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당시에 베데스다라고 하는 유대에 있는 작은 연못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연못은 간헐천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물이 솟아오를 때에 가장 먼저 뛰어든 병자는 어떤 병이든지 다 낫는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 소문이 객관적으로 확증된 것은 아니었겠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소문은 확대·재생산되어 퍼져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문은 불치병이 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처럼 들렸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은 그 간헐천에 있는 약간의 효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온천이 몸에 좋은 것처럼, 그 간헐천에서 몸을 씻었더니 피부병에 효과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 물을 마셨더니 아프던 배가 다 나았다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하나둘씩 더해지고 소문이 확대되면서 어떤 병이 있더라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섞인 기대감까지 작용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수많은 병자들이 몰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아무런 치유의 효과를 볼 수 없었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서 병이 나았다는 사람이 했던 말의 한 표현에 주목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베데스다 연못에 물이 동할 때 내가 가장 먼저 뛰어들었다는 간증에 착안해서, 아무나 낫는 것이 아니라 '제일 먼저 뛰어드는 사람만이 병을 치유받을 수 있다'는 공식이 생겨났을 거다.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물이 움직인다! 물이 솟아오른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사람들은 모든 일을 뒤로하고 쏜살같이 물을 향해 뛰었다.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병을 낫게 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내가 첫 번째 들어간 사람이 아니어서 그랬겠지. "누군가 제일 먼저 들어간 사람이 있을 텐데, 그 사람은 다 나아서 집으로 돌아갔겠지"하며 자조석인 목소리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병이 낫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제일 먼저 들어가지 못해서이지, 베데스다 연못에 병을 낫게 할 아무런 능력이 없다는 점을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 베데스다 연못에 38년이나 된 병자가 있었다. 아마도 베데스다 연못에 1등으로 들어갈 확률이 거의 없는 사람을 꼽으라면 바로 그 사람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병이 너무 중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물속으로 뛰어들 능력이 그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평생 그 자리를 지켜도 베데스다 연못에 1등으로 뛰어들어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왜 그는 그곳에 있었는가?

어쩌면 그 사람도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소망을 품고 베데스다 연못으로 왔을 것이다. 하지만 연못의 물이 동할 때 열심히 연못을 향해 뛰어들었지만 1등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실패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그는 더 이상 베데스다에 1등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병을 고침 받고 나을 수 있다는 꿈을 접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베데스다 연못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었다. 베데스다 옆에 있으면 치료될 거라는 소망이라도 붙잡을 수 있지만, 이 세상은 어느 곳에서도 소망이 없으니까 말이다. 더 나아가 그곳은 이제 그의 삶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처음 그곳에 왔을 때는 낯선 곳이었지만 그곳에서의 삶에 이력이 생기면서 그곳의 삶에서 자신을 분리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동정해 주는 적선에 힘입어 먹을 것을 해결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위로를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그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이 주목하셨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말을 거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질문은 생뚱맞았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도대체 이게 무슨 질문이란 말인가? 병자에게 낫기를 원한다고 묻다니.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게 바로 그 사람이 베데스다 연못에 있는 이유이고, 38년간 그가 간절하게 원하던 게 바로 그것이 아니었는가. 이런 어리석은 질문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예수님은 진지하게 그 사람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셨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정확하게 그의 속마음을 꿰뚫는 질문이었다. 사실 주님은 내가 나 자신을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는 분이니까 말이다.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의 심리학에 의하면, 이미 그가 병이 낫기를 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핑계를 댄다고 분석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정확한 분석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가 베데스다 연못에 있으면서 병이 나을 수 있는 가능성은 0%이다. 베데스다 연못은 사람들이 믿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병을 낫게 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백 번 양보해서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는 제일 먼저 연못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왜 그는 거기에 있는 것인가? 병이 낫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이 자신의 생활에 일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딱히 어디 다른 곳에 갈 수도 없고, 자신의 삶이 된 그곳을 떠날 용기가 없었다. 만일 병에서 정말 낫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제는 더 이상 구걸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병이 낫지 않는 것이 더 낫겠다는 무의식적 결단을 하고 있었고, 자신이 병에서 나을 수 없는 여러 가지 핑계만을 만들어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알프레드 아들러의 심리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렇다.

