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

오늘은 종교개혁 498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비텐베르크 대학교회 정문에 교황주의와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적은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인 날이 1517년 10월 31일입니다. 루터란(lutheran)과 조합교회가 이날을 종교개혁 기념일(Reformation Day)로 정했고, 개혁주의 및 복음주의 전통에 따르는 교회들도 가세해 기념하게 됐습니다. 그게 500년이 된 겁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마르지 아니한다"(<용비어천가>)는 말을 새삼 새겨보게 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각자 구명도생(苟命徒生)하는 것도 바쁜데, 누가 종교개혁의 역사까지 기억하겠습니까? 모름지기 95개조의 반박문은 몰라도 <잊혀진 계절>은 기억할 겁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 시월의 마지막 밤을 /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 우리는 헤어졌지요." 농담이 아니라 제목과 가사가 참 절묘합니다. 사실 우리는 사는 게 너무 빠르고, 바빠서 살아온 걸 잊고 삽니다. 40년, 50도 까맣게 잊기 쉬운데 500년이면 어떨까요? 망각은 당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 그런 연고로 명절이 있고 기념일이 있는 거겠지요? 저는 전도사 시절부터 종교개혁주일에는 특별히 기념 설교를 해 왔습니다. 추수감사절도 아니고 종교개혁주일을 기념한다고 하면 동료 목사들도 특이하고 의아하게 받아들입니다. 새삼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제 바람을 말씀드리자면, 새삼스럽지 않은 게 아니라 새삼스러워야 하고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 새삼스럽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대부분 역사는 몇몇 권력자나 천재를 중심으로 기술되게 마련입니다. 종교개혁사도 불가피하게 마르틴 루터부터 거론하게 됩니다. 그러나 루터 얘기를 하는 것은 영웅 루터의 위대함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도구입니다. 정작 루터의 위대함은 오히려 소박함에 있었습니다. 루터는 여러분이 사진을 보셨을지 모르겠지만 전형적인 독일 병정 스타일입니다. 장군감도 아니고 성직자감도 아니고 기품 있는 귀족이나 지성미 넘치는 학자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이라는 신학자는 그를 가리켜, "현명함 없는 현인이며, 정책문(政策文) 없는 정치가이며, 예술품 없는 예술가이며, 세계 안에서 세계를 구하는 사람이며 (중략) 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며, 권위를 비웃으나 권위에 매어 있고, 이성을 배격하나 또한 옹호한다"고 평했다고 합니다.

현 독일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그녀는 동독 출신 목사의 딸입니다)도 그렇고,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독일 역사를 보면 그런 경우들이 더러 보입니다. 비근한 예로 저 악명 높은 히틀러도 출신을 생각하면 그의 권력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어집니다. 비교할 수는 없는 위대한 인간이지만 루터에게도 그런 점이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에게 왜 비범함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강조해야 할 것은 루터를 통해 드러난 복음입니다. 복음의 위대함이 그를 각성하게 했고, 루터는 복음의 부름에 소박하게, 정직하게, 그리고 용기를 다해 응답해 나갔던 겁니다. 이 점이 끝까지 역사의 현장에서 고립되지 않은 지도자로서 일반적인 권력자들과 다른 그의 위대함일 겁니다.

3.

마르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아이스레벤에서 구리광산 광부의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당시는 중세기의 끝부분으로 개명하지 못한 시대였습니다. 교황과 고위 성직자, 황제와 제후들의 각축과 전쟁 아래 민중들은 신음했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의미를 자각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교황과 교회에 순종적인 분위기였던 겁니다. 곧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회가 제공하는 순례와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 성자숭배, 성모 마리아와 그녀의 어머니인 성(聖) 안나 숭배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부유층에서는 성자 유골 수집이 유행했고, 면죄부가 팔리고 있었습니다.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르네상스 시대 교황과 추기경들의 이야기를 통해 종교개혁 전야를 보여 준 바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그러나 문제는 이런 상태가 일상이라는 데 있겠지요? 일상이란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라 늘 그래 왔던 겁니다. 성직매매, 친족 등용, 성직 겸직, 축첩 등에 얽힌 온갖 추문과 협잡과 살인과 음모는 늘 그래 온 일상이었기 때문에 특별할 게 없었습니다. 새롭게 이름 붙여지는 세금과 공공요금과 벌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게 다 관행입니다. 고위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면 피라미드처럼 타고 내려가 결국 평민들이 짊어지게 되는 구조입니다.

