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들이여, 부림의 전례를 만들어 주십시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에스더 4:14)

다시 한 번 교회에 호소합니다. 제도화된 이 사회의 적대가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실체를 드러낼까 겁을 먹지도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진실이 밝혀져도, 방송에 나와서 몇몇이 떠들어도, 서명운동이 벌어져도, 그들은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는 겁니다. 이 모든 소동이 곧 지나갈 소나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때문에 저는 흔하디 흔한 산재 사건에 불과한 주선우 씨 사망 사건이 갖는 의미가 각별하다고 봅니다.

저는 이 사건이 그저 그렇고 흔하디 흔한 이 땅의 외로운 죽음들과 그때마다 배짱 두둑하니 온갖 갑질 횡포 다 떨어대는 파렴치한 재벌들의 일상적 행태를 드러낼 하나의 '신적 비유'로 생각합니다. 작은 사례이니 싸우기도 쉽고 모범적 선례를 남기기도 쉽습니다.

모든 청년의 절망과 좌절을 무기로 또 그 반대의 희망을 설파하는 분들에게 보내 주십시오. 공감과 연대와 소통을 외치는 분들에게도 전해 주십시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도 남에게 대접하랬다고. 모든 저와 같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의 관심과 공유를 부탁드립니다.

희생자의 유해를 해체해 각 지파에게 보냈던 사사 시대 누군가의 심정을 빌려 씁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빙자해 씁니다. 부디 들어 주십시오. 한 기독교인 청년이 죽었습니다. 한 주일학교 교사가 죽었습니다. 채용 갑질에 하루 15시간 지게차 운전을 하다가 고장 난 차에 깔려 피를 흘리며 죽었습니다. 회사는 현장에서부터 그 죽음을 은폐하고 거짓으로 꾸미고 그 죽음을 그의 책임이라 주장합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유족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진실과 사죄입니다. 아들이 이미 죽었는데 무엇으로 보상이 될까요? 다 부질없는 싸움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남은 가족으로서, 인간의 의무란 게 있습니다. 그래서 싸우는 겁니다. 우리 중 누가 이런 일을 겪었다 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각 교회들은 이 사건에 관해 성명을 발표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교우들은 이 사건에 관한 기사들을 교회 홈페이지에 게시해 주십시오. 목사님들은 이 사건에 관해 설교해 주십시오. 페이스북에 트위터, 블로그에 어디라도 공유해 주시고 코멘트해 주십시오. 교계의 원로들, 차세대 지도자라 불리는 분들, 한기총, 각 교단들, 각종 단체들은 입장을 표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도들은 그분들에게 닿도록 이 호소를 전파해 주십시오. 그들이 말하고 움직일 때까지 전파해 주십시오. 언제 그들이 우리들의 말을 대신해 주었던 적이 있었던가요?

계산 없는 순수 행동, 거기서 우러나오는 소박한 선행 외에는 세상을 바꿀 희망은 없습니다. 악마가 되어 가는 저들을 멈춰 부림의 전례를 만들어 주십시오. 한 기독교인 청년의 죽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특별히 뿔뿔이 흩어져 있는 교회들에게 전해 주십시오. 과연 누가 응답하는지도 보게 될 겁니다.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아모스 5:24)

적대의 제도화

청년 주선우 씨(27)의 어이없는 죽음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베일 너머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자꾸만 상상하게 된다. 조직과 개인들, 책상과 서류들, 휴대전화와 문자들, 지시 사항, 체크와 보고들, 오랜 숙의, 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침묵의 카르텔. 전체 디테일은 그렇게 완성된다.

일상의 늘 그런 풍경일 뿐 놀라운 일은 아니다. 등장인물이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들 대부분은 소심하고 선량한 개인들. 병원을 다니며 몇 종류의 약을 복용하는 월급쟁이 딸 바보, 독실한 크리스천 마누라에게 꼼짝 못하는 피곤한 사내들이다.

