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난번 글을 통해 우종학 교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였습니다. 물론 우종학 교수 개인이 추구하는 학문적 연구 결과를 지지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종학 교수 주장의 본질은 ①현대 학문의 성과를 인정해야 하고, ②근대 이후의 질적인 사회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며, ③합리적 사고가 기독교 신앙과 배척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도 이에 동의하기 때문에 지난번 글에서는 인문학적 관점, 역사학적 관점에서 굳이 지지 선언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늘에 물덩이가 있었다는 것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생각

우종학 교수를 지지한다는 것은 반대로 한국교회 내에 있는 문자주의, 근본주의, 반지성주의를 반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교회에 이런 것조차 있는지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목회자 설교 몇 마디, 가끔 고민될 때 물어보면 돌아오는 뻔한 논지의 말 외에 무엇이 교회에 있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왜 카인이 가족을 떠날 때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 두렵다고 했는지에 대해 물어보면, 아담 가족이 아이를 더 많이 낳았는데 성경에 적혀 있지 않다거나, 850년 이상 살았기 때문에 많은 자녀를 낳아 사람들이 번성했을 것이라는 경우의 수를 제시할 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더 있었을 것이다"는 말은 편의에 따른 비논리에 불과합니다. 고대사회에서 인간의 평균 수명은 극히 낮을뿐더러 세계 인구가 정체를 벗어난 것은 다산(多産)이 아니라 문명의 발전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따져 물으면 노아 홍수 이전에는 하늘에 물이 가득 차 있어서 생육과 번성의 수준이 달랐다고 말할 것입니다. (창조과학이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그런 식의 세계관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신화적 세계관이 아닌가 되물으면 믿음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몰아붙이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문자주의나 근본주의, 반지성주의라 규정하기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 문서는 모세오경뿐?

우종학 교수식의 주장을 배척하는 것은 사실 '창조과학' 때문만은 아닙니다. 창조과학의 배경에는 신학이 있습니다. 이는 문자주의, 근본주의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기독인들은 성경 66권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쓰인 문서로 보는데, 영감의 범위와 방식을 두고 여러 입장으로 나뉘어집니다. 문자주의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고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분명 성경 내용과 문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하고 섬세한 감독하에 쓰였습니다. 한국교회 문화에서는 이를 하나님의 구체적인 지도로 한 문장, 한 문장 하나님이 부르시는 대로 써 나갔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 성경 구절 하나를 인용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 문제는 디모데 후서에 나오는 이 '성경'은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66권짜리 성경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세오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오경을 성경으로 인정하고 사용했으니까요.

신구약은 정경화 과정을 거친 문서입니다. 얌니아 회의, 카르타고 회의 등을 통해 여러 문서 중에 성경에 포함될 문서들을 구분하고 확정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지요. 구약은 유대교 학자들에 의해 정경이 주도되었고, 사실상 역본의 차이가 있을 뿐 기독교 역시 유대교 학자들의 결정 사항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시작부터 오류가 발생합니다. 성경에서 말한 성경이 그 성경이 아니고, 오늘 우리가 쓰는 성경은 회의를 통해 확정되었다? 약간 당황스럽지만 간단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이 과정을 하나님이 주도하셨다고 말하면 그만입니다. 과연 그만일까요?

모세오경은 모세 혼자 쓰지 않았다

범위를 줄여서 이야기를 해 봅시다. 고린도후서의 말마따나 모세오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문서라면 모세가 직접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5개 경전을 썼다는 말인가요? 모세오경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5개 경전을 누군가 혼자 썼다고 인정할 수 없는 다양한 흔적들이 발견됩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는 연거푸 창조가 이루어지는데, 그 방식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두 번이나 여동생으로 속이고 똑같은 방식으로 곤란에서 벗어납니다. 이 이야기는 극히 어색할뿐더러 당시 사라의 나이를 고려하면 가당치도 않은 스토리입니다. 다른 문헌에 비해 모세오경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천사를 의인화하여 표현합니다. 사람처럼 찾아오고, 대화도 나누는데 나머지 경전에서는 찾기 힘든 상당히 신화적인 표현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라고 복수형으로 표현하기도 됩니다. 도무지 해석하기 힘든 구절도 곳곳에 보입니다. 네피림 이야기도 그렇고, 모세가 천사에 의해 죽임을 당할 뻔하는 구절 역시 그렇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한 정답을 이미 배웠습니다. 네피림에 대한 해석도 들었을 것이고, 복수형은 강조형이라고도 배웠고, 나머지 이야기들도 그럭저럭 넘어갈 수준으로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믿음이 부족하거나 자유주의적인 태도라고 겁박하는 소리도 들었을지 모릅니다.

사실 무조건 믿는다는 전제가 없이 이 문제들을 차분히 생각한다면 이런 해석에는 한계가 명확합니다. 조선시대 문자도 모르는 민중들에게 삼신할미 이야기를 해 주는 것하고 별반 다를 바 없는 수준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강조하는 거 같기도 합니다.

