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젠가 '아들아, 너는 목사가 되지 말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저는 아들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서 가정한 '아들'의 모델은 제 친구 아들입니다. 목사가 되기를 바라는 친구나 목사가 되겠다는 그의 아들이 제 글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곤혹스러움 때문이겠지요? 만일 누군가 저에게 목사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어 온다면 이런 대답이 어떨지 생각해 봤습니다(이 대답은 어디선가 배운 겁니다). "그렇다. 나는 지난 8년 동안 목사가 된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만일 목사가 되지 않았다면? 일생을 후회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저 같은 사람 하나가 후회하고 안 하고는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후회하면서 아쉬워하고 아쉬워하면서 후회하게 되는 것이 더 중대한 문제입니다. 말하자면 '한 번 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영 못하고 마는 건가'하는 아쉬움과 후회 말입니다.

목사로서 저는 오늘날 한국교회와 기독교인의 문제를 항상 두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는 복음의 문제이고 그다음은 복음의 왜곡, 곧 반(反)복음의 문제입니다. 이 둘은 다 전파의 문제입니다. 하나로 합쳐 교회의 문제라 해도 가하겠지만 보다 명쾌한 이해가 요구됩니다. 교회를 떠난 복음 전파를 논의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교회 자체가 복음의 스캔들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사도 바울의 편지들을 읽어보시면 그가 교회 문제를 다룰 때 언제나 복음의 원리로 돌아가 거기서부터 해답을 제출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실 겁니다. 교회는 마치 자신들이 복음을 떠맡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가르침이 곧 복음(하나님의 일)이라 주장하지만 바로 거기에서 반복음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무신론자인 이반 카라마조프를 통해 설파한 '대심문관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가 주장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복음은 상관이 있는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이상한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고 해도 교회로부터 거부당하고 추방될 수밖에 없는 심각한 왜곡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작가는 여기서 서구의 기독교 즉 로마 가톨릭을 적그리스도요 반복음의 온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로마 가톨릭과 공산주의자들을 같은 부류로 분류했습니다. 가령 오늘날 프란치스코 교종의 진보적 실천을 보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열광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열광케 하는 정확한 지점이 복음일까요? 반대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엔 심각하고 교묘한 논점의 왜곡이 들어 있습니다. 과연 대작가다운 통찰이라 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후 2:17)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사실 매우 간단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지 말고 분노하지 말라', '시기·경쟁·질투·미움 등, 이 세상 사람들이 얽매여 살게 되는 모든 탐욕에서 할 수만 있으면 자유하라', '그 사랑과 자유를 전파하라'는 겁니다. 복음은 가난한 자도 행복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존재 방식입니다. 가난한 자도 행복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인 겁니다. 교회가 100년 동안 이 복음을 전파해 왔다면 어땠을까요? 교회가 이런 복음의 영향력을 사회에 끼쳐 왔다면 어땠을까요? 그러나 교회는 복음을 가난한 자들을 동정하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도덕적 선행으로 왜곡해 왔습니다. 교묘하지요? 착한 일을 하는 한 무슨 일을 해도 그것이 가능해진 겁니다. 이런 걸 프레임이라 합니다.

부패한 자들을 비난하는 도구도 이 '선행 프레임'에 갇힌 윤리성입니다. 여기서 더욱 극심한 혼란이 빚어졌습니다. 가장 부패하고 반(反)복음적인 자들도 얼마든지 윤리적인 주장, 도덕적인 제스처, 실천적 휴머니즘을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하는 말과 행동을 통해 그 사람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게 됐습니다. 비판하는 자나 비난당하는 자가 같은 부류일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제 가난한 자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게 됐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자들, 고통받는 자들이 없는 세상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그들이 있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싸움의 방식이 복음에서 선행으로 바뀌었으니까요. 그래서 가난한 자들은 적대를 받으면서 사랑을 받는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 놓였습니다. 누가 정말로 이들을 해방하게 할 수 있을까요? 백년 묵어 노회해질 대로 노회해진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가 영혼을 해방하게 하는 복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영혼들을 묶어 둘 복음이 발전돼 왔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가시는지요?

