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숭실대가 '기독교 정신'을 이유로 동성 결혼의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영화 상영을 막으려 하자, 학생들과 시민단체가 들고일어났다. 학생들은 "학교 당국의 조치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자 학생 자치에 대한 탄압이다"며 반발했다. 11월 10일 숭실대 베어드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뉴스앤조이 이용필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기독교 정신'을 앞세워 동성 결혼 다큐멘터리영화 상영을 막으려 했던 숭실대학교(한헌수 총장)의 대응이 수포로 돌아갔다. 오히려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2년 전보다 화제성이 높아지고, 참석자의 수도 몇 배나 늘었다.

지난 10월 13일, 숭실대 총여학생회는 인권 영화제를 개최하기 위해 학교 벤처관 309호를 17:00~22:00까지 대여했다. 인권 영화제는 11월 10일로 예정됐지만, 학생처가 하루 전 장소 사용을 허가할 수 없다고 통보해 논란이 일었다. 학생처장 이름으로 된 공문에는, "인권 영화제의 내용이 대학의 설립 이념인 '기독교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 차후에도 대학 설립 이념과 정체성에 반하는 일체의 행사를 허가할 수 없다"고 나와 있었다.

학교 측이 문제 삼은 상영작은, 동성 결혼식을 올린 영화감독 김조광수 씨와 레인보우팩토리 대표 김승환 씨 부부의 결혼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영화 '마이 페어 웨딩'. 학교 측이 갑자기 제동을 걸고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11월 10일 숭실대에서 만난 조은별 총여학생회장은 "뜬금없는 통보에 우리도 할 말을 잃었다. 확인해 보니 보수 기독교 측에서 학교에 항의 전화를 많이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예수님을따르는아가페목장', '주님을기다리는신부들', '선한이웃' 등 보수 기독교 단체는 11월 7일을 전후로 숭실대에 항의 전화를 했다. 선한이웃은 10일 숭실대 정문에서 인권 영화제 반대 집회까지 계획했다. 숭실대에서 만난 선한이웃 관계자는 "이틀 전부터 우리가 학교에 항의 전화를 엄청 했다. 김조광수 커플은 성(性) 정치로 선동질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인원이 모이지 않자 선한이웃은 집회 일정을 취소했다.

대관 취소와 관련해 학교 측은 말을 아꼈다. 장경남 학생처장은 항의 전화 때문에 대관을 취소한 게 아니라고 했지만, 나머지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기독교 정신과 인권 영화제 상영이 어떤 연관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노코멘트하겠다", "홍보팀과 이야기하라"고만 말했다. 학생처 한 직원은 보수 기독교 단체의 항의 전화를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대관 취소 이후에 진보 기독교 단체에서도 항의 전화가 걸려 왔다고 했다.

총여학생회와 SSU LGBT(숭실대학교 성 소수자 모임), 시민단체 등은 학교 측의 일방적인 행태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10일 오후 5시 베어드홀 앞에서 열었다. 기자회견에는 7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학교 측의 태도가 일관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지난 9월 미국 레즈비언 커플의 삶을 다룬 '퍼스트 댄스'를 상영했고, 2년 전 동성애자 주교에 관한 '로빈슨 주교의 두 가지 사랑'을 상영했다고 했다. 동성애 작품을 상영할 동안 학교 측이 '기독교 정신'을 이유로 방해한 적 없었다고 했다.

지지 발언자로 나선 임보라 목사(섬돌향린교회)는 "기독교 정신이 무엇인지 되묻고 싶다. 학교 논리대로 하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성 소수자는 배제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상당히 비겁하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기자회견이 끝난 뒤 베어드홀 4층에 있는 총장실로 항의 방문을 했다. 이들은 이동하면서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멈춰라", "학생 자치 탄압 즉각 중단하라", "총장은 사과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총장실 불은 꺼져 있었다. 참석자들은 다시 기자회견을 열었던 장소로 돌아온 다음 영화 상영을 준비했다. 노트북과 빔 프로젝트를 설치하고, 앉아서 볼 수 있도록 간이 장판을 설치했다.

▲ 영화제에 참석한 김조광수·김승환 부부의 모습. 이들은 학생들의 활동을 막아서는 학교 당국을 비판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인권 영화제에는 김조광수·김승환 부부도 참석했다. 영화 상영에 앞서 김조광수 감독은 "전두환 시절에도 이렇게까지 막지 않았는데 참으로 안타깝다. 악조건 속에서도 많이 모여 줘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참가자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기자는 김조광수·김승환 부부를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눴다. 성공회 신자이기도 한 김조광수 감독은 학교를 설립한 기독교 정신과 인권 영화 상영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자신을 정치 세력으로 몰아가는 보수 기독교 단체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신앙을 바탕으로 세워진 학교가 오히려 차별을 조장하고 있다. 정말 문제가 있다면 성경 구절이라도 넣어서 비판을 해 줬으면 한다. 이번 일은 외부로부터 압박은 받기 싫고, (대관 취소를 하기 위한) 명분은 있어야 하니까, 기독교 정신을 앞세운 것으로 본다. 그런데 정말 묻고 싶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정신이라는 게 혐오 세력에 굴복해 사회적 약자인 성 소수자를 부인하는 것인지 말이다.

'정치적이다, 선동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더 정치적이고, 선동적이다. 사실 이번에도 문제를 삼지 않았다면 반향 없이 조용히 영화만 보고 끝났을 지도 모른다. 실제 외부의 간섭이 없었던 2013년 인권 영화제에는 10명밖에 안 왔는데, 오늘은 수십 명이나 참석했다. 보수 기독교 단체와 학교 측 덕분이다."

오후 7시 30분 시작한 영화제는 밤 10시에 마무리됐다. 몇몇 학교 직원도 끝까지 남아 있었지만,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 애당초 다큐멘터리영화는 실내에서 볼 예정이었지만, 학교 측의 반대로 무산됐다. 학생들은 총장실이 있는 건물 앞에서 시청했다. 영화 상영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 ⓒ뉴스앤조이 이용필
▲ 참석자들은 다소 쌀쌀한 날씨 속에서도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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