이런 엉성한 해설이 모두 맞다고 가정해도 피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정답도 '해석'된 것이며, 그것 역시 '신학'을 통해 걸러진 내용이라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해석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해석만이 옳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못하거나 문제의식이 생겨도 대놓고 반박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학은 그들만의 영역이고 여타 '다른 해석'의 자율성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접해 보지도 못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공포감도 심어 놓았고요.

다시 모세오경으로 봅시다. 신학자 벨하우젠이 4문서(JEDP)설을 주장한 이래 연구 결과를 둘러싼 논란은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오경이 단일 저작이 아니라는 점은 신학계에서 상식과 같은 주장입니다. 성경 원문을 분석해 보았을 때 다른 문체와 문학적 경향이 공존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거든요.

여호와(J)라고 하나님을 칭하는 문맥에서 강조되는 하나님의 속성과 엘로힘(E)에서 하나님을 설명하는 방식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모세오경만이 아닙니다. 이사야서 역시 제1이사야~제4이사야까지 나누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같은 문서라 하기에는 뚜렷한 차이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신약도 예외가 아닙니다. 바울서신을 두고도 바울 친서, 바울 위서 논쟁이 있습니다. 바울이 직접 쓴 문서, 바울학파가 쓴 문서로 구분하는 것도 신학계에서는 상식입니다. 영지주의의 대두라든지 교회 형성 과정들을 분석해 보면 바울 사후의 이야기들이 서신서에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가 왜 발생할까요? 성경 형성 과정이 간단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경험이 있었고, 경험을 기억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다시 전승의 과정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기록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기록은 다시 편집이 되었고, 정경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학자 존 브라이트는 모세가 최대 3,000명 정도를 이끌고 출애굽했다고 본인의 저서인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주장을 합니다. 남자만 60만 명이라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60만이라는 숫자는 다윗 왕조 전성기 때의 인구입니다. 다윗 시대 흔적들이 성경 전체에 뿌려졌다는 것이죠. 학계는 시편이 다윗 개인의 저작이 아니라 다윗 시대의 저작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과격한 해석처럼 보이나요? 과격하거나 불경하게 느끼는 것은 본인의 '근본주의'적인 태도 때문입니다.

실제로 과격한 신학 해석이 서구의 근대화 과정 중에 여러 신학자에게서 제시된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연구하고 해석할 것인지 역사 비평적 접근, 편집 비평적 접근 등 복잡다단한 성경 해석과 연구의 역사가 있어 왔습니다. 오랫동안 성경을 분해하고 파편화하는 신학적 경향을 반대하며 브레버드 차일즈 같은 신학자는 성서신학을 수용하되 정경화한 관점을 강조하기도 했고요.

복음주의 신학자들 역시 이런 신학적 경향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충분히 자신의 신학적 주장을 가다듬는 데 이런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고요. 다만 신학이라는 범주, 신학교라는 범주로 제한하거나 온갖 복잡다단한 신학적 발전과 연구 수준의 고도화를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매도하고 배척해 교인들이 잘 모를 뿐입니다.

성경이 성경인 이유, 다시 생각해 봐야

냉정히 따져 봅시다. 문학 하나를 읽어도 시대적 배경, 작가가 받은 영향, 작가의 세계관을 따지면서 감상을 합니다. 중학생만 되어도 기초적인 문학비평을 배우고 비평적 관점에서 작품을 대하는 방식은 전혀 낯선 방법이 아닙니다. 성경이 하나님에 의해 일일이, 혹은 영감으로 쓰인 문서라는 말은 성경이 그만큼 신빙성이 떨어지는 사이비 문서라는 말과 차이가 없습니다. 오랜 역사적 과정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역사적 경험, 지적 고뇌와 의지적 도전이 뒤엉켜 있는 문서가 신비롭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근본도 모르는 곳에서 뚝 떨어진 문서가 성스러운 경전일 수 있겠습니까.

