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이 되니 또다시 기독교 정당 이야기로 시끄럽다. 그들의 열정은 대단하다. 절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외면하는 기독교 정당에 무슨 돈이 있어 선거 때마다 활개 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들은 차별금지법 반대, 반동성애 입법화, 반이슬람 입법화 등을 내걸었다. 이대로 가면 기독교 극우 정당이 들어서는 게 아닐까 염려가 된다.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젊은이 대다수는 교회를 안 다니고, 가나안 성도들 수는 100만을 헤아리니 남은 것은 권력 쟁탈 외에 뭐가 더 있겠는가.

정파 구성은 이슬람 전통, 성경과 맞지 않다

기독교 정당을 만든다는 말은 성경적이지 않다. 성경 어디에 정당을 만들고, 권력을 쟁취하라고 되어 있던가.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성육신하셨나. 당시는 제정 로마 시대다. 예수님이 권력을 탐하셨다면 카이사르나 옥타비아누스로 태어나셨어야 한다. 최소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수도 로마나 장차 수도가 될 콘스탄티노플 같은 곳에서 태어나셨어야 한다.

예수님이 정파를 구성하고, 권력을 탐하고, 위세를 부리셨던 적이 있던가. 무리가 추대하려 하자 끝까지 무리를 피하셨다. 제자들의 기대에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질책하실 정도였다. 권력이 그의 목을 짓누르자 대답 없이 어린양이 되셨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리라"는 말이 지금은 들을 필요가 없는 교훈이라는 말인가.

구약으로 가 보자. 바벨탑을 지을 때 여호와의 사람들이 그 대업에 참여했던가. 여호와께서 바벨탑을 무엇이라고 규정하셨던가.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셔서 히브리 백성을 구원하신 후 백성을 모두 어디로 데려가셨던가. 모세는 파라오 같은 새로운 지배자에 불과했던가.

그들이 40년간 고초를 겪었던 광야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생 끝에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정복한 여호수아와 사사들이 이끌었던 공동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권력·정당·힘·위세 같은 것들에 얼마나 어울리는 성과들이란 말인가.

민중이 왕을 원할 때 사무엘은 극렬하게 왕정의 위험성을 비판하였다. 사무엘기와 열왕기에 나오는 수많은 내용은 여호와의 백성들이 왕정을 받아들이고, 국가를 세우고, 권력을 탐할 때 어떤 위기를 겪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들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 모세와 더불어 구약 최고의 인물인 다윗. 역대기에서 그렇게 다윗 왕조를 찬양했지만 다윗 왕조가 얼마나 갔던가. 조선왕조도 500년이었는데, 솔로몬 타락 이후 바로 분열되었다. 왕조적 정통성이라는 것은 구약에서 존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기독교가 유대교보다도, 시오니즘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더 부합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하는 대제국의 시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파멸의 지경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무슨 예언을 했던가. 새로운 나라, 새로운 왕국을 세울 것이다? 전혀 아니지 않았던가. 이스라엘의 죄, 유다의 죄, 고아와 과부를 버리고 죄의 길을 탐학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으셨던가.

이사야의 대망의 때가 새로운 거대 왕국의 회복인가? 전혀 아니지 않은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오시고, 이집트와 아시리아가 회개하며, 이방에게도 복음이 전파되는 '새로운 세계'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나라가 아닌가.

대체 신구약 어디에 기독교가 정당을 구성하고 권력을 탐하며 그 권력으로 무엇인가를 규제하고 규정하려고 했단 말인가. 인류 종교사에 시작부터 권력과 함께한 종교는 단 하나. 이슬람밖에 없다. 메카에서 쫓겨난 헤지라의 밤 이후 야스리브, 즉 메디나에서 교세를 확보하고 무함마드는 군대를 끌고 메카를 정복한다.

이후 무함마드는 아라비아반도를 모두 점령했고, 무함마드 사후 정통칼리프시대에는 이집트와 사산조페르시아를, 우마이야왕조 때는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하였다. 권력을 탐하고, 권력에 의지해서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하는 전통은 이슬람 전통이지 기독교의 전통이 결단코 아니다.

대형 교회 힘 이용하는 것은 중세 가톨릭적 발상

이번 기독자유당 창당대회에서 진행된 전광훈 목사 발언의 요체는 '대형 교회 활용론'이었다. 장경동 목사나 윤석전 목사도 동의한다. 교회 성도 중에 몇 퍼센트만 찍어도 몇 만표는 기본이다. 이런 식의 주장이다. 비대해진 대형 교회의 힘을 활용하겠다는 주장이다. 그럴 수 있다고 가정해도 이 모습은 전형적인 중세 로마 가톨릭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의 위계적인 구조를 활용하여 전 유럽에 조직망을 구축했고, 교세를 활용하여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랑스 국왕 혹은 각 지역 영주들을 통제하던 그 방식 그대로가 아닌가.

목사는 성직자인가, 정치가인가. 성직자이자 정치가로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시대인 중세. 교황은 교황령이라는 영토를 갖고 있는 군주였고, 추기경들은 자신들의 독립된 공국을 소유하고 있었다. 제후는 본인 영지의 교구에 자신의 자식들을 주교로 세웠고, 대주교를 비롯한 고급 성직자는 상층계급이 모조리 독차지했다. 그런 시대가 중세다. 정치와 종교가 구분되지 않고 종교가 정치에 영향을 줘 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던 시대였다.

결과적으로 중세는 어떠했는가. 서로마제국이 무너졌던 그 혹독했던 시대에 권력도, 무기도 없이 게르만족을 상대하며 도시들을 지켜 냈던, 그 엄청난 사회적 책임을 감당했던 교회가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고 종교전쟁을 벌이고, 교황 무오류설을 주장하는 등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저질렀다.

