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평신도 교회인 새길교회에서 신학위원으로 있는 한완상 박사가 12월 6일 주일예배 때 나눈 설교문입니다. 30주년을 앞둔 새길교회의 시작을 돌아보고 공동체가 나아갈 길에 대해 적었습니다. 이 설교는 비단 새길교회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설교문 제목처럼 더 예수답게 살아가려는 모든 한국교회에 속한 이야기입니다. <뉴스앤조이>는 새길교회의 허락을 받고 설교문을 게재합니다. 설교문은 총 세 번에 나눠 올릴 예정입니다. 또 '예수 따르미'와 '평화 만드미'는 필자 한완상 박사가 문법에 어긋남을 알면서도 쉽게 부르고자 만든 용어입니다. - 편집자 주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는 숨을 거두셨다. 그런데 백부장은 그 일어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다." (눅 23:46-47)

새길교회의 시작,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열망 

1987년 3월 8일, 정치‧경제적으로 먹구름이 또다시 군사독재의 억압적 폭풍을 몰고 올 듯할 때, 새길공동체는 탄생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언제나 새롭게 변혁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어둠의 역사 속에서도 새날이 밝아옴을 선포합니다"는 장엄한 신앙고백을 토해 내면서 대안적 신앙 공동체가 출범했습니다.

1987년은 한국 역사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터져 나왔던 해입니다. 이른바 '87체제'가 탄생했습니다. 밑으로부터의 시민혁명으로 새로운 정치 질서가 태동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민의 저항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직전은 어둠의 권력이 우리를 몹시 떨게 했지요. 전두환 정권은 호헌 조치로 민주화의 열망을 잔인하게 짓밟으려 했습니다. 광주 학살 사건이 지난 지 7년 가까이 되는 1987년 초, 군사 공포정치를 줄곧 펼쳐 왔던 군부독재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를 열망했던 민주 시민들을 더욱 옥죄고 핍박하려 했습니다. 이런 엄혹한 역사의 현실 속에서 새길공동체가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의 태어남을 재촉했던 상황적 요인에는 당시 한국교회의 타락과 복음 상실의 현실도 크게 한몫했습니다. 군부독재가 추진했던 성장제일주의와 힘에 의한 승리제일주의 문화가 한국 기독교의 번영 신앙에 접목되었습니다. 이른바 반민주적 산업화 세력이 교회로 깊고 넓게 침투했습니다. 그 결과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모두 한국에서 '자랑스럽게' 나타났지요. 

