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주관한 학술 심포지엄 '분단 70년, 한국 기독교의 성찰과 반성'이 2015년 12월 5일(토)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있었습니다. 이 심포지엄에서 이만열 교수(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가 기조 강연자로 나섰습니다. 허락을 받아 발표문을 싣습니다. 분량이 많은 관계로 내용을 줄여서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이 글에서는 분단 70년 한국교회사를 되돌아보면서, 해방 당시 교회의 과제와 이후의 인권·민주화·통일 운동 과정, 교회 성장에 따른 그늘 등을 언급하고자 한다. 나아가 130년의 역사에도 외면해 왔던 한국 기독교의 자기 신학화 작업을 지적하고, 앞으로 용서와 화해를 실천해 나가자고 제의했다.

해방 공간의 민족사적 과제와 기독교

▲ 이만열 교수. ⓒ뉴스앤조이 이은혜

해방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식민 잔재 청산과 민족정기 회복이었다. 식민지하에서 왜곡·부패해 상실된 민족정신을 회복·갱신하고 전통을 비판적으로 회복하여 사회적 기풍을 쇄신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친일파 청산이었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물론 한국 사회 전반에서 일제 잔재 청산에 실패했다. 우선 교회의 일제 잔재 청산은 신사참배 회개 운동에서 시작되어야 했다. 해방 직후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모인 출옥 성도들의 결의가 있었고, 이북 5도 연합 노회와 남부 대회에서도 신사참배 회개를 위한 방안을 제시했지만, 회개의 합당한 조치로 실천되지는 못했다.

장로교회는 '출옥 성도'가 가장 많은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신사참배 회개를 강력히 주장했다. 경남노회의 신사참배 회개 운동과 고려신학교 문제는 총회로부터 배척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급기야는 고신파의 분열에 명분을 제공하게 되었다. 고신 교단 분립 후 신사참배 회개 운동은 역동성을 잃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고 좌절되고 말았다.

신사참배를 제대로 회개하지 못한 한국교회는 해방 정국에서 더 이상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미군정하에서 남조선과도정부입법의원은 1947년 11월 친일파 청산을 위한 법규를 마련했으나, 미군정의 동의를 얻지 못해 폐기되었다. 제헌국회에서 반민법을 제정하고 반민특위를 구성했으나 기독 신자 이승만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명분으로, 과거 친일했던 자들에게 반공 활동자라는 은신처를 제공해 그들이 적극적으로 친일 혐의를 벗고 활보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방 초기 우리 민족사의 과제였던 친일 잔재 청산은 기독교 내외에서 실패하게 되었고 친일파가 준동하는 전통은 이날까지 이르고 있다.

해방 정국에서 남한의 기독교계는 세 가지 노선이 있었다. 이는 해방 정국에서 기독교 지도자 인 3거두(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일치되지 않은 노선과도 연관된다. 신탁통치 문제만 하더라도 이승만의 우파, 좌우합작 및 남북협상 노선을 이끄는 김구·김규식 중심의 중도파, 그리고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기독교민주동맹 중심의 좌파가 있었으나 기독교계는 점차 이승만을 지지했다. 결국 중도적 노선이 힘을 잃었고, 초기에 다소 혼재했던 신탁통치 문제도 신탁통치 반대로 거의 귀일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기독교인 3거두 중 정치적 권력을 확보한 이승만이 '장로 대통령'으로서 선거제도를 얼마나 공정하게 실천했는가는 기독교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선거제도를 정착시키는 데 기독교적 이상과 신실성을 보여 주지 못했다. 195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가 발췌 개헌을 강행했고, 영구 집권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의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1952년 대통령 선거와 그 뒤의 선거에서 이승만 정부가 얼마나 부정을 저질렀고, 장로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기독교회가 얼마나 부정에 동참했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이러한 실패는 우리 민족사에 큰 시련과 아픔을 남겨 주었다.



