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우리 교회의 새로운 일꾼들을 세우는 임직식을 준비하면서 적지 않은 논란이 임직 대상자들 사이에서 일어났었다. 논란의 핵심은 임직을 감사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헌금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동안 우리 교회는 한국교회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장로는 얼마, 권사는 얼마, 집사는 얼마 이렇게 정해서 감사 헌금을 걷었다. 거둔 돈으로 교회에 필요한 물품을 임직 기념으로 구매하여 헌물해 왔다. 이번 임직자 중에도 다수가 그렇게 하자고 했다.

하지만 젊은 집사님들을 중심으로 몇몇 분들은 이러한 계획에 반대했다. 소위 '7무 임직식'이 실린 기사를 보여 주면서 우리 교회도 그렇게 하자고 제안했다. 7무 임직식이란 임직 헌금도 없고, 축하 화환도 없고, 임직자들을 축하하는 축하금 봉투도 없고, 꽃다발도 없고, 임직패도 없고, 장로가운도 없고, 한복도 입지 않고서 하는 것을 말한다. 임직하는 것이 마치 돈을 주고서 그 직분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야 되겠느냐면서 정말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냥 자원하는 마음으로 각자 그 마음에 정한 대로 감사 헌금을 드리며 되는 것이지, 일괄적으로 금액을 정해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강하게 개진되었다.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일부는 감정이 격앙되기도 했던 모양이다.

이런 사안은 일체 내가 관여하지 않았던 문제였다. 교회에서 그 누구도 임직자들에게 감사 헌금을 거두어서 물품을 하거나 특별 헌금을 하라고 공식적으로 요구하지 않았지만, 전통의 힘은 강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자체적으로 논의하게 된 것이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제출되었다. 전통의 장점은 분명히 있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다른 방법이 아니라 그런 방법을 선택한 것은 그만큼 그런 전통이 장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전통을 선호했다. 각자 알아서 감사 헌금을 하라고 하면 오히려 더 부담스럽다는 게 이유였다. 차라리 정해지면 힘들더라도 임직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에 최선을 다해 보고 싶다고 했다. 반대로 몇몇 분들은 헌금은 자원하는 게 원칙인데 단체로 정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 있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임직자들 모두가 내 입에 주목하게 되었다. 과연 담임목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비교적 개혁적인 이미지를 가진 담임목사는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각 임직자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제안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문제는 임직자들이 알아서 자체적으로 결정하면 될 것이다. 헌금은 누가 강요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임직자들이 회의를 통해서 결정하면 좋겠다는 것이 첫 번째 대답이었다. 스스로 알아서 자유롭게 헌금하도록 한다면 그것도 좋고, 전통처럼 기준을 정해서 십시일반 모아서 특별 헌금을 하거나 교회에 필요한 물품을 헌납하는 것도 좋다고 했다. 둘째, 임직자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임직하는 헌금 때문에 마음이 상하거나 부담스러워서 임직하는 것을 감사로 여기기보다는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따라서 만일 임직 헌금의 액수를 정해서 거두기로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결정에 따르지 않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밝혀져서도 안 되고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는 일들이 피차 없어야 한다고 했다.

셋째, 어떤 식으로 하든지 적어도 임직식을 7무로 가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임직 헌금도 없고, 축하 화환도 없고, 임직자들을 축하하는 축하금 봉투도 없고, 꽃다발도 없고, 임직패도 없고, 장로 가운도 없고, 한복도 입지 않은 채 임직식을 하겠다는 발상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게까지 하게 된 데에는 그동안 우리 한국교회 내에서 임직식이 돈 잔치가 되어 버렸고, 재정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임직을 포기하는 일까지 발생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따라서 7무 임직식이 우리들에게 신선하게 들린다. 하지만 과연 7무 임직식이 답일까?

적당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결혼을 준비하다 보면 마음이 상할 때가 많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하나의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결혼을 하는 것인데, 이것이 결혼식이 될 때에는 문제가 복잡해진다. 결혼식을 위해서 손님을 초대하고 또 아름답고 멋진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값비싼 임대료를 지불해 가면서 예식장을 예약해야 하고 뷔페 식사를 준비한다. 하객들은 결혼식 자체에는 그리 큰 관심 없이 축의금만 접수하고선 곧장 식당으로 향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결혼식에 참석했다는 눈도장일 뿐이다. 두 사람의 결혼을 위해서 양가에서는 일종의 신경전이 일어난다. 어떤 아파트를 준비하고 그 안에 가구들은 어떤 것들로 채울 것인가로 신경을 쓴다. 그러다가 예물 문제로 결혼이 파탄이 나는 경우도 흔하다. 두 사람이 그냥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다이아몬드 반지를 예물로 교환하지 않고 그냥 서로 사랑한다 말하며 살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아예 결혼식을 없애 버리면 어떨까? 그냥 혼인신고만 하면 되지 않겠는가? 허례허식에 쓸 돈으로 살림살이를 하나 더 마련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결혼식을 준비할 때 이런저런 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되면 생각나는 질문들이다.

