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해 아래 새것이 없다"(전 1:9)는 성경 구절처럼, 새로운 관점에서 뭔가를 창작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성서'라는 제한된 텍스트와 역사적 사실들을 놓고 연구하는 성서학의 경우, 결과물이 엇비슷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기원전 몇 년에 앗수르 침공이 있었다느니, 기원후 몇 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느니 하는 걸 썼다고 표절 시비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같은 내용이라도 표현하는 방식이 어떤가, 중복되는 분량이 얼마나 되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적 특수성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다. 이를 놓고 '신학 서적 표절 반대' 운동 진영과 표절 논란에 휘말린 신학자들 사이에 몇 가지 쟁점이 있다.

표절 논란 연루된 이들의 항변

표절 논란에 휘말렸던 신학자들의 항변 중 하나는 목회자나 평신도를 위해 쓰는 책의 경우, 각주를 최대한 빼라는 편집 원칙에 따라 저술했기에 문제없다는 것이다.

백석대학교 연구윤리위원회는 지난해 12월 송병현 교수의 저작 <엑스포지멘터리> 시리즈에 대해 문제없다는 결론을 냈다. 백석대는 공문에서 "예비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현장 목회자들을 위한 성경 해설서이므로, 엄격한 학문적 논의에 적용된 표절 원칙에 의거하여 표절 여부를 심사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사료돼 표절물에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판정했다"고 밝혔다.

왕대일(감신대)·천사무엘(한남대)·김경진(백석대)·이희학(목원대) 교수는 1월 14일 성명을 내고 "대한기독교서회가 목회자와 평신도를 위한 주석을 만들겠다며 각주를 최소화하라는 편집 지침을 줬다. 이에 따라 작업하다 보니 논란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차정식 교수(한일장신대)는 올해 초 불거진 표절 논란에 대한 해명 글에서 "이 세상에 나오는 책이 모두 학술 연구서가 아니고 교양서와 교과서, 또 애매모호한 주석서 장르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을진대, 한 가지 글쓰기 기준으로 모든 신학책을 한통속으로 규정하는 것은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 2015년 한 해 동안 <엑스포지멘터리>, <어떻게 읽을 것인가>, 대한기독교서회 성서 주석 시리즈 등 다량의 신학 서적이 표절 논란에 휩싸였다.

해외에도 각주 없는 주석 있다

"목회자, 평신도를 위한 주석이면 각주를 엄격하게 달지 않아도 된다"는 명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뉴스앤조이>는 7명의 신학자에게 입장을 물었다.

이들은 이 명제 자체는 맞다고 했다. 해외라고 무조건 각주를 덕지덕지 붙여서 책을 내놓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A 교수는 학문적 주석과 평신도용 주석이 확연히 구분돼 있는 독일 사례를 들었다. 가톨릭-개신교 학자들이 공동 집필한 EKK(Evangelisch-Katholischer Kommentar) 주석 시리즈는 학문적 주석의 대표로 꼽힌다. 신약 한 권당 주석 분량이 1,000페이지가 넘는다. 수많은 각주를 달아 출처와 다양한 의견을 다루고 있다.

반면 ATD·NTD(Das Alte⋅Neue Testament Deutsch) 주석 시리즈처럼 각주를 달지 않은 평이한 주석도 있다고 했다. B 교수는 미국의 Interpretation 주석 시리즈도 목회자와 평신도를 위해 각주 없이 나온 사례라고 했다. 미국 에모리대학 루크 티머시 존슨(Luke Timothy Johnson) 교수가 쓴 <The Writings of the New Testament>의 경우도 구체적인 인용 표기가 없다고 지적한 사람도 있다.

한국도 학술용 서적과 목회자·평신도 주석을 구분하려는 시도가 계속돼 왔다. 성서유니온이 낸 <어떻게 읽을 것인가> 시리즈도 기획 단계에서부터 각주를 달지 말자는 논의가 있었다. 두란노에서 나온 <HOW>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한 교수는 구체적으로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교단이나 대학이 중심이 돼 출판한 주석들도 학문적 논의보다는 목회자를 위해 각주를 최대한 빼고 쓴 경우가 많다고 했다.