한편 상층부와 달리 실제 목양을 담당하는 하위 성직자들은 대부분 교육을 받지 못했고 지독히 가난했습니다. 교육을 받았다 해도 별 수는 없었을 겁니다. 구조적 무력함이라는 게 있잖습니까? 변화라는 것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야 가능해집니다. 워낙 움치고 뛸 수 없는 전체적 구조 속에서 몇 사람이 각성을 한다고 개혁이 가능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놀라운 건 바로 이런 정체 속에도 계속되는 영적 흐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설교는 교회와 강단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은 도구에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모든 게 그의 도구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가르칠 수 없을 때는 세상이 교회를 가르치기도 하는 겁니다.

교회가 세상의 위협을 받는 것은 종교에 대한 무관심 때문만은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진리를 전파하려는 것만큼이나 세상도 교회를 향해 그것을 요구합니다. 역설이지요? 고통이 있는 곳에 발생하는 영적 갈망이야말로 교회의 위협이 된다는 역설이 있습니다. 가장 성서적인 입장이 가장 교회의 위협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시대의 영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때 각성은 교회 밖에서도 옵니다. 16세기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9∼1536)가 주도한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의 활동이 그런 것입니다.

인문주의(人文主義, humanism)는 르네상스(Renaissance, 고전 시대로의 부흥·재생·복귀의 종합적인 문화 운동)의 열매로 생겨난 경향입니다. '휴머니즘'은 '인간중심주의'라는 의미와 '박애주의'의 의미를 같이 갖습니다.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거룩한 문학과 인간적인 문학, 성서와 인문·교양을 함께 연구하고 가르쳐서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이때 세상이란 교회이기도 합니다. "교회를 변하게 해야 세상이 변화된다",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종교다"는 의미입니다. 지난해 개봉한 <쿼바디스>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한 인터뷰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교회가 바뀌지 않으면 한국이 망할 거다." 이 말이 그런 의미일 겁니다. 교회를 무조건 적대하고 분쇄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대하고 있다는 거지요? 이런 점이 인문주의자들과 개혁자들의 교집합이자 합집합입니다. 루터도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나고 자랐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4.

루터는 어렸을 적부터 자신의 죄성과 불안의 문제에 대해 깊은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종교와 자의식이 따로 존재한 게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모든 문제가 곧 종교의 문제였던 겁니다. 1501년 문학 석사를 마치고 법학부에 다니던 어느 날 급우가 낙뢰로 사망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공포 속에서 그는 성(聖) 안나에게 수도사가 될 서약을 하게 됩니다. 똑똑한 아들에게 기대가 컸던 아버지는 매우 화를 냈지만 그는 끝끝내 법학을 포기하고 아우구스티누스 은둔 수도원으로 들어갑니다. 자기 영혼의 문제에 관해서라면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다는 고집과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수도원에서 루터는 철저한 금욕과 계율에 입각한 청빈 생활을 하면서 설교와 성서 연구를 하게 됩니다. 그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탐구하는 진지한 학자로 수도원의 연구 책임자가 됩니다. 동시에 수도원 교구를 맡아 설교자로 사역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영혼이 안식하지 못한다는 뿌리 깊은 고뇌가 늘 붙어 다녔습니다. "내가 하는 이 일을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심지어 사제로 서품되는 순간에도, 첫 미사에서도, 그는 불안과 의심으로 딴 생각에 빠져 의식을 망쳐 버립니다.

덴마크의 민담에 이런 게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목사님이 두 요정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려 합니다. 그 요정들은 제대로 따라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첫 문장부터 "하늘에 계시지 않은 아버지여"라고 말해 버립니다. 그런 정도는 아닐지라도 이런 곤혹스런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말하자면 루터는 이러한 믿음의 곤혹들을 믿는다는 자기 세뇌로 덮는 게 아니라 그 실존의 고뇌와 싸우면서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1502년 작센의 선(選)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세운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됩니다. 그리고 1510년에서 1511년까지 로마를 여행하게 되는데 거기서 또 한 번 기억할 만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곧 죽은 삼촌을 위해 면죄부를 산 루터는 다른 조상들의 영혼도 자꾸만 생각났지만 돈이 모자라 살 수가 없었던 겁니다. 참 난감하면서도 회의스런 일이었겠지요? 곧이어 참회를 위해 바티칸 성당 계단을 피가 나도록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던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이 모든 일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고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됐던 겁니다. 믿고자 하면 할수록 거룩하고자 하면 할수록 그 반대도 커졌습니다. 안 믿는 것도 아니고 믿는 것도 아닌 상태, 그 상태에서 하는 확신 없는 행위들. 누군가 가르쳐 준 대로 따라하는 관행.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정한 체험이 없는 일방적 신앙의 무의미함을 절감했던 겁니다.

