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마음의 주머니는 그 속을 꽉 채우지 않으면 늘 부족함을 느끼는 신비한 주머니다. 마음의 주머니가 가득 채워져 있으면 행복감을 누리게 되는 것인데, 문제는 그 마음의 주머니를 가득 채우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불행하다. 바람만 스쳐도 고통스러운 통풍처럼, 가득 채워져 있지 않고 주머니에 빈 공간이 있기에 조그만 일에도 고통을 느낀다.

사람들은 이러한 빈 공간을 없애기 위해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해 왔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채움'이다. 채움의 방법이 이야기하는 논리는 아주 간단하다. 마음의 주머니에 빈 공간이 있으면 고통스러우니까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채워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빈 공간을 줄여 버리면 고통이 그만큼 줄어들 것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다. 허기진 배를 달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실 먹는 게 최고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잔뜩 먹고 나서 유순해지고 온화해지는 경험을 많이 한다. 잔뜩 화가 나더라도 먹고 나면 화가 풀리는 경우가 많다. 채움의 방법은 나름대로 효과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채우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서점에 가면 두 가지 종류의 책들이 많이 팔리고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바로 어떻게 하면 채울 수 있는가에 관한 책들이다. 부자가 되는 법이나 성공하는 법에 관한 책들은 매년 쏟아져 나오고 있고 그 가운데서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된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는 긍정적 사고방식에서 시작해 성공의 비법을 연구한 대중적 경영학 서적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하면 마음의 주머니를 가득 채울 수 있을지 알려 주는 책들은 항상 인기가 좋다.

하지만 채움의 방법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다른 사람들이 성공했다고 하는 그 채움의 방법들을 모든 사람들이 따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카지노에서 잭팟을 터트린 사람이 있다고 선전하기는 하는데 사실 그런 꿈을 안고 카지노에 들어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잭팟을 터트리기는커녕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탕진하는 것처럼,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고들 하는데 그렇게 해서 성공한 사람들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아무리 채우고 또 채워도 결코 마음의 주머니를 완전히 채울 수 없다는 것이다. 돈은 우리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해 줄 수는 있지만, 돈으로 행복을 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오히려 돈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마음의 주머니는 어느 정도 채운다고 채워질 수 있는 고정된 주머니가 아니다. 무한대로 팽창해 가고, 무엇이든지 삼켜 버리는 블랙홀과 같다. 이 세상 최고의 갑부라 해도 마음에 만족을 얻기는 힘들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돈으로 채우다가 그 돈이 자신의 마음의 주머니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돈이 아닌 다른 것들로 채워 보려고 한다. 그래서 명예나 권력으로 채워 보려고 하는데 여전히 채우고 채워도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는 없다. 사람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으로 채울 수 있는 시시한 존재가 아니다. 사람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우리의 마음의 주머니를 채울 수 없음을 아는 것은 대단한 깨달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정반대의 방법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비움'이다. 밥을 많이 먹어야만 포만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위장을 절제하게 되면 적게 먹어도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마음의 주머니를 비우고 또 비우게 된다면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비움의 방법이다. 가지고 있는 물건으로 큰 상자를 다 채울 수 없다면, 상자 자체를 바꾸어 버려서 작은 상자로 대치한다면 현재 있는 물건만으로도 다 채울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사실 우리는 마음의 집착과 욕심을 버리는 훈련을 통해 고통을 줄일 수 있다. 나를 힘들게 했던 문제들도 알고 보면 나의 욕심과 집착 때문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꾸만 무한대로 커져만 가는 나의 욕심과 집착을 없애 버리고 마음의 주머니를 줄이고 또 줄여서 정말 내 마음의 주머니를 공(空)의 상태 혹은 무(無)의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면 아무런 고통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채움의 방법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것처럼, 비움의 방법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

서점에 가면 채움의 방법을 선전하는 책과 더불어서 아주 많이 팔리고 베스트셀러 목록에 자주 오르는 책들 가운데 하나가 비움의 방법을 선전하는 책들이다. 채움의 방법이 안 된다고 실감한 사람들은 이제 비움의 방법을 찾는다. 마음을 비워야 행복해질 수 있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고통이 없어질 것이라는 주장한다. 이는 많은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복음처럼 들린다.