디테일은 그들이 만든다. 그러나 배후는 정확하지 않다. 언제든 그들은 자신들의 연약한 알리바이를 댈 수 있다. 상부의 지시라거나, 업무상 어쩔 수 없었다거나, 우리 역시 희생자에 불과하다거나…. 깃털일 뿐, 피해자는 있어도 가해자는 없다. 희생은 있어도 책임은 없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피해자 및 희생자에게 적대화된 제도의 디테일이다.

아는 사람들에게 다 물어보았다. "영화 <베테랑>과 <내부자들>이 보여 준 모습이 진짜 우리 사회의 현실이라고 생각하는가?" 열이면 열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놀랐다.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 대답을 듣고 우울해져 과연 그럴까 생각하다 나도 모르게 이런 결론이 내려졌다. 그렇다. 그것이 진실일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충무로의 유명 배우들과 익명의 일상인들의 차이다. 그러고 나니 그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더욱 무서웠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유 없는 적대, 까닭 없는 미움.

이 적대화된 제도 아래서 진짜 죄인들은 결코 드러나는 법이 없다. (심지어 그들이 누구인지를 가려주는 게 제도이다.) 더 나쁜 건 진짜 죄들을 결국 단죄할 수 없다는 점이다. 탐욕과 교활, 갑질과 횡포, 비겁과 비굴, 이 모든 것을 우리 사회의 오랜 질서 혹은 관행이라 불리는 철벽과도 같은 제도가 일상적으로 비호하고 있다.

각 단위 시냅스를 통제하는 전체적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 시스템이 누군가들에게는 얼마나 편파적으로 호의적인가? 어디까지나 법이 보장하는 중립의 방식으로! 반대로 누군가들에게는 얼마나 이유 없이 무자비하고 적대적인가? 어디까지나 법이 허락하는 중립의 방식으로!

회개하라 선거가 다가왔다

선거철이 다가왔다. 메시아, 그리스도, 해결사, 구원투수, 젊은 피의 인재들이 동원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근본적 외침은 들리지 않는다. 여야를 막론하고 당선만 시켜 준다면 세상을 바꾸어 주겠노라 장담하지만. 풀뿌리, 흙수저, 민중이라 불리는 서민들은 더 이상 가짜 메시아들의 비전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본래 거짓말로 소일하며 국민을 놀려 먹는 늑대 소년들 같다. 본래 상층부 기득권의 이익과 독점을 대변해 온 새누리당뿐만 아니다. 새로운 정치를 한답시고 이합집산하고 있는 야당도 마찬가지다. 아니, 야당에게서 믿음을 발견치 못하는 이유로 새누리 기득권의 독점이 공고화되고 있다.

안타깝다. 짝사랑을 고백하는 가난한 사내들처럼 아무리 '브나로드'를 목 터져라 외친들 무엇하랴. 오로지 당신의 미래를 행복하게 해 주겠노라 청혼해도 처녀들의 현실감각에 임팩트 있는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을.

왜 그럴까. 이유는 한 가지. "신(神)은 하늘에 계시지만 차르는 땅에 군림한다"는 말처럼 그들의 장밋빛 감언들은 오지 않을 미래의 천상 공간을 부유하고 있다. 지금 여기 외롭고 아프고 시린 피부에 도무지 와 닿지 않는다는 말이다.

정치만 그런가? 종교도, 문화도, 예술도 마찬가지다. 공중을 선회하는 사이비(似而非) 양식은 소수의 생산자들에게만 의미를 가질 뿐이다. 하루 노동으로 하루를 견디며 한 날 괴로움을 그날 족함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풀뿌리들에게는 누가 이기든 지든 상관없다. 해당 사항 없음의 메이저리그일 뿐 아닌가.

누구든 한번이라도 억울한 일을 겪어 본 사람은 안다. 그것을 해결해 보려 여러 관청을 기웃거려 본 사람은 안다. 이 나라에서는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는 것을. 줄이 얼마나 빠른지, 백이 얼마나 센지. 줄 없고 백 없는 처지가 얼마나 외로운 정상인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이 한마디는 대한복음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가 아니던가.