동양철학계에서는 노자의 역사적 실존을 의심하고, 도덕경 단일 저작설을 부인하는 형편입니다. 장자 개인보다는 장자학파라는 관점에서 연구 합니다. 노자와 장자에 대해서도 노자 학파, 장자 학파로 나누어서 그 차이점을 분석하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연구하는 것이 노자의 사상과 장자의 사상을 우그러뜨리고 그 가치를 폄하하는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조선 후기나 청 말기로 가면 유학자들 내에서 성리학을 배격하며 다양한 흐름이 나옵니다. 선진 유가로 돌아가자는 흐름, 이(理)보다는 기(氣)를 중시하는 연구 결과, 서학의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와 유사한 논리 구조를 가진 새로운 유학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황종희, 대진, 정약용, 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 등이 그들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거나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다고 황종희가 유학자가 아니고, 정약용이 이단 사이비인가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든지, 성경을 해석하는 특정한 방식만을 '성경적'이라 주장하는 것은 정상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루터나 칼뱅도 다르게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하였습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는데는 문제도 많을뿐더러 복음을 증언하는 데 효과적이거나 유익하지도 않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경향성으로 가톨릭은 성경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합니다. 우의적 해석 방법인데,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문자적 의미보다 그 이면을 성찰하는 방식입니다.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칼뱅 역시 모형론적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의 요체라서 성경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중요한 사실인 이것이 하나의 해석 방식임을 그들 스스로 인정하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교부철학자와 함께 '철학적 신학'의 길을 열었던 인물입니다. 플라톤 사상, 특히 플로티노스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철학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하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세 전성기, 아리스토텔레스 저작물이 유입되면서 신학은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안셀무스에서 아퀴나스를 지나 스콜라철학이라는 새로운 신학적 경향이 발생한 후, 오컴 등을 거치면서 다시 변형되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의 영향은 기본이고, 스콜라철학 특유의 사고방식이 구체화되면서 교부철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아퀴나스에 의해 체계화된 조직신학 구조가 개신교 개혁신학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아무 상관 없고, 가톨릭을 이단 종교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보기에는 경악스러울지 모르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가톨릭 대표 신학자이며, 루터와 칼뱅은 아우구스티누스 영향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알레고리와 모형론, 아퀴나스 조직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의 구조는 상당히 유사하며 영향을 많아 받았으니까요.

종교개혁기 당시에는 어떠했을까요? 종교개혁은 어느 날 툭 떨어진 루터의 내적 각성이 아닙니다. 르네상스 시기부터 시작된 헬라 유산 탐독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고,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 등이 주도하여 만든 히브리-헬라 성경에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성 히에로니무스가 "세례를 받으라"고 오역한 것의 원뜻이 "회개하라"였다고 밝혀낸 것이 바로 이때입니다. 불가타 판본, 즉 한 종의 라틴어 성경만 보던 것이 중세였는데, 더 확실한 권위를 가진 히브리-헬라 번역본은 종교개혁 신학에 막강한 권위를 부여하였습니다. 물론 루터의 경우, 자신의 신학적 주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을 재해석하게 되면서 가톨릭 신학자들과 격렬한 신학적 공방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해석하였고, 재해석하였고, 당대의 첨단 학문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시 복음을 변증하였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역사이고 신앙 역사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결코 반지성적인 태도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성이라는 빛을 잘 활용하여 새롭게 밝혀진 학문적 성과를 해석하고, 활용해야만 하는 시대적 상황 가운데 내던져 있을 뿐입니다.

교회와 신학이 변해야 할 때

하나님께서 진화를 창조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는 우종학 교수 주장이 완전한 주장은 아닐 것입니다. 바뀔 수도 있고요. 하지만 진화에 대한 심각한 거부감은 기실 교회사 전체를 본다면 그다지 대단한 주제가 아닙니다. 코페르니쿠스나 케플러는 천문학 연구를 통해 천동설을 부수었던 천주교 신부들입니다. 당시 루터와 칼뱅은 이를 비판했고 비웃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동설을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신앙적 거부감이 없습니다.

진화론에 대한 반감은 사실 근대 학문의 발전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발생된 퇴행적인 신앙과 문화 관습 때문입니다. 17세기에는 과학혁명이 이루어졌습니다. 18세기 후반에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 일어납니다. 19세기로 들어오면서 실증주의의 등장, 여러 학문 사조의 등장, 역사학, 정치경제학, 사회과학 등이 본격적으로 발전하였고 20세기에는 이데올로기가 세상을 뒤집었습니다.

이 복잡다단한 변화 가운데 교회와 신앙 그리고 신학은 하나님 뜻을 찾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고, 실패와 오류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의 무오성(오류가 없다)을 강조하는 문자주의나 근대학문의 성과를 배척하는 근본주의는 이러한 근대 역사의 발전 가운데 나온 하나의 '경향'에 불과합니다. 복음의 근본성을 수호하려고 했다는 시대적 가치가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고, 세속화한 시대에서 교회와 신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척박한 한민족의 20세기 현대사에 뿌리내리는 과정 중에 신학은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역사는 계속 발전하였고 한국의 사회 수준도 놀랍도록 발전하였습니다. 평신도들이라고 하지만 학자, 교수 등 엘리트가 넘쳤고 우종학 교수 역시 뛰어난 학문적 능력을 가진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들의 솔직하고 담대한 주장은 복음의 본질을 해치지도 않을 것이고, 교회는 더욱 풍성하고 설득력 있게 만들 것입니다. 괜한 억지를 부리며 과거에 천착하고 어울리지 않는 옷을 고집하면서 변화를 부정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 고집스러운 한국교회의 보수성으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팎에서 다른 사고를 하고,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분리하며 교회를 떠나가고 있습니다. 우종학 교수가 아닌 교회가 신학이 변화해야 할 때입니다.

심용환 / 역사 강사, 깊은계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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