌데도, 한 번 살려 주시면 안 되겠냐며, 당황과 충격 속에 엎드렸을 그때 상황을 추측하면 연민마저 느껴진다.

건전한 교단에서 정상적인 신학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은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짐승이라도 자기 새끼를 사랑하고 아끼건만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었을까.

그러나 똑같은 악마 같은 성품이 우리들 속에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멋진 인격과 교양으로 치장해도 우리들 속에는 기회만 주어지면 언제든 튀어나올 수 있는 악마성이 있다. 그 옛날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고(행 13:22), 자기 원수였던 사울 왕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놀라운 인격을 보여 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는 아리따운 여인이 벌거벗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다윗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가 어떤 상황에서도 미동하지 않던 악마의 모습이 그 순간 깨어났다. 다윗은 그 여인의 남편을 교살하고 차지해 버린 아주 악랄한 파렴치범이 되어 버렸다.

사실 우리들이 그만큼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은 아직 그런 죄를 지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우리는 죄인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돌아봐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숨어 있는 죄성은 언제든 깨어나 우리를 악마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대로 늘 기도해야 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사람은 정당함을 획득할 때 악마가 된다

그런데 우리 속에 잠재된 악마의 모습이 깨어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의(justice)에 대한 욕구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원해서 악마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정당함을 획득할 때 악마가 된다. 누군가 나를 한 대 때리면 그에 대한 정의는 한 대 되갚는 것이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받은 대로 갚는 것은 악마의 법이 아니라 사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이다(출 21:23-25). 정의(justice)에 대한 욕구 때문에 우리는 한 대 맞으면 당연히 한 대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대를 갚는다고 속이 시원해지지는 않는다. 실제로는 한 대 맞으면 몇 배로 되갚아야 정의가 이루어진다고 느끼는 악마의 속임수에 넘어간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한 악마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고,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권고하셨다(마 5:39).

그날 그 아빠가 딸을 구타하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정의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날 밤 아버지는 딸을 구타했다. 아버지로서 가출한 딸을 향한 당연한 훈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정의롭지 못했다. 이제 그 대가는 감옥에서 치러야 할 것이다.

우리 한국 사회를 아프고 병들게 하는 이상한 관점이 있다. 누군가 잘못을 하면 그 잘못을 응징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든 큰 잘못이 아니라는 관점이다.

군대에서 구타를 당해 죽은 병사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들은 대체로 구타당한 병사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군대 내무반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지혜롭게 행동하지 못해 '고문관'이 된 것이고, 자신의 잘못 때문에 다른 병사들의 미움을 받아 구타를 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타한 병사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보다 구타를 당해 죽게 된 병사에게 더 큰 비난이 쏟아진다.

"군대 생활을 잘했더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그런 일을 당한 것은 순전히 그 병사의 잘못 때문이다".

어떤 여성이 성추행을 당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성추행을 저지른 사람에 대한 비난보다도, 행실이 단정하지 못한 여성이라서 그런 일을 당했다는 비난이 더 크다. 처음부터 조심하고 미리 대비했더라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부부 싸움으로 아내나 남편이 집을 나가게 된다면, 남아 있는 사람에게 비난이 집중된다. 남편(아내)이 잘했으면 아내(남편)가 집을 나겠는가, 하는 논리다.

물론 그렇다. 병사가 군대 내무반에서 지혜롭게 행동했다면 구타당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여성이 좀 더 조신하게 처신하면 성추행을 당할 가능성은 줄어들 수도 있다. 남편이 좀 더 자상하거나, 아내가 좀 더 사랑스럽게 대했더라면, 배우자가 집을 뛰쳐나갈 일은 안 생길 수 있다.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더 큰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그들이 아니다. 구타는 더 큰 악이며, 성추행은 더 큰 잘못이고, 가정을 떠나 버리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아이가 가출한 것은 물론 잘못이다. 그렇다고 부모가 자식을 죽도록 때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더 큰 악이다.

우리 사회에는 누군가 잘못하면 그것을 응징하는 것은 괜찮다고 하는 이상한 논리가 있다. 그렇게 응징하는 일이 벌어지면, 응징으로 피해당한 사람들에게 더 큰 책임을 묻는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삭막한 사회로 만들어 간다. "눈에는 눈이라는 사고방식으로 살다 보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소경이 될 것이다"라는 간디의 명언처럼, 응징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 삭막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응징은 정의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갑질'이 왜 문제가 되는가? 무엇인가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었을 때, 소비자는 갑질하기 시작한다. 당연한 권리를 침해당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응징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끼어들기를 한 운전자가 있다면, 기어이 쫓아가서 응징을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있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갑질은 항상 힘이 없고 연약한 자들을 향해서만 이루어진다. 부모가 힘없는 자식을 향해서, 소비자가 힘없는 종업원들을 향해서, 대기업이 힘없는 하청 업체를 향해서 갑질을 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응징이 아니라 사랑과 배려다. 아쉽게도 신학을 아무리 공부해도, 수년간 신앙생활을 해도, 너무나도 단순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으로 육화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만들어 가야 한다. 미국의 학교에서는 두 학생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누가 더 큰 잘못을 했는지 따져 보고 그에 따라 적절하게 징계하고는 한다. 반면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대체로 누가 더 큰 잘못을 했는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두 학생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징계한다. 때리는 것보다 우는 것이 더 큰 잘못이다. 그래서는 폭력이 근절되지 않는다.

군대 내 어떤 병사가 지혜롭게 처신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를 구타하는 것이 몇 백배 더 큰 잘못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인정하지 않으면 군대 내 구타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딸이 가출을 하고 부모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다고 부모가 딸아이를 5시간씩 구타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소비자에게 적절하게 서비스를 하지 않는 직원은 잘못을 한 것이다. 그렇다고 직원의 인격을 무시하고 폭언이나 폭행을 일삼는 일은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남편이 아내를 서운하게 하고,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다고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괜찮다고 해서는 안 된다. 아쉽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맞을 짓을 했으니 맞겠지" 하면서 폭력을 두둔하는 일이 일어난다.

지난 몇 년간 서울 어떤 교회에서 분쟁이 진행 중이다. 분명 그 교회 담임목사는 잘못한 게 있다. 그렇다고 그 담임목사를 인격적으로 비방하고, 성경에서 권하지 않는 온갖 방법들마저 동원하면서 퇴진 운동을 벌이는 것은 잘못이다. 아무리 개혁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그것은 거룩하지도 않고 성경적이지도 못한 일이다.

반대로 교회 측 대응도 그렇게 성경적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일단 양측이 서로를 '잘못을 행하는 무리'로 규정한 이상, 상대를 향해 어떠한 방법을 써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단언컨대 그건 바른 방법이 아니다. 그런 방식의 대응은 개척교회 목사가 자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바로 그 사고방식이다. 이렇게 하다가는 죽음을 초래할 것이다.

사탄은 항상 우리가 선한 동기를 가진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악마가 되기 원하거나, 의도적으로 악한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정의(justice)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바로 그것이 악마적인 것일 수 있음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예수님의 방법은 오른뺨을 때렸을 때, 왼뺨을 돌려대는 것이었다.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려 주시는 것이었다(롬 5:10). 우리는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무리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야 하는 제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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