최근 문제가 계속 제기되는 대한기독교서회 성서 주석 시리즈도 이 관점으로 봐야 할까. 대한기독교서회는 지난해 말 홈페이지를 통해 이 주석이 목회자와 평신도를 위한 주석이라고 했다. 주석 집필에 참여한 D 교수는 "대한기독교서회 주석 시리즈의 경우, 한국 독자들이 주가 많으면 어려워할 수 있으니 상세한 주는 제외하자는 긍정적인 취지로 시작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한국 상황, 특수성 존재한다

여러 사례가 보여 주듯, '성서학'이라는 분야의 특수성과 '주석'이라는 특수성, '목회자와 평신도를 위한'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각주 안 달고 책을 쓸 수 있다. 그런데 각주를 달지 말라는 얘기가 표절하라는 말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참고한 문장들에 대해서는 출처를 밝히든지 자기 관점에서 새롭게 소화해 써내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한국적 특수성'이다. 여러 신학자들은 표절 시비가 불거진 지난해부터 "우리나라는 2000년 중반 황우석 박사의 표절 사태가 불거지기 전까지 이 논란에 무감각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신학계는 이러한 관행이 더 심했다고 봤다. 과학이나 인문학 분야처럼 전문가가 많지 않아서 누가 무슨 글을 가져와도 걸릴 위험이 낮았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보따리 수입상' 시대도 엄연히 존재했다면서, "외국 학자의 글을 번역해 소개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했다. 국내의 이런 관행에서 내 것과 남의 것을 엄격히 구분해 글을 쓴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대한기독교서회 주석을 쓴 D 교수는 자기 생각으로 양심껏 글을 쓴다는 건 굉장히 힘든 문제라고 했다. "누구의 주장이나 아이디어를 인용하기 전에 이것이 왜 옳고 틀린지 심사숙고하다 보면 주석 쓰기는 굉장히 오래 걸린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4~5년 이상 걸린다는 것이다.

남의 글 통째로 가져오고 정당하다고?

"치킨을 먹고 나면 양념 치킨을 먹었는지 후라이드 치킨을 먹었는지 모르게 하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주석 쓰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 신학자들은 이번 표절 논란에 대해 "자기 말로 소화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표절 논란을 피해가기 어렵다는 말이다. 한 문장도 아니고 여러 문단 단위를 그대로 가져온 건 문제가 있다고 했다. 가져오는 과정에서 원서의 흔적이 보이는, '자기 말로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문장들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해외의 경우처럼 평이하고 각주 없는 주석을 쓰기는 해야겠는데, 한국적 상황 논리에 입각해 주석을 쓰다 보니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해외에서는 다 각주 철저히 달고, 표절에 대해 엄격하게 가르침 받은 사람들이다. 왜 한국에만 들어오면 느슨해지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짧은 시간 안에 주석을 완성하라고 요구한 출판사의 태도도 문제다. 차정식 교수의 경우 <로마서> 1, 2권을 쓰는 데 1년이 걸렸다고 밝혔다. 통상 주석 한 권당 4~5년 정도를 들여야 좋은 책이 나온다. 촉박한 기간 안에 많은 분량을 요구하다 보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뉴스앤조이>가 취재한 주석 저자 중에는 1년 안에 집필 완성을 요구받아 집필 요청을 거절한 사람도 있었다.

신학자 7명은 논란이 된 사람들에 대해 "남의 글을 통째로 가지고 온 걸 정당화할 수는 없다", "지적해 줘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앞으로 잘하겠다고 해도 되지 않는가", "어느 부분은 누구 글에서 가져왔다는 최소한의 정보라도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 표절 반대 운동을 '아마추어들의 교수 흠집 내기'로 바라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 문제는 이런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이 이해 당사자인 경우가 많으며, 표절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의 지식 수준이 '비전문가' 취급할 정도로 낮지 않다는 데 있다.

한 교수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책 쓸 당시가 기억 안 난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수년에 걸쳐 한 문장 한 문장 고통스럽게, 성의 있게 썼다면 기억을 못 할 수가 없다. 대가의 글이라고 의심 없이 가져다 쓰고, 스스로 그 맥락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채로 쓴 것이라면 생명력이 없는 책이 될 수밖에 없다."

아마추어의 반란

표절 반대 운동이 넘어야 할 또 다른 산이 있다. 대학이나 교수들은 표절 반대 운동 진영의 공신력을 의심한다. 아마추어들의 교수 흠집 내기로 치부하거나, 박사 학위도 없으면서 무슨 문제를 제기하냐는 식이다.

대학이나 학회에서 표절 문제를 처리해야지, '비전문가'의 성급한 문제 제기로 신학자들을 낙인찍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신학 서적 표절 반대 운동을 지지하는 교수들도 동료 교수 문제에 공개적으로 의견 내는 것을 꺼리는 상황이다. "박사 학위 없으면 표절 분석도 못하냐"는 자조 섞인 농담도 나온다.

그러나 E 교수는 문제 제기하는 사람들의 수준이 낮은 것도 아니고, 공부를 안 한 사람도 아니라며 이들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F 교수도 "아마추어 운운하지만 그분들 중에는 신학자들보다 더 수준 높아 보이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취재에 응한 신학자들 중 일부는 동료 교수들이 나서서 '문제없다'고 한 김지찬 교수와 대학으로부터 '표절 판정을 내릴 분야가 아니다'는 결과를 얻어낸 송병현 교수의 사례를 보며, 조직 방어 논리가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표절을 판정하는 학계도 이해 당사자다 보니 결국 제 식구 감싸기가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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