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천 여중생 사망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 부모 A 씨와 B 씨, 이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나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경기도에 있는 한 신학교를 다녔다. 나는 공부 욕심이 많았다. 하루 8시간씩 도서관에 앉아 공부했다. 유학을 꿈꿨다. 주변 사람들은 유복하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내가 뭔가를 이루어내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한다고 생각했다.

1990년대 말, 긴 공부를 마치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러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나는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10년 가까이 체류했다. 독일에는 한국인 유학생이 제법 있었다. 이들은 나를 운동 좋아하는 쾌활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유학생들 가족끼리 교류도 잦았다. 동료들은 나를 자녀들에게 다정다감하지 않고 무뚝뚝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아들은 독일에서 축구를 배웠다. 주위 사람들은 아들이 축구에 재능이 있다는 말을 많이 했다. 두 딸은 엄마를 닮아 순하다고 했다.

독일로 유학간 지 몇 년이 지났을 때,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한 번 발병해 치료했던 암이 재발, 다른 곳으로 전이된 것이다. 타국에서 아내의 장례를 치뤘다. 나는 아들과 두 딸을 데리고 얼마 뒤 한국으로 귀국했다.

모교로 돌아왔다. 여기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30이 훌쩍 넘은 나이에 나와 결혼했다. 나는 재혼이고 아내는 초혼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자녀가 셋이나 있는 나와, 결혼 생활이 처음인 지금의 아내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놀라워했다.

생활고는 삶에 큰 짐이 됐다. 나는 모교에서 헬라어를 가르쳤다. 이름만 겸임교수였지 시간강사와 다를 바 하나 없었다. 한 학기에 한 과목, 많아야 세 과목 정도를 가르쳤다. 주말에는 송내역 인근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나는 안정된 삶을 보장받는 '정교수'가 되고자 여러 차례 지원서를 냈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가끔 지인들에게 이런 사정을 말하기도 했다. 그들은 생활고 때문에 내가 교수직에 연연한다고 생각했다. 마냥 틀린 말은 아니었다.

큰아들은 몇 년 전 가출했다. 작은 딸은 독일 유학 시절 친했던 지인 집으로 보냈다. 우리 부부는 막내와 함께 살았다.

[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위 내용은 '부천 여중생 사망 사건' 가해자로 지목된 A 씨 부부 이야기를 지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번 일을 겪으며 받은 충격이 크다고 했다. 10년 넘게 그를 곁에서 봐 온 동료 신학자들은 그가 보인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밤잠을 설쳤다고 했다. 이들은 A 씨의 평소 성향으로 미루어 보아, "주님이 살려 줄 거란 믿음에 시신을 방치했다"는 그의 진술을 전혀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조선일보>와 몇몇 교계 매체는 A 씨 실명을 공개했다. 언론들은 A 씨와 재혼한 B 씨의 가정사를 밝히고, 앞에 [단독]을 붙여 B 씨의 친척을 인터뷰하는 등 취재 경쟁에 열을 올렸다. A 씨 페이스북에 공개된 자녀들 사진까지 유포했다. 포털사이트 뉴스란에 '부천 여중생'이라는 검색어로 지난 4일간 올라온 기사는 1,100건이 넘었다.

경찰은 언론에 피해자 C 양의 오빠와 언니, C 양의 친구 D 양에 대한 인터뷰 자제를 두 차례나 요청했다. C 양 가족과 지인들이 매우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들에 대한 상담과 보호 지원 활동을 이어 나갈 것이라고 했다.

A 씨 모교는 교수들에게 인터뷰 자제령을 내렸다. 기자는 A 씨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자, 취재원에게 A 씨 선배를 연결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취재원이 그에게 연락해 자초지종을 설명했으나, 수화기 너머에서는 "기자들은 다 똑같아"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지인들은 이번 일로 남은 아이들이 받을 충격을 우려하고 있다. 한 사이코패스가 저지른 엽기적인 행위로 보기보다 남은 아이들을 걱정했다. 동문과 일부 교수는 A 씨 남은 아들과 딸을 위해 모금하고 있다.

A 씨와 B 씨 부부는 5일 오전 이뤄진 현장검증에서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부부는 이날 구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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