이와 같은 교회의 물량적 성장을 가능하게 해 준 번영신학과 신앙은 한 마디로 한국 기독교 안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비전에서 나왔을까요? 이 질문 앞에서 몹시 불편해하고, 부끄러워하고, 의로운 분노를 느꼈던 크리스천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소수자에 불과했으나, 예수 복음을 우리의 어두운 역사 상황에서, 부끄러운 한국교회 현실에서 새롭게 깨닫고 이 복음에 충실한 실천적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저는 이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한국의 거대교회의 지도자들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갈릴리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친히 겪었던 사탄의 시험에 모두 모범적으로 낙방했던 목회자들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큰 교회'를 세울 수 있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사탄의 시험에 낙방했다는 것은 사탄의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메가급 유혹을 용기 있게 물리친 분들이 목회하는 교회를 저는 끊임없이 목마른 사슴처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 교회를 찾기 힘들다고 판단한 저는 1987년 초에 새로운 신앙‧신학 공동체를 시작해 보려고 결심했습니다. 이 같은 결심의 배경에는 그럴 만한 역사적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이라 재직했던 서울대학교에서 두 번씩이나 쫓겨난 아픔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아픔은 1976년 2월 말, 유신 체제 권력이 유신 체제를 비판하고 저항했던 일군의 교수들을 해직했을 때입니다. 이때는 주로 기독교교수협의회라는 반정부 지식인 모임으로 인식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희생 제물이 되었지요. 그 후 4년이 흘러 1980년 3월, 저희들은 쫓겨난 학생들과 함께 복직되었습니다. 그것은 1979년 10월 26일 유신 체제의 창시자가 부하의 총을 맞아 돌아가셨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1980년 5월, 박정희 군사정권을 이어받은 신군부는 또 다른 교묘한 형태의 군사 정변(쿠데타)을 통해 더 잔인하게 국민에게서 주권을 강탈해 갔습니다. 광주민주항쟁이 이때 터져 나왔는데, 이 항쟁이 일어나기 직전 김대중 씨를 위시한 민주 인사들이 신군부에 의해 일망타진됐습니다. 이 당시에, 저는 4년 만에 복직한 지 두 달 반이 된 시점이라, 다시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신혼의 단꿈을 매일 꾸는 것 같은 보람을 느끼고 있을 때였습니다. 5월 17일 밤 10시 40분,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연행되어 남산 지하 2층에서 두 달간 지옥 심문을 받았지요. 그 이유는 허망한 것이었습니다. 김대중 씨를 대통령으로 옹립하기 위해 저희들(주로 대학교수‧성직자‧문인‧언론인들)이 국가 변란을 도모했다는 죄였습니다. 마침 권사님이셨던 제 어머님이 며칠 전 5월 12일에 소천 하셨는데, 모친 상가에서 내란 음모를 했다는 참으로 허망한 조작을 통해 신군부 검찰이 저희들을 불법으로 연행하고 심문하고 군사 법정에 세웠습니다.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고 그해 11월 저와 민중신학자 서남동 교수는 형 집행정지로 일단 석방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미국에 있던 여러분들로부터 신앙적 격려를 받았습니다. 특히 두 분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저는 1981년 기적같이 모교인 미국의 에모리대학교에 초빙교수로 갈 수 있었습니다. 한 분은 그 당시 에모리대학교의 총장이었던 레이니(James T. Laney) 박사입니다. 이 분은 해방 직후 미군으로 한국에 와서 한국 정치 지도자들의 저격 사건을 조사했던 미군 수사팀에서 일한 분입니다. 이때, 그가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에 대해 느낀 바가 매우 컸다고 합니다. 귀국하여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기독교윤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밴더빌트 대학교의 신학부 교수로 있다가 곧 에모리대학교신학대학 학장으로 부임하셨으며, 그 후에 에모리대학교 총장으로 봉직했습니다. 남달리 한국 민주화 운동을 직간접적으로 도와주신 분이지요. 훗날 그는 클린턴 행정부에서 주한미대사로 부임했지요. 저와는 형제같이 가깝게 지냈습니다. 또 한 분은 당시 미국연합장로교본부에서 중동 담당 총무로 일하셨고, 미국교회협의회에서 사회정의 분야에서 주요한 직책을 갖고 있었던 이승만 목사였습니다. 그는 1960년대 초,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흑인 인권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신 분이십니다. 후일 그는 동양인으로서 최초 미국연합장로교의 총회장이 되셨고, 미국교회협의회 회장도 역임했습니다. 

이승만 목사께서 1981년 1월, 한국에 출장을 와서 저의 초라한 모습을 보시고 말 없이 저를 껴안고 우셨습니다. 이때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면, 레이니 총장과 의논하여 저를 에모리대학교로 초청하겠다고 했습니다. 고마웠으나 김대중 사건의 공동피고였던 저를 미국에 가게 하는 일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속으로는 피식 웃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 목사와 레이니 총장의 공동 노력으로 정말 기적같이 저는 1981년 10월 초에 29년 만에 모교에 갈 수 있었습니다. 1년이 지나자, 뉴욕의 신앙 동지들이 제가 미국에 계속 체류하면서 조국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해 함께 일하자고 권고했습니다. 여권과 비자가 모두 만기가 되었지만,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저는 뉴욕으로 갔지요. 미국연합장로교가 직영하는 수양관(Stony Point Center)에서 사회정의 자문위원 자격으로 체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민주화‧평화‧통일‧사회정의와 같은 주제로 강연‧강의‧설교‧간증을 하면서 바쁘게 살았습니다. 