사실 이게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우리는 모두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안락함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우리는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다. 하지만 건강해지기 위해서 운동을 실행하는 결단까지 하기는 어렵다. 저녁을 먹고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즐기는 그 편안함을 포기하고는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살을 빼고 싶지만,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맛있는 음식에 대한 탐욕을 제어기 어려워 늘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시작하기로 하는 것이다. 우리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소망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내가 짊어져야 할 수고는 하기 싫다. 교회가 부흥하기를 소망하지만,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와서 교회 내에서 내가 차지하던 자리를 누리고 지금까지 편안하게 느껴졌던 교회의 분위기에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 설치는 모습을 용납하고 싶지는 않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교회 안에 많았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며 나의 기득권을 내려놓기는 싫은 것이다. 만일 지금 내가 누리는 이 상태의 모습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우리 교회가 부흥한다면 대환영이다. 하지만 그런 법은 없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묻는 것이다. 정말 교회가 부흥하기를 원하고 있는가. 정말 건강해지길 원하고 있는가. 정말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되기를 소망하는가.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자신들의 고통을 돌아보아 주고 구원해줄 것을 하나님께 호소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보냈다. 그들을 구원하라고 말이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민족은 기뻤다.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 하나님을 찬양했다. 하지만 모세가 바로와 담판을 지으러 갔다가 오히려 더 고통이 가중되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원망했다.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느냐? 제발 좀 가만 놔두라. 마치 암 덩어리를 가지고 있는 환자가 내 배를 절대로 가르지 말고 수술하지 말고, 그냥 그 다음날이 되면 모두 암 덩어리를 제거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았다. 낫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배를 가르는 아픔을 참을 수는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은 광야에서 모세를 원망하면서 말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출 14:11-12)

하지만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 가나안에 가는 방법은 없다.

38년 된 병자의 고민은 이것이다. 내가 베데스다 연못 안으로 제일 먼저 들어가고 싶은데, 자신을 그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 하지만 그는 베데스다 연못이 아무런 효험이 없다는 것을 몰랐다. 사람들은 그냥 그곳에서 병이 나을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살았지만, 그 꿈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헛된 꿈이었을 뿐이다.

38년 된 병자에게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돈이나 명예나 권력과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이름의 베데스다 연못을 바라보면서 산다. 우리는 그 주변에 머물면서 어떻게 해서든 그 성공의 연못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사람들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성공했다는 성공담을 들으면서 우리들도 그런 방법을 사용해서 그 성공의 연못 속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한다. 지금 나의 모습은 이렇지만 언젠가 나도 그 연못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고통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 하고 좋은 직장을 얻으려 하고 온갖 스펙을 쌓는 일에 모두 뛰어든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연못 안에 들어가는 것은 나만의 힘으로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누구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나는 겨우 흙수저만 물고 태어난 것이 아닌가. 그래서 비관한다. 나를 물에 넣어 줄 사람이 없다는 한탄의 소리들이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하지만 우리는 연못에 들어간다고 해서 병이 낫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1세기에도 헛소문이었고, 21세기에도 헛소문일 뿐이다. 수많은 사람이 이 헛소문을 듣고 연못가에 몰려들었지만,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이 세상에서의 성공으로 우리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검증되지 않는 신화에 불과할 뿐이다.

38년 된 병자를 향해서 예수님이 오셨다. 바로 그 구제불능의 한 인간에게 인간의 몸으로 하나님께서 오셨다. 그리고 그 사람을 향해서 말씀하셨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분 예수는 아무런 퍼포먼스를 하지 않으셨다. 마술사들이 하는 것 같은 주술 행위나, 의사들이 하는 것 같은 의료 행위를 하지 않고, 그저 말씀만 하셨다. 마치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말씀만으로 빛이 생겨나게 하고, 물을 가르고, 뭍이 드러나게 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사람이 걷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재창조의 사건임에 틀림없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이 세상의 성공이라는 연못 주변에서 얼쩡거려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면 예수님뿐이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저 높은 보좌 위에서 낮고 천한 우리에게로 오셨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주셨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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