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1.

하나님의 말씀 곧 자연(自然, 스스로 그렇게 됨의 원리)의 설교(說敎, message)는 인간의 실존(實存)을 향해 있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지성을 통해 자연과 교감합니다. 인간은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지성(知性, 智聲)을 들을 뿐 아니라 생각하고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먼저 설교는 자연이라는 나를 둘러싼 세계의 원리 자체를 일깨워 주는 지식이어야 하고, 그다음에는 그 메시지가 나라는 개인의 현재적 상황을 향한 지혜라는 의의를 환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성경은 이를 위한 특별한 도구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건지 알 수가 없게 됐습니다. 그런 설교가 성도들의 실존적 삶에 부합될 리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기독교 메시지)은 전체 세계를 대상으로 하지만 그것을 수용하는 대상은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에게 오셔서 개인을 변하게 하여 진리를 증거하십니다. 최종 목적을 위해, 개별 상대를 놓고 서두르시거나 건너뛰는 법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사람은 먼저 차분해져야 합니다. 설교의 대상인 개인의 정신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가 있는 아이처럼 예측할 수 없고, 다양하며, 쉼 없이 변화무쌍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한 번의 구원 경험은 분명 획기적이고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진지해지고 차분해져야 공부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설교(전도)가 아니라 설교자(전파자)가 문제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성경을 그대로 옮기는 것인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도구(매개)가 없으면 전파가 안 됩니다. 성경도 전도자도 다 매개입니다. 교회도 기독교인들의 삶도 매개입니다. 도구가 적절치 않으면 전파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도구는 어디까지나 도구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가요? 설교자인가요, 설교인가요? 설교란 무엇이고 설교자는 누구일까요?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막 10:17-18)

아무리 고매한 선생일지라도 온전히 선한 인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대답한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선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선한 인간이 없다는 점을 상기해 주려는 데 있습니다. 혼자 분리된 우월한 삶이 없는 것처럼 혼자 분리된 우등한 정신도 없습니다. 그런데 강단에만 올라가면 마법의 가운(실제로 각종 가운들을 걸치고 있지요!)과 기적의 혀를 부여받은 듯 행동하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어떤 내용인지 이해도 못하지만 멋지게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있습니다. 관객들은 배우와 연기를 혼동합니다. 배우와 그의 연기에 감탄하는 한 영화의 진정한 주제에는 접근할 수 없는 겁니다. 배우도 관객도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설교는 자연이라는 나를 둘러싼 세계의 원리를 일깨워 주어야 합니다. 그 의미가 나라는 개인의 현재적 상황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도 환기해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런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겠지요? 어떤 설교자든 자신이 도달한 정신 과정의 수준에서 설교도 나오는 겁니다. "기도 많이 하면 성공한다", "돈 많이 내면 복 받는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이런 설교를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진리의 원리를 일깨워 주지 못할뿐더러 우리의 현 상황을 향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 설교자들은 대개 엉뚱한 행실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지요? 당연한 일입니다. 천국과 주님을 그토록 사랑하는 분들이 금전과 권력과 육신의 쾌락을 사랑하시다니.

우리는 어떤 사람의 말뿐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도 그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들을 해 봐야 할 겁니다. '왜 그 본문을 선택했는가', '그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결론적으로 하려는 말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걸 다시 이렇게 물어야 할 겁니다. '오늘 목사님의 설교는 나를 둘러싼 세계의 원리를 일깨워 주었는가', '그 의미는 나의 현재 상황을 향해 있는가?'

2.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기원후 37년경~100년경)는 본래 반(反)로마 유대 항전의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포로가 된 뒤 자신의 변절에 대한 변명으로 <유대전쟁사>를 썼습니다. 전한(前漢) 시대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86?)도 패전한 친구를 변호하다 무제(武帝)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궁형(宮刑)이라는 치욕을 당하고, <사기(史記)>를 저술했습니다. 그는 "의분이 붓을 일으킨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변절이나 형벌이 그들의 저술에 영향을 미쳤기에 그것들이 정당하지 않다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변명이든 의분이든 자신의 경험에 정직하기만 하다면 의미는 충분할 겁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그들이 개인적 삶의 굴곡을 통해 영향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독자들은 거기에 글쓴이(말하는 자, 설교자)의 경험이 배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설교자의 설교도 곧이곧대로 설교가 아니겠지요? 저는 설교의 가치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누구보다 그 가치를 아끼는 마음으로 부정직한 설교를 남발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 행위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의식적(!) 주제가 있습니다. '깔때기 이론'처럼 그가 무슨 말을 하든지 결국 이 주제로 설교가 완성될 겁니다. 다시 말해 그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설교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을 그의 특별한 목적이라고 해 둡시다. 이러한 목적은 설교자의 (목회)현실적 삶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이전에 그의 실존적(영적) 현실에서 출생한 것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런 설교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겠죠? 때문에 그 진정한 출처는 무의식의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어쩌면 그 자신조차 자신이 이런 말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할 뿐,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를 수도 있을 겁니다. 그의 설교에서 이 특별한 의식적 목적을 제거하고 나면 무엇이 나타날까요? 그것은 설교를 준비하기 전 벌써(처음부터) 그에게 있었던 겁니다. 설교보다 더 근원적인 메시지라고 해야 할 겁니다.