개신교는 종교개혁의 후예인데, 왜 중세 로마가톨릭과 비교하는지 궁금할 수도 있겠다. 종교개혁의 역사를 냉정히 살펴보자. 루터와 칼뱅은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원칙을 고수했고, 사회 문제에 보수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독일농민전쟁을 지혜롭게 해결하지 못했고, 재세례파에 대한 엄청난 탄압에 가담했다. 제네바 신정정치는 많은 사람을 화형시키면서 유지되었다. 마녀사냥은 신교 통제 지역에서도 빈번히 발생하였다.

이것들을 모두 죄악이라고 규정하려는 게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종교적 권위를 정치적 힘으로 유지할 때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무수한 죄악과 참상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정치적 힘을 빌리려 하고, 정치적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할 때 교회는 쇠퇴했고 역사 속에 그들의 힘은 꺾이었다. 오히려 극적으로 상실되었다. 다윗 왕조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가 얼마나 지리멸렬했던가.

증오가 정강 정책이라고?

이번 기독자유당은 다소 위험하다. 이들은 누구나 인지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강 정책으로 증오를 내세우고 있다.

차별금지법 반대, 반동성애, 반이슬람!

기독교 정당이 이 정도로 구체적인 강령을 내밀었던 적이 있던가. 차별금지법에 반대할 수 있다. 결코 동성애를 옹호하는 것만 올바르다 얘기할 수 없다. 이슬람에 대한 평화주의적 태도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닐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 정당 정강의 핵심이 모두 '반대'에 있다는 점이다.

무엇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 이슈들은 정치적으로 보수와 진보를 가로지르는 예민한 문제이기도 하다. 실제로 반동성애 활동은 매우 구체적이고 공격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반대 움직임은 광장을 가득 채우기까지 했다. 여러 인터넷 매체를 통해 이슬람과 관련한 극단적인 정보들을 적극적으로 퍼뜨리기도 한다. 이런 활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내 어떤 집단보다도 반공주의적 성격이 강하고, 쉽사리 종북을 운운하는 사람들이다.

반대한다는 것이 곧 증오는 아니다. 반대하기 때문에 다른 방안을 낼 수도 있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반대는 증오로 무장한 반대로 보인다. 정치적으로 진보 진영의 고민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종북으로 욱여싸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그들은 상대를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상대는 동성애를 이성애와 동등한 성애의 관점으로 접근한다. 동시에 의학적, 과학적, 역사적으로 동성애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학문적 주장을 펼친다. 이슬람 역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있다. 근동 문화와 이슬람의 본질, 이슬람 평화주의와 극단주의를 구분하면서 접근하고 있다.

이에 대응한 기독교 진영의 논리적인 반박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그들이 내세우는 말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성경에 그렇게 써 있지 않다는 것 정도다. 동성애, 이슬람의 영역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반박원순, 반문재인 이야기까지 한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도 철저하게 정부 입장만을 고수하면서 어마어마한 찌라시를 뿌려 대기도 했다. 전광훈 목사는 이승만 영화 제작, 도서 제작 등 적극적인 이승만 미화의 선봉에 서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여기에 구분점이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어디까지가 성경적인 것이고, 어디까지가 별도 이슈인가. 어디까지를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모든 주장은 정서로 전달되고 있고, 도매금이 되고 만다. 그곳에는 비판도, 비평도, 숙고도, 성경적 근거도 없다. 동원, 카리스마, 지도자만이 있을 뿐이다. 광범위하게 성도가 동원해 대중 집회를 열고, 논리보다는 감정과 아젠다에 근거한 카리스마적 메시지에 의존한다. 대형 교회 목사들의 이름만이 언급되고 성도들은 아멘, 아멘 외치면서 태극기를 흔들며 화답한다.

정치는 정치가에게

게다가 아직 한국교회는 정당을 만들어 독자적으로 정치하거나, 입법 활동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 한국교회는 얼마나 '기독교적 가치'를 보유하고, 이를 구현하고 있는가. 세상과 구분되는 새로운 가치를 주창하며 이 사회를 선도했던 적이 있는가. 구한말 애국 계몽 운동이나 민족주의 독립운동 이 후 무엇이 있었던가.

교회를 뒷받침하는 신학조차 매우 폐쇄적이고 보수적이다. 교회의 운영 구조도 1980년대 한국형 근대화 과정과 똑같다. 교회에 정치가, 기업가, 교수들이 넘쳐나지만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정치가', '기업가'일 뿐이다. 기독교 정치가, 기독교 기업가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칼뱅의 귀족 민주주의 이후 기독교는 사회를 구조화하는 능력 자체를 잃어버렸다. 그렇게 된 지가 수백 년이다. 더욱이 한국교회는 이런 것들에 대해 경험도 없고, 준비된 바도 없고, 인재도 없다. 유명 아이돌 가수의 팬클럽처럼 수십만이 모여든다고 그 집단이 집단으로서 비전과 가치를 소유하거나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는 내세와 개인의 행복 추구를 위한 기독교 신도들의 집합체일 뿐이다. 사회복지나 구제를 제외하고 여전히 대부분의 영역에서는 초보적인 단계다. 이를 인정해야 한다. 정치는커녕 제대로 된 사회적 기능을 소화하고 있다고 보기도 힘들다.

정말 정치를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정치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만 한다. 그리고 기독교 정치가 시작되더라도 그것은 정치가의 역할이지 성직자의 역할이 아니다. 목회자여, 정치에서 손을 떼라.

심용환 / 역사 강사, 깊은계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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