인권 민주화 및 통일 운동과 기독교

1960년대부터 1980년대 말까지 군사정권하에서의 기독교는 존재감을 점차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선은 1960년대 '한일 국교 정상화' 문제와 박정회의 3선 개헌 때였다. 1965년 6월,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전후한 시기에 기독교회는 정부의 '대일 굴욕 외교'에 항거하여 집단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강요 등 많은 고난을 당했던 기독교회가 국교 타결 이전에 일제의 식민 지배와 신앙 탄압에 대한 사과를 요구한 것은 당연했다. 김재준·강원룡·강신명은 물론이고 비교적 온건했던 한경직 같은 지도자까지 이 항거에 참여해 기독교계 대부분이 뜻을 모았으나 정부의 대일 외교 자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3선 개헌' 문제가 기독교계를 진보와 보수로 나누는 중요한 분기점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1969년 박정희가 3선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 의도를 드러내자 기독교회의 대응이 나뉘기 시작했다. 함석헌·김재준·박형규 등은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조직해 개헌 반대 운동에 나섰다. 김준곤·김장환·김윤찬 등은 개헌 반대 활동을 '성직의 권위를 도용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곧 그들도 대한기독교연합회라는 기관의 이름으로 개헌에 찬성함으로 스스로 주장해 온 정교분리 입장을 파기했다. 결국 한국교회는 개헌에 반대하는 진보와 개헌에 찬성하는 보수로 확연히 나누어지게 되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유신 독재의 길에 들어서고 신군부가 파쇼적인 정권을 강화하던 때, 한국교회는 인권 민주화 운동으로 답했다. 이는 1980년대 통일 운동으로 이어졌다. 물론 한국교회 대다수는 1972년 말 박정희가 유신 체제를 선포했을 때 적극적 혹은 묵시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그런 엄혹한 유신 정권하에서도 기독교의 진보적 소수는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나섰다. 1973년 4월에 '남산 부활절 연합 예배'와 11월의 '인권선언' 채택을 통해 인권 민주화 운동에 전기를 마련했다. 1974년 초 기독 학생들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면서 통일 문제를 언급하는 등 저항에 나서자 당황한 정부는 대통령 긴급조치 12호를 발하고 유신헌법에 대한 의견 표명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는 긴급조치와 유신 체제에 대응하여 시국 기도회를 시작했다.

교회의 움직임이 긴급조치 제재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으나, 기독교회는 유신의 엄혹한 상황을 돌파하려는 계기를 만들려고 했다. 1974년 3~4월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은 이런 상황에서 터졌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 사건이 늘어나자 교회협은 1974년 5월, 시국 선언문을 발표했다. 11월에는 신학자 66명이 '한국 기독교인의 신학적 성명'을 발표해 인권·민주화 운동을 신학적으로 정리하고 뒷받침했다.

기독교회의 이 같은 인권·민주화 운동은 1976년 3월 1일, 천주교와 개신교 지도자들의 명동성당 사건으로 연결되었다. 그들은 삼일절 기념 미사에서 '민주 구국 선언'을 발표해 긴급조치와 유신헌법 철폐, 박정희 정권의 퇴진 등을 외쳤다.

군부독재하에서 인권·민주화 운동은 정당성이 있었다. 군부 세력은 '국가 안보'를 들어 여기에 맞섰다. 안보를 위해 인권·민주화를 유보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여기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인권·민주화를 유보하려는 안보 논리를 넘어서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이런 안보 논리의 배경이 바로 분단에 있음을 직시했다. 안보 논리의 배경이 분단이며 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인권·민주화 운동도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직시한 기독교 민주화 운동 지도자들은 통일 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물론 기독교에 진보 진영의 인권·민주화 운동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정권과 야합해 그들의 반인권 반민주에 면죄부를 주는 행태 또한 기독교회의 이름으로 이뤄졌다. '국가 조찬 기도회'라는 이름으로 독재 세력을 두둔하고 축복해 주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1980년대 신군부 시절에는 노골적으로 불의한 세력을 축복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반면 한국교회 진보 세력은 1980년대에 이르러 통일 운동에 더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먼저 해외 거주 기독교인들과 북과의 접촉이 시작되었다. 1979년 전 숭실대 학장 김성락이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대화를 나누었다. 해외 동포 사회에서 이뤄진 것이지만, 민간인이 북한과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연 것이다. 1981년 비엔나에서 시작하여 프랑크푸르트에까지 11차례의 회합에 이르게 된 '북과 해외 동포 기독자 간의 통일 대화'도 통일 운동의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교회협은 통일 문제 해결을 위해 1982년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를 상설 기구로 설치해 통일 문제에 본격적으로 접근하려고 했다. 1984년 11월에는 일본 도잔소(東山莊)에서 WCC(세계교회협의회) 국제위원회 주최로 도잔소 협의회를 열고 한반도의 통일이 남북한 기독교인의 사명이라는 요지의 선언을 발표했다. 이어 교회는 1985년 2월 '한국교회 평화통일 선언'을 채택했고, 그 전후로 한국기독교장로회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에서 신앙고백서를 통해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주장하게 되었다.