제도적 적대의 현실

이 아버지의 외로운 싸움을 보시라. 이 사건은 국가적 의제로 떠오를 만한 사건도 아니고 전대미문의 큰일도 아니다. 그저 그렇고 흔하디 흔한 한 회사 직원의 불운한 산재 사고이고, 그 흔하디 흔한 산재 처리 하나 정상적으로 해 주기 싫어 온갖 조작, 갑질을 다 하는 재벌의 이야기다. 그게 그들의 배짱을 두둑하게 해 주는 관행적 행태라는 것이다.

사건의 진실을 밝혀야 할 경찰? 사고의 원인을 제고해야 할 회사? 그런 당위의 말일랑 하지 말자. 적대화된 제도에서 모든 당위의 말들은 말의 당위일 뿐이다. 그 본관념을 따지려면, 언제나 그 반대를 생각하면 된다. 그게 정확한 현실이다. 이것이 경찰도, 회사도 아닌 아들 잃은 아버지가 사고를 밝혀내야만 하는 이유다.

(오해는 마시라. 나는 이 나라의 경찰과 관료 조직과 기업들을 사악하다고 싸잡으려는 게 아니다. 내 초점은 어디까지나 숨어 있는 사단의 실체를 포착해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름을 딱 붙이는 축귀(逐鬼)의 승리에 있다.)

그가 밝혀낸 내용을 보면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다. 곧 이 청년이 사고로 숨진 그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모종의 축소, 은폐, 조작의 입맞춤이 기획되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누가 주도했고 지시했을까, 어떻게 전부가 동의했을까. 그 자리에는 적어도 삼십여 명가량의 사원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죽은 신입 사원의 입사 동기도 십여 명가량 있었다.

그들은 한 달 동안을 하루 13~15시간, 생전 해 보지 않은 지게차 운전만 했다. 사무직 신입 사원들이었고 첫 출근은 한 달 뒤였다. 그러나 한 달 전에 벌써 출근 지시가 내려졌고, 그 업무가 지게차 하역이었다. 회사는 그게 사무직 신입 사원을 훈련시키는 방침이라 했지만. 생각해 보라. 그게 채용 갑질로 돈 몇 푼에 사람 등골 빼 먹는 수탈의 방식이라는 걸 누가 모르겠나.

회사는 그런 식으로 신입 사원들에게 하루 13~15시간씩 지게차 하역 작업을 시킴으로써 사주의 가계를 불려 주었던 것이다. 남의 집 귀한 자식들 데려다 합법을 가장한 불법으로 강제 노역을 시키면서 자기 자식들은 호의호식하며 사장, 부사장 명함 파 주었을 거란 말이다. 다시 밝힌다. 나는 그들이 특별히 악한 사람들일 거라는 선입견이나 비틀린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이 까닭 없는 적대의 실체다.

그들은 비정규직 지게차 작업자들이 퇴근하고 나서도 다 마치지 못한 물량을 밤새워 마쳐야 했다. 아마도 퇴근이라는 것을 아예 없앨 수만 있었다면 회사는 그랬을 것이다(이건 풍자가 아니다). 그들이 신입 직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던 이유는 오로지 다음날도 그렇게 부려 먹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사고가 난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누군가의 지시로, 전부 다 입을 맞추고 모의에 가담했다.

그들은 현장을 보전하지 않았다. 훼손했다. 자신들의 진술에 맞도록 치우고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차마 해서는 안 될 반인륜적 시신 모독도 행했다. 동료의 죽음을 확인하려 시신을 발로 건드려 본 것이다. 입을 맞추고 상황과 현장을 정리한 다음 경찰을 불렀다. 그리고 최후로 유가족에게 연락했다.

유가족이 현장에 도착해서 듣게 된 최초의 사고 경위는 따라서 거짓말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시신으로 누워 있는 현장에서 그들은 버젓이 거짓말을 했다. 그가 죽은 것은 그의 잘못이라고. 무슨 말인가? 회사의 책임도 누구의 책임도 아니고, 그의 책임이라는 말이다.