특히 절약을 최고의 가치 중 하나로 생각하는 한국 사람들은 필수적인 의식주가 아니면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교회 강단에 꽃 장식을 하는 것은 사치라 생각하고 강단에서 꽃을 없애 버린 지 오래다. 그 돈으로 차라리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훨씬 더 멋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탄절이 되어도 교회 안팎으로 성탄절 장식을 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고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임직식도 이런저런 경비들을 다 줄여 버리고 아주 간단하게 하는 것이 매력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예전에 내가 시무하던 교회의 어떤 성도님은 그런 사고방식으로 무장한 분이셨다. 그분은 사업도 그런 식으로 하셨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끼고 또 아꼈다. 무더운 날씨에도 에어컨을 켜지 않았다. 앞뒷문 열어 놓으면 바람이 들어오는데 굳이 비싼 전기를 쓸 필요가 없다는 게 그분의 생각이었다. 그분은 모든 사업에 필요한 물품들을 함부로 버리는 경우는 없었다. 사용하고 난 뒤에 또 사용하고 또 사용했다. 간판은 허름했지만 그걸 바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실내의 전등도 웬만하면 켜지 않았다. 그렇게 아끼고 아껴서 그나마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하지만 그분의 사업은 언제나 지지부진했다.

그런데 또 다른 어떤 성도님이 있었다. 그분은 정반대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일단 그분은 아주 좋고 값비싼 차를 탔다. 사업장에는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놓아서 들어오는 손님들이 쾌적한 느낌을 받게 했고, 사업장의 전등은 항상 밝혀 놓았는데, 사업장의 문을 열지 않는 밤 시간에도 항상 밝혀 두었다. 모든 물품들은 새것으로 사용했고, 때에 따라 아름다운 꽃 장식으로 사업장을 장식했다. 그러는데 경비가 많이 들어가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의 대답은 놀라웠다. 유대인들의 경영 방식이 바로 이런 식이란다. 어차피 세금으로 내야 하는 만큼을 사업장을 더 좋게 만드는데 사용하기 때문에 손해가 아닐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이렇게 해서 손님들이 더 많아진다면 더욱 좋은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투자가 없이 사업의 성공은 없는 것이고, 아끼면 아낄수록 사업이 망해 가겠지만 과감하게 쓰면 쓸수록 더 사업은 번창하는 것이라고 했다. 모든 사업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해서 그분은 성공하고 있었다.

선교 기관이나 자선 기관을 운영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분들은 선교 기금이나 자선 기금이 들어오게 되면 일정 부분은 선교 기금과 자선 기금을 모금하는 캠페인비로 사용한다고 했다. 기관에 따라 다르지만 상당히 많은 액수를 모금 캠페인에 쓴다. 아주 멋진 브로슈어도 만들고 동영상도 제작하고 TV 광고나 신문 광고에도 어마어마한 분량의 돈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 액수가 너무나도 큰 것을 알고 내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이렇게 많은 돈을 직접 선교하거나 자선을 베푸는데 사용하지 않고 이런 곳에 사용하는 게 정당합니까? 그랬더니 그분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렇게 하면 더 많은 후원금이 들어와서 더 많은 곳에 선교를 하고 자선을 베풀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점점 후원금이 줄어들어 기존에 하고 있던 후원마저도 중단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내가 미국에 갔을 때 참 아름답게 보였던 것 가운데 하나가 생일을 축하하는 문화였다. 미국에 건너가기 전까지 나는 나의 생일에 축하를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 생일이 되어도 생일이 아닌 날과 전혀 다르지 않았었다. 생일날에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거의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미국에 갔더니 생일을 축하하는 문화가 있었다. 우선 생일 축하 카드를 써서 주고 케이크를 준비해서 촛불을 끄면서 노래를 불러 주었다. 때로는 서프라이즈 파티를 열어 생일을 맞이한 사람이 행복해 했다. 갖고 싶어 하는 것을 생일 선물로 주는 건 기본이었다. 그런데 이런 생일 축하를 통해서 정말 마음이 따뜻해지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생일날 서로의 사랑을 표현함으로써 가족 간의 사랑이 깊어지고 행복해 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굳이 가족끼리 무슨 선물이냐며 평생 사랑의 표현을 하지 않고 살아온 나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사랑은 표현해야 사랑이다.

