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시대의 징조를 읽지 못한 독일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때로는 종교적 탄압의 시기에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은 종종 정치적 현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결단을 강요받을 때가 있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 저항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린 본회퍼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히틀러의 나치당이 정권을 획득하였을 때 독일 시민들과 그리스도인 대다수는 히틀러와 나치당의 정책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참혹했던 2차 세계대전과 그 기간 동안 자행되었던 강제수용소에서의 만행 등을 통하여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완료된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사실은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땅에 떨어진 독일의 민족적 자긍심을 회복시켜 주었고, 대외적으로는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대내적으로는 질서의 유지를, 경제적으로는 번영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잃은 것은 사소한 일상적, 법적 자유뿐이었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당시의 혼란한 사회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분하에 총통에게 초법적 권력을 부여하였고, 정권의 지시에 대한 일방적인 순응을 곧 독일이라는 국가에 대한 충성과 동일시하였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여 실의에 빠진 독일인들에게 아리안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히틀러 정권은 국가와 민족의 새로운 구세주 같았다. 

히틀러가 정권을 획득한 후 가장 집중한 부분은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국론 통일'이었다. 1933년 2월 28일, 히틀러는 공산주의의 위협 앞에서 독일 민족을 수호하고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개인의 자유, 언론, 집회, 결사의 권리를 제한하는 긴급조치 1호를 발효시켰고, 독일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을 고취하기 위해 모든 공직에서 외국인을 축출하는 '아리안 조항'을 관철했다. 아리안 조항을 교회에 적용한 것이 바로 루트비히 뮐러를 제국감독으로 하는 제국교회였고, 당시 무수한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민족과 조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히틀러의 조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집단이 바로 독일그리스도인연맹이라는 조직이다.

히틀러가 정권을 획득하고 난 직후 일어난 일련의 초법적, 반인권적 행위들에 대하여 대부분의 목사들은 단지 제한적으로만 저항하였다. 나치 정권이 제국교회를 통하여 교회를 제어하려는 것에 저항하여 발생한 목사긴급연맹이나 고백교회의 저항 역시도 사실 대단히 한정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단지 히틀러가 국가로부터 교회의 독립이라는 오래된 독일 교회의 전통을 깨뜨리고 새로운 제국 단위의 조직을 수립하려 한다는 데에만 한정적으로 항의하였을 뿐이다. 히틀러와 그의 불법적 통치 행위 자체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사실 극히 소수였다. 심지어 고백교회의 지도자로, 나치 정권에 의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던 마틴 니묄러조차도 공산주의와 노조에 대한 탄압이 자행될 때에 침묵하고 단지 교회 내적인 투쟁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이를 고려해 보면 -그리고 심지어 히틀러가 국제연맹에서 탈퇴하면서 독일이 지닌 국제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찬사를 보낸 것을 보면- 사실 히틀러 정권 자체에 대한 저항은 교회 가운데 거의 전무하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 예외적인 경우가 바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젊은 신학자 본회퍼였다. 스위스에서 라디오방송을 통해 히틀러에 대한 조직적 저항을 촉구하였던 바르트도 사례로 들 수 있다. 

도대체 무엇이 독일의 교회로 하여금 히틀러의 자행에 눈감게 하였을까? 섣불리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 대체로 국가와 교회의 영역의 분리라는 오랜 교회 전통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본회퍼와 바르트 등이 함께 했던 고백교회도 국가가 교회 영역에 개입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만 한정적으로 저항했다. 히틀러가 독일 민족의 번영과 발전을 내세우고, 국론 통일이라는 미명으로 독일 사회의 다양성을 말살해 버리는 것에 대해 시의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독일 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참혹한 결과에 대한 방관적 동조자 역할을 했다는 비판을 피해 가기 어려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시대의 징조를 읽지 못하고, 단지 종교적인 영역에만 그리스도인과 목회자, 신학자들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을 때 우리는 은연중 인류 전체에 대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고백을 강요받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에 휩싸여 있다. 사실 이 논란은 사회에 있는 다양한 의견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 행위를 통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 정부와 새누리당의 강력한 의지로 촉발되고 강요된 논란이다.