루터는 1512년 신학 박사가 되었고, 성서학 교수로 시편과 신약성서를 강의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평안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를 압도하는 하나님 앞의 죄의식은 고해성사와 금욕으로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고해신부는 그가 너무나 자주 고해를 하러 오니까 "죄들을 모았다가 한꺼번에 가지고 오라"거나, "참된 회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다"며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죄를 지으라"고 용기를 주기도 합니다. 사변적인 신학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러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때, 로마서 말씀이 그를 구원해 줍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구원이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에 근거한, 하나님과의 새로워진 관계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무조건적 용서만이 구원이었습니다. 자신의 오랜 회의와 고통의 의의가 이로써 밝혀집니다. 곧 구약성서적인 율법은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죄인에게 죄를 깨닫게 해 주고 '자기 의'를 철저히 부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데 뒤엉켜 통일되고 일관된 신앙을 가르쳐 주지 못하던 지식들이 정리되고 분명해지면서 마음의 고뇌가 뚫렸습니다.

5.

깨달음 뒤에는 항상 "그렇다면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현실은 무엇인가?" 비판적 의문이 따라옵니다. 그것이 깨달은 자의 사명입니다. 루터는 이러한 깨우침에 입각하여 가톨릭교회의 가르침들의 비성서적인 지점을 발견합니다. 교회가 가르치고 요구하는 행위들을 통해 하나님이 은총을 주신다는 가르침은 거짓이고 인간들의 지배욕의 도구들에 다름 아님을 밝혀냅니다. 그것은 이미 한 개인의 구원을 넘어선 문제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1517년 루터는 갈수록 더해지는 교회의 악폐에 반대 의사를 표명해야 할 의무를 느끼게 됩니다. 이 해에 교황 레오 10세는 알브레흐트라는 성직자에게 한 번에 세 곳의 주교직을 허용했습니다. 목회하지도 않고, 앉아서도 천리 밖의 세금을 걷어 들이게 된 겁니다. 알브레흐트는 은행가에게 거액을 빌려 겸직금지를 면제해 준 교황에게 상납을 합니다. 그 대신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위해 교황이 발행하던 면죄부를 자기의 모든 교구에서 팔고 그 절반을 자기 몫으로 받기로 계약을 합니다.

수금 담당자는 요한 테첼(Johann Tetzel, 1470~1519)이라는 부흥사였습니다. 그는 가능한 많은 수입을 위해 온갖 극적인 효과를 낼 줄 아는 능력 있는(?) 설교자였습니다. "금고 안에 동전 한 닢이 소리를 내며 떨어질 때 한 영혼이 연옥에서 솟아오른다." 그러나 이 말쟁이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테첼은 작센에 입국을 허락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어쩌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면죄부를 사러 갔습니다. 이에 루터는 면죄부 판매를 맹렬히 비판하는 설교를 하고 '95개조의 반박문'을 써서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를 관할하는 알브레흐트 대주교와 제롬 주교에게 보내고 대학 교회의 문에도 붙이게 됩니다.

루터는 대주교와 교황 사이의 거래를 알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것은 단지 목회적이고 신학적인 이유였습니다. 학문적 토론을 위해 라틴어로 쓰인 95개 조항이라는 문서도 대폭발을 일으킬 만큼 과격한 문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교황의 면죄부 판매의 권리 자체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교리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그만두게 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기대했던 겁니다.

면죄부보다 그가 더 중요하게 다룬 것은 회개와 고해성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관행이었습니다. 즉 회개와 용서란 고해성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마음과 지성의 자각에 의한 평생에 걸친 지속적 변화라고 주장했습니다. 고해성사 무용론인 셈이지요? 하나님과 죄인 사이, 성직자라는 직책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95개 조항'이 독일어로 번역되자 몇 주 안에 전 유럽으로 퍼지게 됩니다. 확산의 주동자들은 독일의 인문주의자들이었습니다. 루터는 비로소 비텐베르크 밖에도 자신과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6.