이 무렵 WCC의 주선으로 1986년부터 1988년, 1990년 세 차례에 걸쳐 스위스 글리온에서 남북한 교회가 통일 대화를 하게 되었다. 남과 북의 기독교인들은 만난 후, 먼저 성찬예식을 거행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됨을 확인했다. 광복 50년이 되는 1995년을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희년'으로 정했으나 1989년부터 노태우 정권의 공안 정국이 시작돼 약속이 원만하게 이행되지 못했다.

1988년 2월 29일에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교회협 통일 선언)이 발표되었다. 교회협 통일 선언은 민간에 의해 작성된 최초의 본격적인 통일 선언이었다. 교회 안팎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정부에도 큰 영향을 줘 그 해 '7·7 선언'을 유도하게 되었다. 1991년 12월 13일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협의서'와 12월 31일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는 이 선언의 내용이 상당히 반영되었다.

기독교계의 통일 운동은 1990년대에 북한 돕기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때 한국교회 진보와 보수가 북한 동포를 돕는 민족 문제 해결을 위해 손을 잡게 되었다. 이 사실은 한국교회사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이 북한 돕기 운동마저 '장로 대통령'과 기독교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중단되고 말았다.

이렇게 1960년대부터 1980년대 말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국교회 진보 진영을 중심으로 진행한 인권·민주화 및 통일 운동은 한국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운동 과정에서, 1980년대에 이르러 기독교 운동권의 영향력은 점차 퇴조되고 운동의 주도권이 비기독교 운동권으로 넘어갔다. 이는 기독교 운동권이 자신들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상실하는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교회의 양적 성장에 따른 그늘 - 왜곡된 복(福) 사상과 이분법적 삶

한국교회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기간에 유례없는 양적 성장을 보여 줬다. 1950년에 있던 3,114개의 교회가 1960년에는 5,011개, 1970년에는 1만 2,866개, 1980년에는 2만 1,234개, 1990년에는 3만 5,819개로 늘어났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성장이 둔화되었다.

한국교회 성장과 그 원인에 대해 여러 관점이 있으나, 성장 뒤 후유증으로 나타난 복 사상과 이원적 삶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한국교회에 복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다. 당시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잘 살아 보세' 운동을 할 때, 한국 기독교회 일각에서 요한 3서 2절을 인용해 복 바람을 일으켰다. 이들은 3박자 축복, 3박자 구원을 주장했다. 이 운동은 한국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키는 데 공헌했으나, 성경의 복 사상을 한국의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게 만들어 버렸다. 기복 종교는 사회를 바꾸는 힘이 없다. 기독교는 다른 기복 종교처럼 사회를 개혁하는 힘을 거의 상실하게 됐다.

예수님은 의를 행하다가 핍박을 당하는 것을 복이라고 했다. 의를 위해 고난을 받으면 큰 보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복되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 자체가 복이라고 했다. 오늘날까지 남겨진 선한 역사와 전통은 보상받지 않고 죽어간 많은 의로운 자들이 희생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름 없이 죽음을 당했는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복에는 복음서가 언급하지 않은 복이 하나 있다. 사도행전 20장 35절 말씀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소유하고, 더 얻는 것을 복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소유와 탐욕 중심에서 바라보는 복을 달리 정의할 것을 요구한다. 받는 것이나 얻 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되다고 한다. 이 말씀은 소유 중심의 일상적인 복 관념을 뒤집어(顚侄) 버린다. 하나님나라에서는 남에게 주면서 가난을 실천하는 자가 많이 가진 자와 많이 가지려고 탐욕을 누리는 자보다 훨씬 복되다.

복 사상 못지않게 한국 기독교가 비난받게 된 것은 이분법적인 삶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속(聖俗)을 구분하여 삶을 달리하는 것이다. 예수 믿는 일을 예배드리고 성경 읽고 기도하며 전도하는 일이며 일상적인 삶과는 관련시키지 않는다. 기독교인의 삶은 교회 안에 국한되는 것이지 내 가정과 직업과는 관련 없다는 것이다. 세속적인 일이란 하나님의 일과는 무관하며, 거기에 하나님의 명령을 적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때문에 기독교인은 자신이 봉사하는 세속적인 일터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려는 것을 주저한다. 기독교인이 관여하는 정치·경제·사회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세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대통령이 기독교인인 정권 하에서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분법적인 신앙하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명박 정권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명박 정권은 출범 초기에 내각의 57%, 청와대 수석의 50%, 청와대 비서관의 39%가 기독 신자였다. 기독교인 비율은 역대 정권에서 가장 높았다. 그럼에도 그 정권 하에서 4년간 공직 비리가 61%나 급증했다. 한국의 부패 인식 지수도 점점 낮아져서 2010년보다 4단계 떨어졌다. 한국 기독교에 있는 잘못된 복 사상과 이분법적 행태 때문이라고 본다.