1983년 초에 이승만 목사께서 저에게 심각한 제의를 해 왔습니다. 얼마 동안 미국에서 망명객처럼 지내게 될지 모르지만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M.Div 학위 과정을 이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지요. Ph.D 학위는 오래 전에 취득했으니, 이제 목회자 신학과정을 밟으며 신학을 공부해 보라고 권고했습니다. 망설이다가 저는 그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습니다. 1954년, 전쟁의 상흔으로 우리 민족이 앓고 있던 때, 모친께서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는 저에게 신학교에 들어가 훌륭한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셨던 어머님의 소망을 떠올렸습니다. 정말 뜻밖에 시간, 뜻밖에 장소에서 5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신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여러 번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의 복음으로 사회와 역사를 변혁하려는 신학적 동력이 충만했던 유니온신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고, 은총이었지요. 그런데 한 학기만 하면 목회자 과정이 끝날 즈음, 저는 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1984년 8월 14일, 뉴욕 총영사였던 김세진 박사가 전화로 내일 날짜(8월 15일)로 제가 복권·복직된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목회자가 될 자격은 저에게는 없지만, 해방신학의 동력은 제가 배울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셨구나'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귀국을 서둘렀지요. 

9월 초에 저는 정말 3년의 망명 생활을 접고 그리운 조국에 돌아왔고, 정말 그리웠던 모교의 연구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조그마한 해방이요, 광복이요, 희년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조국 강토에는 참된 해방과 광복의 기쁨이 오지 않았기에 귀국의 기쁨은 잠시뿐이었지요. 마침 바로 저의 아파트 앞에는 현대교회가 있었습니다. 귀국을 하자마자, 그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이 제게 말씀 증거를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화여대로부터 해직된 서광선 박사가 그 교회에서 정식 목회자로 몇 년간 일하셨는데, 이대로 복직되셨기에 교회를 사임했다고 했습니다. 듣자니, 제가 뉴욕에서 신학교에서 공부도 했다고 하기에 서울대에서 새 일로 바쁘시겠지만, 매주 설교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옳거니,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위해 망명 중에 신학 공부를 시키셨구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2년 남짓 현대교회에서 정말 신나게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제 일생에 참으로 뜻깊고 행복한 경험이었습니다. 

2년이 지나는 동안, 저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과장도 해야 했고, 사회학회 일에도 참여해야 했고, 무엇보다 당시 선명 야당을 세우려고 애썼던 정치 지도자들을 여러 모양으로 도우는 일에도 참여해야 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나, 주일 설교만은 신나게 힘써 준비했습니다. 2년쯤 지난 어느 날, 저는 교회가 속한 노회에서 평신도가 계속 설교하는 문제를 놓고 불편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즉각 현대교회에서 하는 설교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때 심각한 실존적 선택의 아픔에 직면했습니다. 어느 교회에 나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딱히 나가고 싶은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 전에 다니던 교회는 이미 분란 조짐이 있었습니다. 며칠간 고심하다가, 정말 새로운 대안 신앙 공동체를 시작해 보기로 결단했지요. 그런데 그 당시 제가 주중에 할 일이 워낙 많았기에, 저는 이 모험에 함께 뛰어들 신앙 동지를 찾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현대교회에 다닐 때, 제가 요청해 이틀간 역사적 예수 특강을 해 주신 한신대학교 김창락 교수가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당시 독일의 성서신학자 게르트 타이센(Gerd Theissen)의 역사적 예수 탐구를 들었는데, 저에게는 퍽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연구실에서 길희성 교수도 떠올랐습니다. 그도 제도권 교회에 소망을 갖고 있지 않을 듯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가끔 현대교회에 왔지요. 또 한 분이 생각났습니다. 독일에서 사회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숭실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이삼열 박사였습니다. 그는 강원용 박사의 크리스천아카데미에서 간사로 일했고, 사회변혁과 정치 변화에 큰 관심을 쏟고 있는 대학 후배였지요. 이러한 분들에게 전화로 "내가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시작할 텐데, 도와 달라"고 했지요. 모두 흔쾌히 동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의 구상을 그분들에게 대충 이야기했습니다. 먼저 신앙고백문을 우리 식으로 만들고, 또 창립 취지문을 만들어 보자고 했지요. 그리고 말씀 증거는 돌아가면서 맡자고 했지요. 모두 찬성했습니다. 저는 하기 힘든 말인데, 설교에 대가가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모두 재능 기부, 은혜 기부로 설교를 맡아 하기로 했습니다. 또 성가대는 창립 주일 전에 고 이남수 교수께서 조직해 주셨는데, 장윤성 형제를 지휘자로 보내 주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도권 교회의 직제를 답습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장로‧권사‧집사 등의 직분을 아예 없는 것으로 하고, 모두 서로 자매‧형제로 부르자고 했습니다. 모두 좋다고 했습니다. '예수 따르미'라는 칭호는 새길이 출범한 뒤 5~6년이 지난 뒤에 제가 그렇게 부르자고 해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예수 따르미로 서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말씀 증거의 기쁨을 평신도와 나누는 교회