심리학은 개인이 인생을 통해 직면한 물리적 상황에 대응하며 축적해 온 정신의 지속적 과정이 있음을 밝혀 주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통합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자아(自我)를 형성합니다. 사람이 겉으로 무슨 말을 하든지 그 속에는 그것과 상관없는, 혹은 상관이 있든 없든 그것대로 의미를 지니는 자율적인 정신의 구조가 있습니다. 어둠 속의 원시인처럼 자아는 그때그때 자신을 지키기 위한 여러 재료들로 내면의 아성을 구축해 왔습니다. 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이렇게 형성되는 구조들을 '배열'이라 표현했습니다. 사람이 배열된다는 것은 그만이 가지는 고유한 방식으로 반응하게 되는, 오랫동안 준비해 온 정신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배열은 무의식에서 이루어지는 자발적 과정이기 때문에 마음먹기에 따라 중단될 수 없습니다. 가령 우리가 괴로움에 빠진 동료를 위로하거나 격려할 때 마음을 굳게 먹으라거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한들 단순히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배열된 정신의 구조를 콤플렉스(complex)라 합니다. 즉 각각의 콤플렉스들은 마음속에서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진 자율적 힘으로 감춰져 있습니다.

표면적인 말과 행동만으로 그 사람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를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말할 것 없이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그리스도 예수님의 복음을 믿어야겠죠? 당나라의 선승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라" 가르쳤다고 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누군가를 본받아 답습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를 능가하려는 열망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다는 말은 사람과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되기도 합니다.

기독교든 무엇이든 본질에서 벗어나 부패하지 않으려면 어디까지나 이 원리를 고수해야만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깨달았으므로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은 곧 하나님 말이다"고 절대로 주장할 수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순간 그는 벌써 하나님의 복음에서 떨어져 거기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은 그때부터 자기변명이 되거나 의분이 되거나 야망이 됩니다. 교회와 강단이 존재하는 의의는 항상 이런 부패의 단초를 환기해 주기 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3.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0-21)

하나님의 왕국은 미래적으로 언젠가 올 것이 아니다. 또 가시적으로 '이것이다, 이쯤이면 된다'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현재적으로 너희 안에 있다. 여기서 '너희 속'이라는 말은 '마음'을 가리키기도 하고 '현실의 상황' 혹은 '진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곧 마음과 현실의 진실, 거기에 하나님나라(복음의 진리)가 임하십니다. 우리가 복음의 설교를 듣고 그 원리를 이해할 때, 그것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나를 향한 것이라는 점을 납득할 때,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신께 바치는 제물(도구)로 삼아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참여하게 됩니다.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시편 112:4)

중요한 것은 정직(진실)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는 정직에 기초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이런 것입니다. 가령 어떤 잘 믿는다는 신자들은 모든 사안을 종교적 감탄으로 꾸며 대기에 바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상황을 생각도 해 보기 전에 하나님에 대한 감사로 대신해 버립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모든 고통을 당사자의 죄에 대한 정죄로 환원해 버립니다. 이런 모습들은 믿음이 좋은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자신이 진실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 줄 따름입니다. 숨겨진 어떤 정직에 직면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이겠지요? 대상과 거리를 두기 위한 회피의 수단으로 재빨리 모든 것을 좋다고 하거나, 괜찮다고 하거나, 감사하다고 하거나, 주님의 뜻 혹은 사단의 음모라고 해 버리는 겁니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누구나에게 콤플렉스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칼 융이 말한 것처럼 콤플렉스가 그 사람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릅니다. 말로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온갖 '자기 의'로 행동하는 겁니다. 곧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면 그 죄인이 된 그 상황에서 복음이 나와야 합니다. 개인뿐 아니라 교회, 교회뿐 아니라 사회를 조직해 나가는 원리도 그러한 배려에서 복음적으로 구현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세상 속에서 과연 복음을 구현하며 전파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는 자신의 극히 일부인 의식적 생각을 아무런 성찰 없이 전체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지·정·의를 자기의 전부라고 굳게 믿어버리는 무지한 신념 때문에 무의식적 콤플렉스는 오히려 견고해집니다. 이런 사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선입견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쉽고, 모처럼 하나님 말씀을 들었더라도 자기 입맛에 맞게 곧바로 변형해 버리게 될 겁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야고보서 1:23-24)

하나님의 말씀일지라도 읽는 사람 자신의 무의식적 의도에 의해 이미 설정된 도구로밖에 기능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섬겨 주는 것으로 여기는 거지요? 딴생각에 사로잡혀 거울을 보고서도 그 모습을 곧바로 잊어버리는 겁니다. 무슨 말을 들어도 접수되지 않는 사람은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도 목적은 있습니다. 오직 그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동원하고 이용하고 희생시키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의 내면의 현실과 그것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사람은 어떤 관계에 있게 되는 것일까요?