2014년 2월, 박근혜 대통령은 역사 교과서에 "사실 오류와 이념적 편향성 논란이 있다. 사실에 근거한 균형 잡힌 역사 교과서 개발 등 개선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정부와 새누리당은 기존의 검정제를 폐지하고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에 몰두하고 있다. 지난 10월 2일에는 교육부가 현재의 역사 교과서가 "북한 교과서"같다며 말도 안 되는 이념 논쟁을 촉발했다. 새누리당은 이에 질세라 "긍정적 국가관"을 확립하고 "국론 통합"을 이루는 역사 교과서가 필요하다고 바람잡이에 나선지 오래다. 특히나 이들은 역사는 '하나'인데 어떻게 서로 다른 교과서가 있을 수 있냐며,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우수성을 인정하는 올바른 교과서가 필요하다면서 북한과 같은 독재 국가에만 있다는 국정교과서를 내세우고 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정부와 새누리당의 주장을 이 자리에서 하나하나 논박할 수는 없다. 이는 사실 불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들고 나온 것은 사회적 논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를 기어코 관철해 얻게 될 이념적·정치적 이익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세세한 주장들을 비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본고에서는 우리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해 어떻게 신앙적으로 판단해야 하는지에 집중하려고 한다.

필자는 정부와 새누리당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와 관련하여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에 집중하려 한다. 그것은 소위 '정부가 주도하여 하나의 통일적인 역사관을 수립하여 국론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전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대한민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가 단일한 역사관을 수립해야 한다는 전제 자체가 철저히 반민주적인 사고방식이다. 특히나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서 소위 '국론 통일'이란 언제나 사회 각 부분의 다양한 민주주의적 요구들을 억누르는 데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같은 발상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독재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거부되고 저지되어야 한다. 특히 대한민국과 같이 다양한 사회 분야의 발전이 이미 일어난 국가에서 정부의 역할은 언제나 최소화되어야 한다. 다양성의 존중을 통한 사회의 성숙을 지향해야 하지, 정부가 일방적으로 국민의 사고방식을 구획 짓고자 하려는 시도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우리의 신앙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어쩌면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그것이 하나의 정치적 문제이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은 곧 신앙의 문제이다. 히틀러의 나치 독일 사례로 보듯이 하나의 단일한 역사관, 통일적인 국가관을 주입하려는 시도는 결코 정치적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국가관 밑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복속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지난 근현대사를 통해 군사정권 치하에서 교회가 독재자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행태를 반복해 왔던 것을 보았다. 민주주의가 파괴되어 가는 것은 결코 '하나의' 정치적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수권자의 의지에 따르도록 복속하는 하나의 '신앙적 사건'이 될 수밖에 없다. 

1933년 독일에서 국가는 교회와 신학으로 하여금 총통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선포하고, 유대인을 신앙 공동체에서 배제하여 성서를 독일민족과 국가의 이익을 따라 해석하도록 강요하였다. 사회의 다양성이 압살되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곳에서는 신앙의 왜곡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통수권자의 의지와 정권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회에서 복음의 온전한 전파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1933년의 독일과 교회가 보여 준다. 그리고 나치 정권의 교회 통제 야욕에 맞서서 투쟁하였던 고백교회가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을 전면에 내세웠던 것 역시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신체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의 시작이다. 역사를 보는 다양한 눈과 즐거운 토의를 억압하는 것은 우리의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가두는 일의 시작이다. 만일 독일 교회가 1933년에 일찌감치 이 일의 시작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만일 독일의 그리스도인들이 공산주의자, 노조원, 유대인들이 사로잡혀 갈 때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강력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그들은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 새어 나오는 연기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독일의 교회가 일찌감치 국가의 획일적 통일화의 시도를 거부하고, 제국교회에 대한 저항을 일찍 시작하였다면 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극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신앙고백으로 히틀러를 새로운 구세주로 섬기려는 시도에 일찌감치 맞서려 했다면, 그들의 신앙고백이 조금만 더 빠르고, 조금만 더 힘 있는 것이었다면, 역사는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까.

2015년 10월, 지금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고백을 강요받고 있다. 시민의 자유로운 양심과 사상을 정부가 주도하는 하나의 가치관 아래로 '통일'하려는 시도에 맞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양심과 삶의 주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럴 수 없다면, 역사는 이제부터 써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용주 /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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