잉골슈타트대학의 신학 교수요, 한때 루터의 친구이기도 했던 요한 마이어 엑크(Johann Maier of Eck, 1486~1543)는 루터를 이단으로 기소합니다. 1518년, 대주교 알브레흐트와 도미니칸 수도사들은 루터를 다시 로마에 공식적으로 고소합니다. 무조건 굴복하든지 아니면 끝까지 주장을 밀고 나가든지 여지없는 선택에 몰리게 됩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의 책을 검열하고 답변서를 제출하도록 했고, 로마교회는 면죄부를 판매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단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60일 이내에 로마에 출두하도록 명령받은 루터의 운명은 선(選)제후 프리드리히에게 맡겨지게 된 겁니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영지에서 유명해진 젊은 신부를 사지로 보낼 수는 없다고 판단해 로마의 지시를 거절합니다. 그 대신 아우크스부르크의 제국의회에서 교황의 사절에게 답변하도록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교황의 사절은 루터와 일체 토론을 하지 말 것과 어떻게든 그를 체포할 것을 명령받고 옵니다. 그는 루터가 교황의 면죄부 판매 권한을 인정만 하면 사건은 끝나게 될 것이라 설득합니다. 루터는 거부합니다. 그는 나아가 이 문제를 공의회에 부칠 것을 제안합니다. 무명(無名)의 일개 수도사가 공의회를 요청하다니 가톨릭교회는 황당할 정도로 당혹감에 빠지게 됩니다.

독일 인문주의자들은 이때야말로 독일 민족이 로마로부터 독립할 기회라고 생각하고 루터를 돕기 위해 결집합니다. 루터는 이제 이 문제가 얼마나 크고 거대한 문제였는지 깨닫게 됩니다. 교황이라는 체제로부터 적그리스도의 얼굴을 발견하게 됐던 겁니다. 마침내 독일을 교황으로부터 영적으로 해방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임을 깨닫게 됩니다. <독일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논문에서 그는 독일 전체가 종교개혁에 참여할 것을 역설합니다. "교황의 학정은 끝나야한다. 공공요금과 과세는 억제되어야 한다. 억압은 철폐되어야 한다. 독일교회의 문제는 독일감독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성직자는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 과다한 교회 축일은 절제되어야 한다. 탁발종단과 걸식은 금지되어야 한다." 마치 선거 유세를 하듯 공창의 폐지, 사치의 억제, 대학과 신학 교육의 실천적인 개혁안을 제시합니다. 독일 사회는 열렬한 환영으로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된 찰스 5세는 부분적 개선에는 동의하지만 로마 체제에서 이탈하는 것은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는 문제 해결을 위해 보름스 국회를 엽니다. 교황은 대칙서를 통해 루터를 파문하는 파문장을 보냅니다. 그러나 루터는 이것을 찢어 버립니다. 황제는 루터가 이단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제후들뿐 아니라 독일 민족 전체의 지지를 받고 있는 루터를 죽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습니다. 루터는 마침내 보름스국회에서 입장을 밝힐 마지막 기회를 얻게 됩니다. 국회는 루터에게 그간의 교황에 대한 모든 불경을 취소할 것인지 묻습니다. 루터는 자신의 성서적 논증이 잘못됐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 이상 철회할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루터는 "나는 달리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라는 말로 청문회를 끝냈다고 합니다. 루터가 말한 '여기'란 어디일까요? 육신의 궁지이지만 영혼의 진리인 자리. 그 자리 외에는 자신이 안전하지도 안전할 수도 없다고 말했던 겁니다. 황제는 분노했고 토론은 중단되었습니다.

루터는 누가 보든지 곧 죽임당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가 아닌 독일의 정세가 다시 한 번 그를 살립니다. 선(選)제후가 그를 납치해 발트부르크성(城)으로 도피하게 했고 그가 사라지자 독일 민중들은 들끓기 시작합니다. 그는 저술을 통해 종교개혁의 지도자로 부상합니다. 그의 글은 삽시간에 전 독일에 퍼지고 종교개혁의 불길이 바람을 타고 타오릅니다. 루터는 독일어로 신약성서를 번역합니다.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겠지요? <성서>가 민중을 각성시키는 원천이 되어 역사의 전면에 나왔던 겁니다. 당시 '새들의 성'이라는 의미를 지닌 발트부르크 성에서 루터가 스스로 작사 작곡한 노래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하는 곡입니다. 개신교 찬송가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은 이 찬송을 '알프스의 눈사태'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1521년 가브리엘 츠빌링은 미사를 비난하고 성직자 서약 철폐를 촉구합니다. 이에 따라 많은 수도사들이 직책을 버립니다. 성탄절에 칼 슈타트는 사제의 의복, 헌물, 봉헌 없이 평신도들에게 잔을 주고 성찬을 거행했습니다. 모든 성직자가 결혼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자신도 결혼했습니다. 그는 공중 예배에서 성화, 오르간, 그레고리안 성가를 거부했고, 예배를 독일어로 드리도록 했습니다. 또 시 예산으로 구제하여 빈민들의 구걸을 없애도록 개혁 조치를 실현했습니다.