4.

우리는 자주 설교자들의 유창하고 빼어난 설교와 그들의 삶이 보여 주는 차이에 놀랍니다. '어떻게 저토록 은혜 있는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이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지', '어떻게 저런 거짓말로 일관하는 비열한 사람이 그토록 호소력 있는 설교를 할 수가 있지'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있는 겁니다. 가능한 겁니다. 배우들을 보십시오. 양심에 짓눌려 괴로워할 거라고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주님을 위해 일하다 보니 사단들에게 핍박을 받는다고 엄살을 부릴 겁니다. 항상 그렇게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문제는 여전히 그런 자들을 보통 사람과는 구별된 설교자로, 하나님의 종으로 높여 놓고 특수하게 바라보는 착한 성도들입니다. 언제인들 그런 초점을 벗어난 설교자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교회에는 그런 부류들을 걸러 낼 분별의 능력이 없어졌습니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가장 어리석은 대중을 상대로 하는 저자가 가장 많은 독자를 거느린다"고 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설교자들이 강단을 점령해 버려서 교회와 복음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이 만연하게 됐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폐쇄하게 하고 교회 밖의 대중들이 복음을 듣고 교회 안에 들어올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 특히 탁월한 효과를 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자들이 지닌 폐쇄성 때문입니다. 폐쇄되어 있는 채로 그것을 고수하게 만드는 고립된 콤플렉스의 역동이 거기에 있습니다. 아마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폐쇄성 자체를 못 견뎌 하면서 거기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부를 하는 대신 그 자신의 폐쇄성을 무기화했습니다. 남보다 무식한데다가 특별히 용감하기까지 합니다. 흡사 코미디언이나 배우와 같은 그런 용기(?)를 대중들은 카리스마라고 불러 주며 호응했던 겁니다. 왜 그랬을지 이해가 되실 겁니다.

오늘날 특히 대형 교회들은 많은 문제점들을 항상 지적받고 있으면서도 하나도 바꾸려 하지 않는 완고하고 강력한 신념의 성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들의 콤플렉스는 의식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으며, 모든 영역에서 독립된 이물체(異物體)처럼 거대해지고 있습니다. 마치 건강한 몸을 파괴하는 바이러스나 암과도 같이 말입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 그러나 어떤 의미로 그들은 그것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콤플렉스는 오랫동안 그것을 목적으로 준비되어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말하는 근원적인 성찰과 획기적인 의식의 변혁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자기 부인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십자가도 집단 콤플렉스에 의해 전혀 다른 의미로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회고해 보건대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스승들도 그들의 발호는 막을 수 없었던 겁니다.

이것은 콤플렉스가 강한 의지로 억압할 수는 있지만 제거될 수는 없으며 적절한 기회가 오면 본래 있던 힘을 통해 다시 등장한다는 심리학적 이론과 맞아떨어집니다. 어떤 보고에 의하면 콤플렉스의 활동 곡선은 물결 모양의 특징을 지니고 있고, 한 파장은 몇 시간 며칠 혹은 몇 주에 걸쳐 지속된다고 합니다. 이런 콤플렉스의 역동에 의해 일어나는 정신 현실을 '의식의 해리(解離)'라 부릅니다. 키에르 자네라는 프랑스의 정신병리학자는 한 사람에게서 4중·5중으로 분리된 인격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융 기본 저작집>) 곧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의식적 주인이 없는 겁니다. 그의 내면에는 각각의 고유한 성격과 기억이 있는 인격의 조각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상대적으로 독립해 존재하며 각축을 벌여서 수시로 정권을 교체합니다. 곧 고도의 자율성을 가지고 있어서 의식과 상관없이 저희들끼리 그 사람을 이리저리로 끌고 다니는 겁니다. 이러한 학술적 보고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환기해 주는 걸까요? 그런 건 다 정신없는 장애인들의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릴 수 있는 걸까요?

많은 가정이 붕괴되고 인간관계가 파산하고 사람들이 자살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국가와 사회는 "아, 몰랑"하면서 자기 욕망을 채우느라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물론 교회도 그중 하나입니다. 방송이나 미디어를 보면 더욱 가관입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정신병리학적 콤플렉스의 역동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어떻게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막 9:48)는 '헬조선'이라 불리는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말과 말, 욕망과 욕망, 거짓과 거짓들의 자율적인 역동 가운데서 어떻게 능력 있게 생명 질서를 회복하게 하는 걸까요?