경찰은 CCTV가 하나도 작동 안 된다는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어 주었다. (믿음이 좋다.) 그들이 진술한 그대로 앵무새처럼 텔레비전 방송 기자에게 인터뷰까지 해 주었다. (서비스도 좋다.) 신입 사원이란 말도, 사무직 직원이라는 말도 없었다. 최초의 뉴스는 지게차 운전수들의 부주의(사이드를 채우지 않고 내리는)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기자의 고의는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사이드를 채우지 않고 내려서 사고가 났다(차가 움직였다)는 설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보도한 것인지. 이 최초의 진술이 거짓말임이 밝혀졌으나 경찰도, 방송도 그에 대한 조사와 후속 취재를 하지 않았다. 요구한 정정 보도도 해 주지 않았다. 까닭 없는 일상의 적대는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최초의 진술이 명백한 거짓말이라는 사실은 은폐, 조작의 의도성을 드러낸다. 그는 사이드를 채우지 않고 내려 사고가 난 게 아니다. 고장 나 제어 불능인 차에서 탈출하려다 난 사고였다. 부주의한 것은 그들이었다. 자신들이 유족에게 준 영상 속에 이런 증거가 있음을 그들은 인지하지 못했다. 경찰 역시 그 영상을 제출받고도 파악하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가 혼자서 아들의 사고 장면을 무수히 재생해 보다가 발견한 것이다.

나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다. 아들의 죽음의 장면이 담긴 영상을 무수히 재생하다가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발견했다.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문제는 누구도 아버지가 발견한 진실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진실은 일상의 적이다. 갑자기 귀찮은 게 돼 버렸다. 그렇게 노골적인 적대의 대상이 됐다. 그 다음 첫 번째 거짓말을 보완하기 위한 새로운 거짓말들이 이어졌다. 그게 안전벨트 미착용과 졸음운전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안전벨트 미착용이 어찌 한 달 된 신입 직원의 잘못인가. 실제 사고는 그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일어났다. 졸음운전에 이르면 까닭 없는 악의의 실체가 밝혀지는 느낌이다. 적대의 정도? 그럴 필요? 누구의 어떤 필요에 의해 그 정도의 사단적 적대가 발생하는 걸까?

회사는 함께 일한 입사동기들을 즉각 유족 및 언론과 차단시켰다. 그들끼리도 차단한 걸로 알고 있다. 죽은 청년의 소속 회사는 ㄱ택배라는 이름과 상관없는 ㅎ운송 하역으로 바뀌었다. 거짓이 거짓을 낳고 작은 거짓이 큰 거짓을 생산했다.

처음에는 사고 자체의 축소, 은폐가 목적이었다. 그다음에는 합의금의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회사의 명성과 손해를 가리려는 보이지 않는 더 큰 검은 손이 개입했다. 우리는 그 검은 손의 실체를 드러내 정확한 이름을 붙이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검은 사제들을 소환한다

주재훈 씨(58)는 아들의 사망의 진실을 밝혀냈다. 그것은 아들을 죽게 한 적대적 실체와의 직면이기도 했다. 제도적 적대에서 진실은 다시 적대받았다.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누군가 이 사건을 여론에 알리는 길이 가장 빠르다고 조언했기 때문이라 한다. 정말 웃지 못 할 슬픈 일이다.

사실 내가 이 아버지였다면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항의도, 저항도,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정의를 믿지 사람의 심판에 하등 기대하는 게 없다. 현실에서는 상대할 자 없는 이기주의자들이 언제나 승승장구하는 법이다.

그들은 상당히 세다. 라이벌이 없다는 데에 그들의 강점이 있다. 낮이면 탐욕으로 양식을 삼고, 밤이면 침상에 잠들 때까지 자신의 그 심술을 얼마나 더 성공적으로 관철시킬까 연구하는 그들의 자만심을 지지하고 좋아한다. (주께서 갚으시리라.)