처음에는 참신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창립 취지문에서 엄숙하게 선언했듯이, 선명한 대안적 신앙 공동체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이것은 제도권 교회에 대한 창조적 대안의 모습을 선명히 부각시킨 것이지요. 

"우리는 섬김 받는 교회에서 섬기는 교회로, 교역자 중심의 교회에서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제도와 율법주의에 매인 교회에서 은총과 자유의 교회로, 닫힌 교회에서 열린 교회로,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쌓아 올리는 교회에서 나누어 주는 교회로 발돋움하고자 합니다."

세월이 28년 지나고 보니, 이와 같은 대안적 특성이 대체로 존중되어 온 것 같습니다만, 부족한 점이 한둘이 아닌 듯합니다. 과연 우리가 서로 섬기려는 신앙 열정으로 지금도 신나게 일하고 있는지, 평신도 중심의 교회의 겉모습은 지키고 있으나, 평신도 중심이 갖는 복음의 헌신이 실제로 있는지, 이를테면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서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위선적 삶을 살았지만, 평신도 사마리아인은 참으로 헌신적 자기 비움을 실천했는데, 과연 새길공동체의 주인인 평신도는 사마리아인의 복음적 급진성과 전복성(radicality and subversiveness)의 신앙을 갖추고 실천하고 있는지 항상 스스로에게 물을 때마다 부끄러워집니다. 율법과 제도에 매인 교회 신자들보다 우리가 새길공동체에서 시간과 물질을 더 성실하게, 더 알차게 바치는가를 물으면 정말 부끄러워지지요. 우리가 주는 교회와 나누어 주는 교회가 되려면, 줄 것과 나누어 줄 것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하는데, 이 일에도 우리가 게으른 평신도로 남아 있지 않았는지 자문해 보면, 스스로를 꾸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안적 특징 가운데 한 가지만은 거침없이 자랑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열린 교회를 지향하는데, 이 열림의 핵심은 공동체의 힘을 나누어 갖는 'empowerment'입니다. 교회의 가장 큰 권력은 어디서나 말씀 증거를 하는 강대상의 독점에서 잘 나타납니다. 제도권 교회 교역자들은 강대상을 부목사나 장로들에게 열어 놓지 않습니다. 평신도들에게는 강대상의 접근이 철저히 차단되어 있습니다. 특히, 여성이나 젊은이들에게는 주일 낮 말씀 증거를 할 기회가 전혀 주지 않습니다. 다른 교회 교역자들에게나 특히 교단, 교파가 다른 목회자에게 강대상은 더 닫혀 있습니다. 무엇보다 강대상에 서서 말씀 증거를 할 기회와 기쁨이 평신도에게 활짝 열어야 진정 열린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새길공동체에서 첫 6~7년은 네 사람의 말씀 증거자들이 거의 독점적으로 설교권을 행사했습니다만, 지금은 상당히 더 열려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제대로 된 평신도 공동체가 되려면, 모든 평신도들이 말씀 증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만큼 열린 교회에서는 평신도가 제비 새끼처럼 어미가 물어 오는 음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먹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자신의 삶에서 끊임없이 예수를 따르는 실천적 삶을 살면서 말씀 증거의 소재를 스스로 찾고, 만나고, 만들어 내야 합니다. 하기야 예수님이야말로 참으로 훌륭한 평신도 말씀 증거자요, 말씀 실천자였습니다. 

