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한국교회 각 교단의 교세 통계를 보니 보수적인 장로교회가 반수 이상이다. 감리교·침례교·성결교·순복음도 있지만 어느 교단이든 교회 운영 방식은 장로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장로를 인정하지 않는 침례교에도 장로가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형식은 장로교인데 예배·찬양·기도는 또 순복음이다. 대한민국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교회가 그렇다.

사람들은 싫증이 났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도 그렇고 다니는 사람도 그렇다. 장로라는 타이틀에 필요 이상의 권위를 싣는 것도, '믿으면 잘된다', '더욱 세게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축복 세례도 지쳤다. 보통의 모습을 고수하고 있는 교회를 떠나는, 뭔가 다른 교회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 <13인의 기독교 지성, 아나뱁티즘을 말하다> / 리처드 헤이스 외 12명 지음 / 문선주·전남식·이재화 옮김 / 대장간 펴냄 / 240쪽 / 1만 2,000원

재세례파(아나뱁티스트)는 그런 교계 현실에서 주목받고 있는 교회다. 최근 무너지는 한국교회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아나뱁티스트의 평화주의와 급진적 제자도를 소개하고, 그들에 대한 세미나 등을 열고 있다. 그러나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란 한국교회 교인들 중에는, '재세례파'라고 하면 잘 모르거나 아직도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2015년 10월 출간된 <13인의 기독교 지성, 아나뱁티즘을 말하다>(대장간)는 아나뱁티스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 한번쯤 읽어 볼 만한 책이다. 이 책은 15년 전 <메노나이트쿼털리리뷰>(The Mennonite Quarterly Review)에 실린 글을 모아 편집한 것이다. <신약의 윤리적 비전>을 쓴 리처드 헤이스(Richard B Hays), <무례한 기독교>를 쓴 리처드 마우(Richard J. Mouw), <십자가 위의 예수>를 쓴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M. Hauerwas) 등 13인의 저명한 신학자가 참여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들이지만, 이들도 현재 한국교회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다. 침례교·장로교·감리교가 우세한 미국에서 아나뱁티스트는 '급진주의자', '분파주의자'라는 단어로 치부되어 왔다. 리처드 마우의 글에서 이런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다.

"훅스마(Herman Hoeksema)를 공격하기 위해 신학적으로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쓴 수사법은 칼뱅주의 전통에서 일반적인 전술법이 되어 왔다. 개혁주의 내부에서의 논쟁이 더욱 격렬해지면 양쪽 중 한쪽이 수사학적 무기를 들고 칼뱅주의자 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던질 수 있는 최악의 모욕 중 하나로 보이는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아나뱁티스트!'

개혁주의 사상가들은 그동안 아나뱁티스트 사상이 진지한 신학 작업에 있어서 위험하고 무가치하다고 묘사할 정도로 지나치게 예민했다.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 주는 가장 좋은 예로 1561년 벨기에 고백에서 36번 조항을 들 수 있겠다. 거기에서 개혁교회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아나뱁티스트들과 기타 선동적인 사람들을 혐오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고위 권력자들과 행정관들을 거부하고, 정의를 전복시키고, 재산 공유를 도입하고, 하나님께서 인간들 가운데 세우신 품위와 선한 질서를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150쪽)

그러나 리처드 마우를 비롯해 책에 참여한 신학자들은 하나같이 아나뱁티스트에게 큰 빚을 졌다고 말한다. 그들의 전통과 사상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공동체를 공부하고 경험하면서 신앙적·신학적으로 풍성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리처드 헤이스의 말을 들어 보자.

"나는 급진개혁주의 신학과 그것을 구체화한 공동체에 큰 신세를 지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들이 어떠한 실패나 약점들을 가지고 있건 간에 그들은 나에게 언덕 위의 도시,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의 신호(sign)였다. 내가 신약의 도덕적 관점에 관해 판단하고 글을 쓰려고 노력함에 따라 나는 반복적으로 급진적 개혁주의 전통의 증언에 의해 배움을 얻으며 감동을 받았다." (169쪽)

책은 각 신학자의 자서전적 에세이로 기록되어 있다. 어머니를 따라 줄곧 침례교회만 다녔고 '전쟁은 필요악'이라는 사고를 가졌던 풀러대학교 교수 제임스 맥클랜던(James Wm. McClendon Jr.)과, "텍사스에서 자라난 탓인지 그(신학대학원 입학)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메노나이트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다"는 스텐리 하우어워스의 이야기는 한국의 기독교인들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들이 어떻게 처음 아나뱁티즘을 접하게 됐는지, 그때 느꼈던 놀라움과 희열, 그리고 거부감까지 나와 있다.

그렇다고 신학자들 개인의 경험만 늘어놓은 책은 아니다. 이들은 아나뱁티스트에 대한 존경과 신뢰, 찬사를 보냄과 동시에, 날카로운 신학적 비판과 조언도 숨기지 않았다. 이런 점은 한국에 있는 아나뱁티스트들도 귀담아들을 만한 내용이다. <13인의 기독교 지성, 아나뱁티즘을 말하다>의 편집자 존 로스(John D. Roth)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거의 모든 기고자들은 아나뱁티스트 신학과 윤리적 전통 안에서 나타나는 율법적인 경향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많은 사람들, 특히 더 예전적인 전통에서 온 사람들은 아나뱁티즘의 성례전 신학의 부재가 아나뱁티즘의 추종자들이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간의 노력으로 가려 버린 행위를 통한 의로움(works-righteousness) 때문에 취약하다고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관심들에도 불구하고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 증언을 칭찬하는 목소리를 기꺼이 듣기 원하는 독자들은 이 책에서 많은 맛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칭찬은 양날의 검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중략) 정말로 그러한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이 에세이 저자들은 아나뱁티스트 교회론과 현대의 수많은 메노나이트 회중들이 살고 있는 현실 사이의 커다란 격차를 인식하고 있을까? 아니면 약간 다른 맥락에서, 아나뱁티스트 전통에 대한 갈수록 늘어 가는 대중들의 지지는 어쩔 수 없이 급진적인 칼날을 무디게 만들지는 않을까? 평화주의라는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의 테마를 공동체가 겪은 고난의 기억 없이 포용할 수 있을까?" (15~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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