나는 오히려 적당한 악인들이 선인의 흉내를 내면서 자기모순에 위안을 삼는 꼴을 미워하고 싫어한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고 도움이라는 후한 사람들의 너그러움을 심정적으로 반대한다. 그건 마치 얄밉게도 누릴 건 다 누리고 심판도 면해 보겠다는 얄팍한 태도인 것만 같다. 내가 믿는 신앙에 있어서는 중립도, 적당도 없다. 내가 완벽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는 게 내 믿음이고 추구다.

나는 어울리지 않는 부탁을 받았다. 걱정이 됐다. 할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기로 했다. 날마다 뉴스에 SNS에 유명을 드러내는 정의의 활동가들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내 생각에는 그들이라면 바로 이런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할 거라 믿었다.

무리한 도움을 바란 것도 아니다. 그저 공유와 더불어 한마디 코멘트면 족했다. 그들을 추종하는 수많은 '좋아요'들을 보게 될 것이고 평소와 같이 '좋아요' 수를 늘려줄 게 아닌가. 그러면 나야말로 적당히 책임을 벗을 수 있을 것이다.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연대를 표명하며 기사를 공유해 주신 분은 딱 한 분. (페친들은 내 타임라인을 따라 내려가면 그분이 누구인지 곧 알게 될 것이다.) 그 외에는 없었다. 안다. 그들이 얼마나 바쁜 꿀벌들인지. 벌꿀들을 모으느라 얼마나 분주하게 날아다녀야 하는지.

그들 가운데는 날마다 광장에서 청년의 희망을 온몸으로 세상에 시연하며 일기를 쓰듯 꼼꼼하게 자신의 활동을 사진과 함께 업로드하는 청년 운동가들도 있었다. 안다. 내가 빈정이 상했다는 것을. 이런 게 아마도 젊음에 대한 질투 내지는 무력한 꼰대가 되어가는 설움, 혹은 노여움일 터이다.

나는 새삼 나의 순진무구와 어리석음에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쟤들도 정치를 하는구나", "누이야 장하고나" 같은 좀 노골적인 풍자의 글을 써볼까 하다 진짜 꼰대가 되는 건가 싶어 관두었다. 하지만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결국 한사람을 구하는 일이나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를 만들어 내는 일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양심의 즉답을 미루어 둔 채 얻어 내야 할 더 크고 대단한 대의란 없다. 인간이란 이 유일한 시간대 위에서 유일한 기회를 살 뿐이지 않은가. 모두가 그렇게 산다면 그것이 오히려 가장 빠른 세상의 변혁이 아닌가.

설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즉각적 응답이 아니라면 광장의 퍼포먼스나 승화된 예술이나 다 같은 바리새적 말놀이에 불과해지는 게 아닐까. 대기가 희박한 성층권 높이 날아가 버린 인문학 담론이나 교회의 설교나 무엇이 다른가? 그 사이 죽을 사람은 죽고 묻힐 것은 묻히고 희생자들은 다시 희생된다.

악인들은 저렇게 어디서나 일상 속에 강고하게 연대하는데 우리들은 그렇지 못하다. 잘난 게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그런 너무 먼 당신들의 도움과 연대가 저 경찰이나 회사나 교회나 혹은 정부의 기계적인 중립의 제스처와 다를 게 무엇인가?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황송하게도 국민의당인지 국민회의인지 하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받기도 했다. 그들은 이미 알려진 기사조차 읽지 않은 채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그 모든 전말을 다시 설명해 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뿐이다.

지금까지 여러 방송에 보도가 되었고 기사도 나왔다. 경찰도 약간 태도가 바뀐 걸로 듣고 있다. 그러나 회사는 여전하다. 제도가 된 거짓을 순수한 처음으로 돌이키긴 그만큼 어려울 것이다. 혹은 그들이 관례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제도적 비호가 여전히 든든한지 모르겠다.

가령 몽고간장이나 무학소주 보다는 ㄱ택배가 더 센 걸지도. 한 청년의 죽음 앞에서, 그래도 대기업인데, 비열하고 졸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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