지금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사실은 중세기 로마가톨릭교회가 반복음의 온상이었던 것처럼 지금 한국교회라 통칭되는 조직과 기구 역시 반복음의 온상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과 싸운 겁니다. 저는 탈교회를 주장하거나 무교회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물론 탈대형 교회는 언제나 주장합니다. 그건 눈에 보이는 반복음의 증상이니까요.) 한 명의 기독교도로서, 그리고 아직도 교회에 희망을 걸고 있는 목사로서 복음의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모색할 뿐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가 탄생했지요? 이미 개신교가 탄생한 지금 또 어떤 것이 와야 할까요? 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것이 가나안 성도들의 느슨하고 광범위한 연대라거나, 탈교회나 무교회주의적인 어떤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건 그저 무력한 분산(分散)일 뿐입니다. 아직 목사로서 교회에 희망을 기대는 이유가 이것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

한때 오스왈드 스미스(Oswald J. Smith, 1889~1986)의 <구령(救靈)의 열정>이라는 책에 고무된 적이 있습니다. 캐나다 출신의 목사이자 저술가, 선교가인 그가 세운 교회가 코즈모폴리턴교회(Cosmopolitan Church)입니다. 이를 번역한다면 '세계시민(주의)교회'라 할 수 있겠지요? (우리 '자유인교회'라는 이름에도 모종의 영향이 있었을 겁니다.) 그 책에서 그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일반적으로 대개 교회들은 어떤 큰 결과를 목표로 삼지 않고 그저 운영해 나가는 것 같이 보인다. 여러 사람이 설교하지만 실제로 어떤 위대한 일이 일어날 것은 별로 기대하지도 않고 꿈도 꾸지 않는다.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떠내려온 것일까? 왜 이렇게 무기력해졌는가?"

탈색되어 한물간 느낌이 들기는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가 말하는 '어떤 큰 결과'나 '어떤 위대한 일'이 대형 교회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향력을 말하는 거겠지요? 쉽게 말하면 복음의 전파를 통해 기대해볼 수 있는 어떤 결과, 곧 복음의 사회적 파급으로 시대적 진전까지 이르는 하나님나라의 꿈을 역설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구령의 열정을 깨우며 외쳤던 '크고 위대한 일'이 대형 교회와 대형 건축물로 수렴되는 과정에 제가 말씀 드리는 심각한 복음의 왜곡이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곧 어떤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 구령의 열정을 교회 성장으로 엿 바꿔 먹었고, 대형화된 교회들이 나타나자 곧바로 구령의 열정은 식어 버렸습니다. 저도 한때는 거리 전도에 열심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시들해지고 말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들의 배경인 교회에 만약 구령의 열정이 있었다면 복음 전도는 우리의 명예가 되었을 겁니다. 우리는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전도를 계속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교회가 복음을 왜곡해 버리자 성도는 구령의 동력을 상실했습니다.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구령의 열정은 이단들이나 떠드는 한물간 메뉴가 되고 말았습니다. 잃은 것은 기독교 복음이요 얻은 것은 교회의 도덕입니다. 실종된 것은 기독교 신학, 발견한 것은 교회의 신율법입니다. 상실한 것은 복음적 구령의 열정이요 갈수록 허풍이 심해지는 것은 예배의 과장된 센티멘털리즘입니다. 그러면 어떡할까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전 7:14)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약 5:13)

어렵지 않습니다. 개인이나 시대나 형편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최소화된 근본적인 것, 기초적인 것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곧 복음으로 돌아가 영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면 됩니다. 복음으로 돌아가 기독교인으로서 구령의 열정을 회복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이 허황되고 찬란한 예루살렘에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야망으로 건설한 대형 건축물의 예배당과 로비와 회랑의 군중들 속에서는 영혼의 구원이란 게 뭔지 갈피를 잡지 못할 겁니다. 광야로 나가야 합니다. 거기에 무엇이 있지요? 아무도 없습니까? 아닙니다. 모세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있을 겁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고난받는 히브리인들을 자기의 골육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아니 자기가 히브리인 중 하나가 됩니다. 자기가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메시아가 아닌 겁니다. 대형 교회를 선망하거나 거기서 명성이 있는 목사님들을 대단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들이야말로 광야의 현실과 고립되어 공부가 안 되므로 기대할 게 별로 없는 선생들입니다. 예언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고 선지자는 언제나 광야에서 오는 법입니다. 예언자들처럼,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의 기만과 왜곡이 미치지 않는 광야로 나가 영혼의 신선한 생명을 회복해 돌아와야 합니다. 가나안 성도가 되든지 탈교회가 되든지,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눅 13:33)는 말씀처럼 먼저 자기 영혼을 살려야 합니다. 그다음에 구령의 열정을 회복해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일을 가슴에 품고 돌아오면 됩니다. 얼마면 될까요? 사백 명이면 될까요?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 22:1-2)