같은 시기, 스위스의 취리히에서도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의 주도로 개혁 운동이 시작됩니다. 이후 독일과 프랑스, 스위스, 영국 등 전 유럽에서 민족운동이 일어나고 농민반란과 종교개혁이 뒤엉킨 연속 사태가 일어나고 마침내 신교와 구교의 대립은 전쟁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 역정에서 루터는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로 종교개혁을 지도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위해, 혹은 진리에 반한다는 명목으로 죽어갔는지 모릅니다. 츠빙글리는 카펠 전투에서 자신의 아들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스위스의 제네바에서는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이 종교개혁운동을 이끌어 갔습니다. 흔히 마르틴 루터와 울리히 츠빙글리와 장 칼뱅을 '종교개혁의 세 지도자'라 부릅니다. 그러나 다시 강조해야할 것은 역사란 단지 이 세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역사가 불러낸 도구들이었고 지도자나 권력자가 아니라 철저히 도구로 역사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위대한 점입니다. 고골(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Гоголь, 1809~1852)의 소설 <죽은 혼>에 등장하는 죽은 농노를 팔러 다니는 사기꾼처럼 로마교회는 끝까지 그들을 풀어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벗어나려는 영혼의 절규는 죽음을 불사하고 번져 나갔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 속에 깃든 영적 전투의 본질입니다. 묶어 두고 지배하려는 자들과 벗어나려는 자들의 분투. 이것을 치장한 모든 장치들은 허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르네상스는 종교개혁으로 열매 맺으려 하고 있었던 겁니다.

7.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주께서 나에게 주의 사랑하는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나는 그를 사람들에게 가르쳤으며 그를 알았고 내 생명처럼 그를 사랑했습니다. 나의 혼을 주께 드립니다. 내 영을 주께 의탁합니다. 주께서 나를 구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555년 마침내 아우크스부르크화의(Augsburg Settlement)라 불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프로테스탄트 제후들 간의 강화가 이루어집니다. 이로써 개신교(루터파)와 가톨릭교회는 신앙적인 갈등을 중단하고 각 군주가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자유)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장로교'라 불리는 '칼빈주의적 개혁파'는 여기서도 중앙집권화한 종교적 위계를 거부하여 군주의 교회 지배를 반대했기 때문에 제외되었습니다. 이해하시겠지요? 개혁주의 교회는 세상 권력에 대해 그토록 철저하고 비타협적인 말씀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였던 겁니다. 그것이 모름지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스위스 제네바의 정신일 겁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망각이 아니라 강요에 의해 과거를 잊을 것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바꿀 수는 없으니 역사 교과서라도 바꾸어 집단 기억 속에 몇몇 개인들을 우상화하려 합니다. 그들에 대한 비난이나 칭송을 떠나 개인의 신격화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 시대의 물밑에서부터 차오르던 민중의 기대와 각성의 진전을 다시 역사 속에 묻어 버리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 나온 역사는 단지 위대한 몇 명의 위인이 생산해낸 공로가 아닙니다. 세속사뿐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를 신화화하고 그 명성과 공로를 과장하려는 술수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마르틴 루터와 같은 지도자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인간에 대한 찬양과 높임 뒤에는 반드시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엡 6:12)의 숨겨진 중층구조가 있습니다. 그런 역사야말로 우리를 다시 어둠 속으로 끌고 가려는 술수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개인에게 나타나서 그를 살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믿음은 개인에 그칠 수 없는 겁니다. 개인이나 국가가 교회나 역사를 잊어버린 미래란 있을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가 빠져나온 질곡의 역사를 망각한다는 것은 겨우 빠져나온 전철을 다시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나 정권의 관료들이 회개한 역사가 없듯이 목사들이 교회를 변하게 할 수 없음도 증명되고 있습니다. 다만 믿을 건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시대의 영적 갈망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지금도 진전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있는 걸까요? 이 종말론적 하나님의 부르심을 감지하고 참여하는 평신도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독일의 비텐베르크와 스위스 제네바의 개혁 정신이 우리들의 교회와 나라에 구현될 날이 속히 오기를 고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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