5.

건강한 사회와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근원적 원인은 이러한 개개인들의 콤플렉스들의 역동입니다. 콤플렉스는 '갑'을 잔인하게 만들고 '을'을 비참하게 만들며, '가진 자'를 우쭐대게 만들고 '못 가진 자'를 위축하게 합니다. 불행한 자를 연속적으로 불행에 빠뜨리고 재난당한 자를 계속 재앙에 떨어뜨립니다. 잔혹한 자들을 계속 잔혹하게 만들고 위선자들을 더욱 위선으로 몰아갑니다. 탐하는 자들을 더욱 탐심으로 부추기고, 갈등하는 자들에게 더욱 갈등하라 불 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가 쌓이듯 파괴는 서서히 이루어지고 파국도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날이 오면 그때는 이미 늦은 겁니다.

삶이 파괴된다는 것은 모든 관계의 단절과 파행과 파국을 말합니다. 단지 개인의 내면이나 인간관계에 그치는 걸까요? 가장 두려운 것은 영혼의 구원, 진리의 문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기초가 바닥부터 흔들리는 이 마당에 의인인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시편 11:3) 콤플렉스란 온전한 전체에서 떨어져 나간 정신의 조각들입니다. 콤플렉스로 사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온전한 완전성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파편입니다. 한 개인, 한 가정, 한 교회, 한 국가가 이런 식으로 구원에서 떨어진 파편 조각으로 파괴되고 있습니다. 누가 일깨울까요? 누가 바로잡을까요? 일이 이 지경인데도 지금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관심을 두고 벌이는 딴전들을 보십시오.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고립된 섬으로 밀려나고 있으면서도 아직은 아무렇지 않은 척, 서로 사랑하는 척,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인격을 가진 척 배우들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배우들에게 열광하고 교훈은 없는 드라마에 열광하듯 복음의 본질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역사는 왜 이렇게 하나님과 복음의 진리에 위배하게 진행되는 것일까요? 맞습니다. 콤플렉스의 원인은 도덕적 갈등 즉 '위배(거리낌)'에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해야만 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이러한 도덕적 위배와 갈등이 일어난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실존적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불가능한 데 있었습니다. 즉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가짜 자기를 만들어 온 결과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사도 바울의 이 강력한 권면은 복음을 전제로 했을 때만 가능해지는 태세입니다. 단순히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라는 권면이 아닙니다. <공동번역성서>는 이 문장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늘 깨어 있으십시오.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씩씩하고 용감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처리하십시오." 그러나 뭔가 부족합니다. 원문의 의미를 살려서 다시 풀어본다면 "깨어나십시오. 믿음 안에 굳게 서십시오. 강력함으로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것이 사랑 안에 있게 하십시오"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남자'란 남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온전한 인격'으로서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곧 "먼저 인간이 되어라" 그런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강력함을 갖추어야 한다는 겁니다. 강력함으로 먼저 사람이 돼라. 어떻게요?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랑(복음의 진리) 안에 있게 할 때 가능해집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 4:18)

하나님의 말씀은 내면의 빛을 비추어 우리의 실존적 고통의 구조(위배의 구조)를 자각하게 합니다. 인식하면 그때부터 정면으로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직면이 두려워 핑계 대며 회피해 온 어린아이 상태에 맞서서 책임지는 어른으로 성장합니다. 목사와 교회가 그것을 도와주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해야 합니다. 그게 각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사명입니다. 타인을 돕거나 사랑한다는 것은 언제나 그다음의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거창한 사명은 없을지라도 누구나 자기 일상의 사명은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지금 교회와 성도의 최우선의 사명은 복음의 본질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복음을 살려야 교회도 살고 성도도 삽니다. 여러분의 직관을 믿으십시오. 복음과 교회의 미래를 위해 합당치 못한 역기능 공동체들에서 과감히 떠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졌기 때문입니다. 정직히 말씀드립니다. 저는 과거에는 대형 교회가 좋은 신자를 기르는 못자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서 배워서 성숙해져 세상으로 흩어지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를 본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형 교회는 오히려 작은 공동체와 개인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입니다. 내부에서 자성의 목소리 하나 나오지 않는 폐쇄된 콤플렉스입니다. 세습이 됐든 건축이 됐든 욕망한 것은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밀고 나가려 합니다. 그것이 저처럼 비신자를 향한 복음 전도자에게 얼마나 큰 폭거이고 폭력인 줄 깨닫지 못합니다. 교회성장학은 더 이상 신학이 아니고 대형 교회는 더 이상 복음의 터전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말 그대로 반(反)복음의 온상일 뿐입니다. 결단하십시오. 깨어 복음에 굳게 선 사람으로서 강력하십시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딤후 3:12)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