3.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다"는 기술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개인적 환난과 빚과 마음의 원통함이고 둘째는 그러한 개인들이 다윗에게로(하나로) 모였다는 점입니다. 영혼의 구원이란 먼저 개개인의 실존적 갈망과 고통의 배경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모여서 곧 서로의 실존이 서로에게 실존적으로 영향을 줘서 고통과 갈망으로 극복·해소하는 구원이 가능해진다는 점입니다. 환난과 빚과 마음의 원통함이란 본래 공동체로부터 소외이고 고립이었습니다. 광야로 나가기 전 그들은 이미 광야에 추방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 광야에서 새로운 가능성, 곧 본래 공동체에서 받지 못한 사랑과 연대, 거기서 나오는 힘과 희망을 발견합니다. 같은 힘과 희망이라도 그것은 전혀 다른, 새로운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전에는 개인적 안전과 행복, 가족 단위의 소박한 평안 추구라는 최소 단위의 사랑조차 불가능하게 했던 게 공동체였습니다. 세상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서 바로 그 최소 단위의 사랑을 회복하게 됩니다. 무엇을 통해서요? 공동체를 통해서입니다. 다른 게 구원이 아니라 이게 그들에게 구원이었던 겁니다.

저는 모태 신앙으로 교회에서 자라났지만 청년 시절 대부분을 교회를 떠나 있었습니다. 유학 간 다음 외로워 친구들을 따라 교회에 다시 나가게 됐습니다. 거기서 어느 날 정말 눈물이 왈칵 쏟아질 정도로 감동적인 말을 듣게 됐습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예배를 끝내고 식사하면서 교제를 하는데 누군가(제 아내였는지도 모르지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영혼들이 제게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여러분 정말 정말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전율이 일어났습니다. 어린 자매들이 저에게 'OO 형제님'하고 부르는 소리도 닭살이 돋을 판인데, '영혼들'이라니! 무슨 <죽은 혼>도 아니고? 그런데 '영혼들'이라는 그 말이 그렇게 아름답고 다정하게 느껴지는 거였습니다. '그렇구나. 우리가 바로 영혼들이로구나!' 그리고 영혼이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우리말에서 영혼(靈魂)이란 영(靈)과 혼(魂)을 합친 말입니다. 영·혼·육이라는 말도 쓰는 데, 굳이 설명해 보자면 영과 육의 매개가 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영이란 생명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고, 육이란 육체를 말하는 것이고, 혼이란 그 육체와 영을 살아있는 생명으로 인식이 가능하도록 매개하는 '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육은 설명처럼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전인적으로 하나입니다. 그러니 인간을 가리켜 '영혼들'이라거나 '육체들'이라거나 '혼들'이라고 해도 결국 같은 말이라 하겠습니다.

영이란 본래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루아흐(דוח)'를 신약에서 헬라어 '프뉴마(πνεύμα)'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 뜻은 호흡, 숨, 바람 이런 의미입니다. '성령'이라 할 때도 가끔 '거룩한'이라는 형용사가 붙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냥 '프뉴마'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영혼'이라 쓰일 때는 대개 영어로 '(living) soul'로 번역돼 있고 '영'은 'spirit'으로 번역돼 있습니다. 이 'spirit'을 일반적으로 '정신(精神)'이라 번역하지요? 아무튼 그러니까 '영혼'이란 살아 있는 인격을 가리키는 신학적인 표현이라 할 겁니다. 그러니 그 자매가 "영혼들이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말했을 때, 신학적으로 이런 전체적인 내용들이 그녀의 영혼의 감동과 함께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날 이후 저는 '영혼의 구원' 하면 곧바로 마치 거대한 공장의 기계들이 돌아가는 듯한, 우주의 천체들이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고는 했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막 8:36) 사실 이런 말씀은 성경에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생명이란 천하보다 귀한 것이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는 말을 들으면, 그 한 사람 안에서 돌아가는 영과 혼과 육의 쉴 새 없는 기계적 과정이 떠오르고는 했습니다. 그렇게 보니 아무리 천한 인간일지라도 세상에 신기하고 귀하지 않은 인격이 없었습니다.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 5:16)] 가령 우리가 부르는 찬송 가운데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있지요? 이런 고백이 가능해지는 것은 '영혼'에 대한 신학적이고 감동적인 고백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너의 영혼 통해 하나님이 받을 큰 영광은 선교나 봉사 같은 교회적 선행으로 귀착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그 찬양도 결국 어리석은 사람을 속여서 부려 먹으려는 수단이 될 뿐입니다.

