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4일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한양대학교에 지원한 대구의 한 학생은 아침 일찍 일어나 KTX를 타고 서울역으로 갔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한양대학교를 간다는 것이 2호선을 타지 않고, 4호선을 탔다. 4호선에에 있는 한대앞 역이 자신의 목적지인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내린 곳은 서울 캠퍼스 고사장이 아닌 한양대 에리카 캠퍼스였다. 자칫 시험을 볼 수 없게 될지도 몰라 난감해진 이 학생은 안양 인덕원 지구대 문을 다급하게 두드렸다. 다행히도 경찰의 도움을 받아 고사장에 15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유 있게 출발했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에 올라탄 결과로 하마터면 시험을 보지도 못한 채 낙방의 고배를 마실 수도 있었다. 사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속도보다 방향이다.

새해가 밝았다. 필자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2016년 365일을 열심히 살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내가 달려온 길이 잘못된 목표를 향해서 달려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황당할 것인가? 열심히 인생을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목표를 향해서 뛰는가이다.

그런 점에서 바울 사도의 고백은 참으로 놀랍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2-14)

바울 사도는 후회하려야 후회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방향을 잡고 달려갔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가 기억할 것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이 우리의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목표를 향해 뛰어가기에 우리도 돈, 권력, 명예가 가장 좋은 것인 줄 알고 그 목표를 향해서 가고 있다. 하지만 그게 우리의 참된 목표가 될 수 없다. 이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와 권력을 한 손에 쥐어 보았던 솔로몬이 어떻게 고백했던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라는 고백이 아니던가? 아무리 많은 것을 쌓아둔다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라고 선언하지 않겠는가?

임종할 때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은 더 열심히 살고 더 큰 것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동안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좀 더 너그럽게 살지 못했던 것들을 후회하게 된다고 한다. 임종할 때에야 비로소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했는지를 아는데 아직 우리가 팔팔할 때 삶의 진정한 목표를 바로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자신이 인생을 죽을 때 결코 후회할 일 없는 목표를 향해 올인한다는 점이다. 마치 딱지치기 왕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가능한 많은 딱지를 모으기 원했던 어린 시절의 모습처럼 말이다. 나이가 들면서 딱지가 돈이나 명예, 권력으로 바뀐 것뿐이다. 돈, 명예, 권력이나 이 세상의 성공은 결코 나를 만족시켜줄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거기에 목맨다. 

때로는 우리의 탐욕을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기도 하는데, 마치 가장 큰 규모의 대형교회를 일구어 내고 가장 아름다운 교회당을 짓는 것이 거룩한 목표로 제시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탐욕을 신앙이라는 포장지로 포장한 것과 다름이 없다. 만일 가장 화려한 건물을 짓는 것이 영적으로 거룩한 목표였다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감탄하셔야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주님은 헤롯이 수십 년에 걸쳐서 지은 그 성전을 가리켜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 24:2)고 하셨다. 만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것이 영적으로 바른 목표라고 한다면, 주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와 같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울 사도의 목표는 고상하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바울 사도 스스로가 어떤 가시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달려간 것이 아니다. 그의 목표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박수를 쳐 줄 수 있는 그런 가시적인 성과가 아니었다. 오로지 주님께서 이끌고 가는 바로 그 목표를 향해서 달려간 것이다. 비록 그 길이 세상 사람들이 박수를 쳐 주는 길이 아니라, 돌을 던지고 채찍질하는 길이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바울처럼 달려간다면 2호선 한양대역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지 않고 4호선 한대역으로 가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인간의 탐욕으로부터 비롯된 인간의 야망을 교회의 목표로 삼고 그것을 향해서 뛰어가자고 할 때가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느 정도 교회의 성장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 눈에 띄는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결과를 보면서 성취감에 빠지는 것이 과연 영적으로 건강한 것일까? 만일 지금 내가 탄 기차가 한양대 역을 향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의 방향인 4호선 한대앞 역으로 가는 것이라면, 지하철이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더 멀리 가게 될 뿐이다.

우리의 목표는 영적인 목표여야 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엡 6:12)

우리의 유일한 목표가 이 세상에서의 가시적인 결과여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목표는 영적인 전투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적(主敵)은 사탄이다. 사탄은 아주 교묘해서 우리가 어떤 영적인 수고와 노력을 기울일 때 그것을 방해하기보다는 우리의 목표를 바꾸어 버리는 재주가 있다. 대국을 이기는 것이 바둑의 목표인데 바둑알 하나 따내는 것을 목표로 삼게 만든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에게 바둑알 하나를 내주고 우리의 대마를 잡으려 한다. 그런 작전에 넘어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음식을 준비하기로 했다. 음식을 준비하면서 그의 마음속에 기쁨이 넘쳤을 것이다. 내가 사랑을 베풀 때보다 더 큰 기쁨을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사탄은 그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자신의 동생 마리아가 자신을 돕지 않고 예수님의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화가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수고하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예수님에 대해서 화도 났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예수님께 대접하기만 하면 가장 고귀한 목적이 달성된 것인가? 아니다. 이미 그의 마음은 분노의 마음과 시기와 질투의 마음으로 가득 찼다. 그의 마음에는 교만의 마음으로 가득 찼다. 이미 사탄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마르다가 가장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다 해도 그가 다다른 목적지는 한양대학교가 아니라, 사탄이 원하는 4호선 한대앞일 뿐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이건 아무나 할 수 없는 헌신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사탄은 그의 마음속에 교만함의 씨를 뿌렸다. 그래서 제자들은 '제자들 중에 누가 큰가'라는 문제로 다투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내가 주를 위해 이렇게까지 희생했으니 내가 얻을 상이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보상 심리가 작동했다. 그런 동기가 지배해서 가장 철저한 헌신과 수고를 했다면 영적인 목표를 이룬 것일까? 아니다. 이미 그들의 마음은 사탄에게 장악되고 말았다. 그들이 가장 뛰어난 선교의 업적을 이룬다 할지라도, 그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그런 대단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그들이 기뻐할 것은 그들의 업적이 아니다. 하늘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것, 영적인 목적을 기뻐해야 할 것이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서 이민을 결심했다고 한다. 교육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부모들은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한다. 일 때문에 정작 자녀들을 돌볼 시간은 내지 못 한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마약에 빠지거나 갱단에 들어가는 결과를 보는 경우도 많다. 자녀 교육을 위해서 이민을 결심했는데 결국 자녀를 망치는 길을 선택한 아이러니는 이민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그게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산다고 했는데, 오히려 가족을 내팽개쳐 버리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가족을 위해 돈을 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돈을 위해 가족을 버린 모습을 보는 것이 흔하다. 교회를 위한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비난하고 욕하면서 싸우는 모습도 이미 우리에겐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새해에는 무엇을 향해 뛸까?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겸손하게 순종하며 나아가기를 소망해 본다. 하지만 작심삼일 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이기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다. 날마다 쓰러지고 또 넘어지고, 거룩한 목적을 세웠는데 엉뚱하게도 세속적인 탐욕의 목적지에 다다를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기에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필요하다. 그래서 새해 아침에도 십자가 그늘 아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한다.

(사족: 오해하지 말라. 교회가 커지는 게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생에서 성공하는 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사는 게 잘못되었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우리에게 바른 영적인 목표가 있어야 하며 이 목표는 너무나도 쉽게 잊힐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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