허례허식이라 해서 이것도 없애고 저것도 없애는 것이 능사일까? 물론 부작용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더 좋은 것일까? 그게 아니다. 임직하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고, 교우들은 그들을 축복하며 격려하고 축하해 주는 건 바람직하다. 나는 우리 교회가 그저 절약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아는 교회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보다도 소중한 것을 위해 과감하게 투자하고 돈을 쓸 줄 아는 교회가 되면 좋겠다. 사랑한다면 그 어느 것도 더 소중한 건 없다. 물론 임직식이 성도들로부터 돈을 뜯어 내는 착취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다거나 오로지 돈이 있는 사람들만이 임직할 수 있는 식으로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빈대를 잡겠다고 초가삼간까지 태워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칭찬하고 격려하면서 자라게 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는 재정 지출을 줄이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인건비도 줄이고 이런저런 경비를 줄이고 또 줄여서 안정적인 운영을 가장 좋은 운영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는 잠언 14:4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재정을 지출하지 않으면 재정적인 부담이 그만큼 줄어들겠지만, 재정을 지출함으로써 얻는 것이 많음을 기억해야 한다. 백화점은 정말 쓸데없는 곳에 돈을 많이 쓰는 것 같다. 광고와 내부와 외부의 치장에 어마어마한 돈을 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장사가 더 잘 되기 때문이다. 동네 슈퍼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버는 양도 적다. 적어도 이 세상 사람들의 지혜의 반만큼이라도 우리 성도들이 따라갈 수 있으면 좋겠다. 어느 식당에 이런 문구를 써 놓은 것을 보았다. “아끼면 망한다.” 놀랍게도 우리는 자주 아껴서 망하는 길을 선택한다.

사랑은 희생이다. 희생으로 사랑은 표현되는 것이며, 희생이 없이는 아무런 사랑도 전달되지 않는다. 우리 집에는 화분이 가득하다. 그 화분을 구입하는데 적지 않은 돈을 썼다. 그리고 아내는 그 화분을 가꾸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그 돈을 아끼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그 시간과 노력을 거기에 쏟지 않으면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이 참 많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왜 쓸데없이 그런 화분에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붓고 돈을 쏟아 붓느냐고 질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그 화분을 가꾸고 보면서 얻는 유익이 얼마나 큰가? 정서적 안정과 소소한 기쁨 등등 말로 할 수 없다. 난에서 피어나는 꽃을 보면서, 그리고 그 향기를 맡으면서 느끼는 희열이 있고 그것은 우리 가정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그런데 우리 주변엔 왜 그런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느냐는 비아냥거림이 정답처럼 들릴 때가 많다.

유신시대 정신은 아직도 우리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것 같다. 그때는 한국이 정말 힘들고 어려웠다. 그래서 잘 살아보자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잘 살기 위해서는 허례허식을 버려야 했다. 결혼식도 법으로 간소화해야 했고, 식당의 반찬도 법으로 1식 3찬으로 줄여야 했고, 아이도 두 명에서 한 명으로 줄였다. 모든 것이 경제적인 측면에서 평가되었다. 티끌모아 태산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고, 그 결과 우리는 경제적으로 적지 않은 성장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신시대의 가장 큰 폐해는 경제가 가장 큰 가치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잘 사는 것이란 경제적인 측면에서였을 뿐이다.

지금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다시 결혼식이 화려해지기 시작했다. 각종 이벤트와 장식으로 멋진 결혼식을 하고 있다. 식당에서는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많은 반찬을 내놓는다. 이런 변화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데서부터 나타난 변화다. 적어도 사람들의 마음에 잘 사는 것이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의 향상을 의미한다는 점을 자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은 아이들을 많이 낳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그렇게 많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일 거다.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했던 시절에는 아이들을 7,8명씩 낳아 길렀다. 그리고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며 아끼고 존중하고 도와 가며 사는 가족의 행복은 컸다.

얼마 전에 이제는 무의미한 생명 연장을 위한 치료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뉴스를 들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명 연장이 무의미한 경우라니? 도대체 생명이 의미가 있는 경우도 있고 의미가 없는 경우도 있을까? 무의미한 생명 연장이란 그저 치료비만 많이 들어갈 뿐 다시 일어나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그런 경우를 의미한단 말인가? 생명이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사고로 인하여 식물인간이 어떤 분을 심방한 적이 있다. 그의 어머니는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아들이 깨어나지 않아도 괜찮으니 목숨만이라도 계속 붙어 있어서 내가 그 손이라도 잡아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가 아직은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그 옆에 있을 수만 있는 것이라도 행복하다고 했다. 그런데 무의미한 생명 연장이라니? 이 모든 것이 경제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닌가?

경제적인 차원에서 볼 때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전혀 무가치한 존재들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니 우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가 없어도 하나님에게 경제적으로 손해볼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 아들을 내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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