인간 정신의 변화무쌍함과 다양함, 무한함은 실제로 전체 천하(우주)만큼이나 신비롭습니다. 그러니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일회적인 도장 찍기의 문제가 아닐 겁니다. 그것은 이전과 이후로 갈라지는 어떤 상태의 변화를 말합니다. 자기 영혼에 관한 무지와 거기로부터 나오는 온갖 고립되고 궁지에 몰린 영의 고통, 혼의 고통, 육체의 고통으로부터 일어난 상태적 변화입니다. 곧 영·혼·육의 전인격으로서 자기(自己)에 대한 근본적인 자각을 전제로 합니다. 여기서 타인에 대한 사랑도 가능해지는 겁니다. 개인의 심리적이고 상황적인 자각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자각이 점점 자라간다는 말입니다. 어디를 향해서요? 영, 곧 모든 존재의 보편적 본질을 향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자각된 내가 살아갈 실천의 방향과 방식과 순서가 매겨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보여 주신 십자가 곧 자기 컨트롤(부인), 자기 안에 들어오시는 신성의 자각(경배와 복종), 신적 사명의 깨우침(실천)입니다.

자각한 다음 전혀 요동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살인자처럼 어떤 선행이나 공로에 의하지 아니한 순간적인 귀의와 깨우침(깨우침과 귀의)에 의해 구원을 받습니다. 현실의 신분이나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생명의 본질 곧 하나님의 신성과 내 의식이 맞닿았습니다. 일체가 됐습니다. 마치 <죄와 벌>에서 살인자 라스콜니코프가 거리의 매춘부 소냐에게서 구원을 발견했듯이. 가장 비참한 환경 가운데서도 그 속에 물들지 않고, 썩지 않고 변하지 않는 순수와 긍정과 사랑의 세계를 만난 것입니다. 그 본질적 경험으로 그다음 상태, 타인에 대한 행동이 결정됩니다. 이런 자각과 체험이 전파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경험한 사람 자체가 이미 전파자인 겁니다. 동시에 전파된다는 것은 홀로 있지 않다, 고립을 거부한다, 함께 느끼고 체험할 대상을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그는 누구일까요? 결국 나와 같은 사람입니다. 나 같은 갈망, 나 같은 고통, 나 같은 결핍을 가진 존재, 그래서 나와 같은 구원을 찾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기꺼이 그를 형제님, 자매님이라 부를 것입니다. 또 그에게서 영혼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일부러, 억지로 구령의 열정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구령의 열정이 솟구칠 겁니다.

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4~17)

어떤 사람은 저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하나님은 믿는데 예수님은 도저히 못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계속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하겠지요?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면 제가 당신 앞에 하나님을 데려오면 됩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가능한 것은 당신에게 하나님에 관해 알려주는 겁니다. 당신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있을 때까지. 당신이 제 말을 잘 알아듣는다면 당신은 제가 이해한 하나님을 만나는 법을 알게 될 겁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그것이 당신이나 내가 안 하나님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통해 하나님을 알았다고 하는 거지요? 하나님에 관한 말(지식, 경험)입니다. 그러나 정확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말과 지식과 경험이 우리 안에서 어떤 작용을 일으킨 겁니다. 바로 그 우리 안에서 어떤 작용을 일으킨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감화·감동·역사(役事)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중개자가 되어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바로 그리스도를 '말씀(로고스, λόγος)'이라고 했습니다. '로고스'란 중개자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가 중개자라니요? 맞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과 그의 사적들을 통해 그에게서 하나님을 아는 로고스를 봅니다. 하나님을 깨우쳐 주는,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하나님나라를 제시하는 영혼의 전형·모범·모델·표상 곧 그리스도(메시아, 구원자)를 봅니다. 그래서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육체로만 본다면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부르는 이치를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고 전파하는 신실한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들을 많이 봅니다. 어떤 목사님은 (자기도 모르겠으니까?) 아예 믿는 데는 지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로 넘기는 경우도 봤습니다. 무조건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참 난감하고 황당한 경우입니다. 기독교는 경전이 있고 설교가 있는 종교입니다. 만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거라면 성경도 설교도 그야말로 교회도 필요 없는 게 아닙니까.