하지만 채움의 방법에 두 가지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비움의 방법에도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우리가 아무리 마음의 주머니를 비우고 또 비워도 충분히 비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는 수행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고통을 줄여 나갈 수 있고 그러면서 인생의 문제들이 조금씩 해결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겠지만, 비우고 또 비워도 비워지지 않는 것이 우리들 마음이다. 어느 정도 수행을 하고 또 하면 내 마음을 완전히 비울 수 있을까? 마음을 비우는 수행은 도무지 다다를 수 없는 목표에 도전하는 것과 같다. 돈이나 명예와 권력로 우리 마음의 주머니를 완전히 채우는 것이 절대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수행이라는 방법으로 주머니를 완전히 비우는 것도 불가능하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방법으로도 마음을 완전히 비울 수 없다.

채움의 방법이 좀 탐욕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면, 비움의 방법은 좀 성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중생들이 채움이라는 탐욕의 방법을 사용한다면, 그런대로 고상한 사람들은 비움의 방법을 사용한다. 채움이 세속적인 방법이라면, 비움은 종교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엄격히 따지면 채움도 종교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채워야 한다는 신념이 종교적 신념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우상숭배라고 말한다.

이 세상 모든 종교는 인간의 부족함이라는 실존적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채움이나 비움의 방법 편에 서 있다. 샤머니즘적인 미신을 비롯한 종교는 우리의 부족함을 해결해 주는 방편으로 등장한다. 그 옛날 가나안 땅에 있었던 토속 종교들에게 그런 모습이 있었다.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한 햇볕과 적절한 비를 위해 자신들의 우상 앞에 나아가 가뭄의 문제 같은 것을 해결하려고 했고, 자식들이 필요할 때도 우상 앞에 엎드려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토착화되고 샤머니즘화한 불교는 본래의 가르침과는 달리 채움을 말한다. 달마도를 그려서 소장하거나 부적을 붙이기도 하고 부처 앞에서 108배를 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입시 때마다 영험하다는 절에 가서 불사를 하면서 우리들의 부족함을 채우려고 한다. 하지만 좀 더 고등적인 종교는 비움의 방식을 택한다. 불교는 본래 비움의 종교다. 비우고 또 비워서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것이 불교의 본래적 가르침이다.

기독교는 채움이나 비움, 어느 편도 아니다. 본래의 기독교, 즉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가 그렇다. 하지만 기독교가 채움의 방법을 택하는 쪽으로 타락하는 것은 너무 쉬웠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되던 초창기부터 사람들은 예수 믿고 복 받는 것에 집중했다. 기존의 종교보다 참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더 나았고, 다른 방법들보다 예수를 믿어서 복된 삶을 누리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그 편을 택했다. 물론 성경의 가르침은 이러한 복을 통해 영적인 복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수많은 건전한 성도들은 성경적인 가르침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기독교 신앙이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채움의 방법인 것처럼 생각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치료하시며 배고픈 자들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는 분으로 강조되었다. 우리를 가장 확실하게 채워 줄 수 있는 분으로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독교가 채움의 방법과 맞지 않다는 것을 자성하게 되었고, 일각에서 기독교가 비움의 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우리의 도덕적 교사로서 우리보다 앞서서 비움의 길을 걸어가신 분으로 강조되기 시작했다. 십자가 사건은 자기 비움의 결정체로 제시되었다. 기독교 서적도 채움을 강조하는 책들이 인기를 끌기도 했고, 정반대로 비움과 내려놓음을 강조하는 책들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러나 서두에서 지적한 것처럼 아무리 채워도 우리의 마음은 결코 채워질 수 없다. 아무리 비워도 우리 마음의 주머니는 결코 비워질 수 없다. 성경은 제3의 길을 제시한다. 그 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 주시는 길이다. 달나라에 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열심히 뜀박질을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선이라고 했던가. 채워도 안 되고 비워도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그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예수님은 아기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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