지금은 강대상이 상당히 열려 있지만, 그 열림의 수준이 계속 높아질 수 있게 하려면, 평신도의 신앙적, 신학적 삶도 그만큼 풍부해져야 합니다. 이 점에서, 새길공동체는 아직도 많이 부족한 듯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저는 여러 자매형제들의 말씀 증거를 듣고 크게 힘을 얻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신학과 신앙의 성찰에서 예수의 복음적 급진성과 전복성이 빛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28년이 되었으니, 더 많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갈릴리 예수의 하나님나라가 갖는 공공성, 감동성, 그리고 변혁성을 자신들의 삶 속에서 육화하고 거기에서 말씀 증거의 동력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아직도 멀었다면, 그 책임의 가장 큰 부분은 새길을 연 제 자신에게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 복음의 공공성과 감동성, 그리고 변혁성은 그의 하나님나라 펼침에서 우러나와야 하는데, 바로 이 하나님나라 운동에 대해 새길공동체가 지난 28년간 체계적으로 서로 배우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책임의 태반이 저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길이 열린 지 몇 년이 되지 않아 몇 가지 문제가 심각하게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이 교육 문제와 다음 세대를 길러 내는 문제를 평신도 교회에서 제대로 다루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대우를 하면서 전문 교역자를 모시기도 했지만, 교육 문제는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겪게 되는 심각한 실존적 문제를 교회가 목회 차원에서 제대로 다루고 해결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병들고 아프고, 실패하고 괴로울 때, 공동체가 그들을 제대로 돌봐 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데는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단순히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곁에서 함께 동고(同苦)하면서, 함께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아파하며 뛸 수 있어야 하는데, 즉 동고주(同苦走)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일을 집중적으로 맡을 일꾼을 공동체 안에서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전담자가 있어야 되는데, 이것이 지금도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몇 년간은 누가 아파서 입원하면, 평신도 여러분들이 자발적으로 병원 심방을 했지요. 교우들 중에 죽음 앞에서 온몸으로 외로워하고 괴로워할 때마다 저는 평신도 공동체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교회 밖에서 할 일들이 날로 많아지고 심각해질 때는 평신도 교회를 시작했던 저로서는 더 큰 부담감으로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공동체 돌봄의 문제가 지적 소통의 차원에서 쉽게 다룰 수 있다면, 저는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지요. 그런데 공동체에서는 때때로 전인격적 소통과 공감을 해야 풀릴 수 있는 실존적 아픔과 역사적 아픔이 계속 생기게 마련입니다. 특히 새길처럼 복음의 공공성과 감동성으로 구조와 역사를 변혁시켜 하나님의 평화와 샬롬의 기운을 교회 안팎으로 확산하려면 더욱 더 감동적인 돌봄의 목회가 필요하다고 절감했습니다. 아직도 이 문제는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이것을 절감할 때마다 저는 외롭고 괴로웠습니다. 과연 이대로 가면, 새길 공동체가 10년, 20년 후에도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를 이제 걱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미래위원회가 생긴 줄 압니다. 

정말 이 지속성의 문제는 새길의 정체성과 함께 우리가 모두 함께 고민하며 다루어 나갈 공동체의 주요 문제입니다. 예수께서도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셨으나,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열성을 뛰어넘는 더 큰 열성을 보이라고 촉구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제도교회에 대한 복음적 대안 공동체임을 감동적으로 증거하려면, 제도권 교회의 제도화된 열성을 뛰어넘는 제도 내외적 성실성과 열성이 더욱 더 필요합니다. 우리는 열린 평신도 교회에 다니면서 너무 안일한, 너무 나태해진, 너무 무책임한 신자들이 되어 버리지 아니했나를 진지하게 자기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28년이 지난 지금, 정말 우리 공동체에게 '예수다움'은 무엇을 뜻하는지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앞으로 새길공동체를 더 예수다운 복음 공동체로 뻗어 나가기 위해 예수다움의 신학적 함의를 새삼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 이 글은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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