그리스도가 누구냐? 그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중개자이자 매개자입니다. 라스콜니코프에게 소냐와 같이, 그러나 여기서 소냐는 다시 그리스도의 중개자가 되는 것이지 그녀가 그리스도인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의 삶을 통해 누군가에게 구원의 통로가 된다는 말은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로고스가 아닌 육체로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적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 곧 복음의 깨우침과 자각을 통해 구원에 이릅니다. 자꾸만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식으로 예수님의 육체를 강조하는 것도, 무조건 예수님을 신적으로 비약하는 것도 다 문제입니다. 육체와 신성이 같이 중대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가 바로 이런 말입니다.

말만 들어도 그게 뭔지 모르기 때문에 꼼짝할 수 없는 글로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있습니다. 현대판 '네피림'이라 할 수 있는 이런 '리워야단'들이 각 지역에 뿌리박은 가족 단위의 소농과 소상인과 소규모 자영업자들을 파탄하게 하듯, 대형 교회라는 맘모스도 작은 교회 공동체들을 해산해 왔습니다. (그게 왜 우리 잘못이냐고 묻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은 누구나 살 권리가 있는 거니까요.) 저희 교회도 개척 이래 지금까지 교회에 출석했던 사람들을 다 합친다면 모르기는 몰라도 100여 명은 넘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나요? 거의 대형 교회로 흡수됐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건대 저는 그들 중 누구와도 미워하는 일을 만든 바도 없고 미워하는 일이 발생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묻고 싶어집니다. 제가 나쁘거나 교회가 싫지도 않았는데 왜 떠났을까요? 이유는 다양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하나입니다. 그들이 부디 원하는 것을 얻었기를 바라지만 저는 동시에 그들이 상실한 것도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말하자면 우리가 매주 나누는 광야의 차려진 성찬과 식탁 같은 겁니다. 그들이 우리를 떠난 것이 아쉬워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천만에요. 자존심이 있지요. 그들이 우리와 함께 얻었던 것을 못 얻을 게 아쉬운 겁니다. 이 실존적이고 소박하고 구체적인 인간관계를 통한 영혼 구원의 경험 말입니다. 이해가 가시겠지요? 왜 자식들을 사랑하듯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사랑만이 여러분에게 구원인지 말입니다. 서로 간의 영혼을 발견하지 못한 영혼 구원이란 어불성설에 언어도단입니다.

5.

오늘날 현대적 설교들은 신학적으로 모순일 뿐 아니라 나쁜 의미로 자극적입니다. 막장 드라마들이 생산되는 배경과 다르지 않습니다. 대중의 콤플렉스에 맞추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대형 교회의 설교들은 대개 중산층 이상의 부유층들의 양심의 갈등을 해소해 주는 데 그 핵심이 있습니다. 나머지는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가는 겁니다. 중세기 면죄부 판매와 다르지 않습니다. 본질에 도달하지 못하고, 도달하려는 부단한 신적 인도하심에도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것, 쉽게 말해 성도들과 공동체를 무한 반복의 기도 응답 같은 데 몰두하게 만드는 것, 그 속에 사단적 저의가 숨겨져 있다고 해야 할 겁니다. 그들은 공동체 전체의 복음적 자각을 결코 원하지 않으며 끝없이 훼방합니다. 정직한 설교라면 오히려 그들의 모순과 콤플렉스의 구조가 드러나야 합니다. 착한 일과는 명백히 다른 길입니다. 영혼의 자각이고 전파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복음의 울림이 예루살렘을 흔드는 구령의 열정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영혼의 자각이 없어 고립된 심리적 자기모순을 거대한 예배당과 센티멘털한 예배로 무마하려는 풍조에서 깨어나십시오. 콤플렉스 대신 복음을 품고 더 이상 교회의 상업적 욕망에 가담하지 않는 용감한 평신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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