자기 신학화의 반성

한국교회가 성장하는 만큼 한국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기 신학을 갖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신학은 한국 기독교인이 자기 상황을 통해 고민하면서 스스로 체계화한 신학을 의미한다. 물론 한국의 풍토를 기반으로 이론적 틀을 갖춰 신학화한 작업으로, '민중신학'이 한때 세계에 소개되었으나 후속 작업이 제대로 안 돼 이제는 거론되지도 않는다.

한국의 신학을 두고 더러 '수입 신학' 혹은 '번역 신학'이라고 한다. 한국에 프로테스탄트 첫 세례자가 나온 것이 130년이 넘었는데도 '한국의 신학'이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신학화의 전제가 되는 상황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은 자기 신학으로 승화할 수많은 상황들을 경험했지만, 그걸 신학화의 작업으로 진전하게 하지 못했다. 그만큼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문제의식에 투철하지 못했거나, 신학화를 위한 영성이 부족했다.

한국 개신교의 경우, 일찍부터 신학화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인의 풍토에 전래한 기독교가 이 땅에 뿌리내리는 문제를 두고 토착화를 위한 신학적 시도가 초기부터 있었다. 토착화 신학이 1960년대에 이뤄졌다면 1970년대에는 민중신학이 대두했다. 민중신학은 군사정권과 유신의 엄혹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민중의 현실에 눈을 뜨고 민중과 연대하여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경험을 신학적으로 성찰하여 내놓은 것"이다. 민중을 신학의 주제로 삼자고 주장하면서 안병무는 '무리' 혹은 '민중'으로 번역된 마가복음의 오클로스를 예수 사역의 중심부에 놓는 등 민중신학을 심화했다. 성경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이해의 방식을 전환했다. 이것은 그 학자들이 민중과 함께 고난 받는 경험과 의식을 신학적으로 승화한 데서 가능했다.


토착화 신학이나 민중신학이 한국에서 가능했던 것은 그런 연구자들이 속했던 기관이 비교적 학문의 자유가 보장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학문의 자유가 없는 곳에 이런 신학화의 가능성이 나타날 수 없다. 한국의 교계가 창의적이거나, 자기 색깔과 다른 신학을 용납할 만큼 관용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신학화를 창의적으로 해 나가려면 소속 교단으로부터 퇴출당할 용기가 필요하다. 교단 설립자에 대한 비판마저 용납하지 않는 풍토에서 신학화의 문제에 창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과거 '토착화를 고민할 때에는 타종교와의 유사성과 상이점을 천작하여 기독교적인 주체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런 노력이 없는 지금은 '복음의 샤머니즘화'가 광신적으로 진전되고 있어도 이를 분간할 영성과 지성을 다 잃어버렸다. 장로 대통령이 이끄는 한국 사회에 교회가 아편중독에 걸린 것처럼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어도 이제는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교계가 부패를 향해 속도를 내는데도 신학자는 말이 없다. '번역 신학', '수입 신학'에 머물면서 자기 문제를 스스로의 고민과 영성으로 극복해 가지 않고 있는 한국 신학계, 특히 한국교회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보수 복음주의 신학계는 여기에 답해야 한다.


해방 직후 한국 기독교는 공산주의자들의 핍박을 받아 이념적 대결의 첨병 노릇을 했다. 오늘날도 여전히 이념 대결의 최전방에서 북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것은 아닌가. 이제 한국 기독교는 지금까지 북의 동족을 향해 겨누었던 총구를 거두어야 한다. 대결하는 남북 관계를 화해와 평화로 이끌어야 한다. 더 이상 적대적 공생 관계 속에서 북에 대한 증오를 부추겨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어리석은 의도는 지양해야 한다. 70년 동안 이룩하지 못한 남북 대결의 험로에 용서와 화해, 평화와 통일의 통로를 깔아가야 한다. 수백 만이 피를 흘린 동족상잔 비극의 역사도 용서와 화해로 풀어야 한다. 증오와 보복으로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십자가의 사랑은 자기를 못 박은 원수까지 용서함으로 완성되는 것이지, 그들을 향한 저주로써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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