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1.

우리나라가 OECD 국가들의 실질 문맹률 비교에서 최하위(꼴찌, 22위)를 기록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실질문맹률'이라는 건 단순히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실생활에 사용되고 있는 일상 문서들을 얼마나 해독할 수 있느냐는 조사라 합니다. 이걸 '문해율'이라고도 부릅니다.

조사에 사용되는 국제성인문해능력조사(International Adult Literacy Survey, IALS)는 세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논설·기사·시·소설 같은 텍스트를 평가하는 산문 문해, 둘째, 구직 원서·급여 양식·버스나 열차 시간표·지도·표·그래프와 같은 문서를 평가하는 문서 문해, 셋째, 금전 출납·주문서·대출 이자 등 인쇄된 자료에 포함된 숫자나 수학 공식을 평가하는 수량 문해입니다. 자국어의 경우를 조사한 것이지만, 여기에 외국어(영어)까지 포함시킨다면 아찔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1

'문해율'과 달리 '난독증'이라는 말도 자주 듣습니다. 단순히 글을 읽고 해독하는 데 지장을 받는 병증이 아니지요? 관계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완고함·편협함·신념 같은 것들이 난독의 원인입니다. 같은 말로 말하고 같은 글로 쓰는데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가령 외국어의 알파벳은 알지만 뜻은 모르는 것과 같을 겁니다. 실질적으로는 서로가 외국 사람이고 외국어로 말하는 겁니다. 문제의 비극은 자기 나라 문자라는 데 있겠지요?

우리는 다양한 경우의 문맹과 난독을 경험하면서 절망을 느낍니다. 이런 문제들은 대개 각 가정이나 관계들 사이에 비슷비슷해서 개인적인 영역에 그치는 게 아니라 국민성 내지는 하나의 시대정신이라 해도 무방할 겁니다. 가령 고부간의 갈등이나 좌우의 대립처럼, 개개인들의 문맹과 난독은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다시 개개인들에게 병적 영향을 끼치는 겁니다. 프랑스의 사회인류학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 1923~ )는 모든 갈등은 처음엔 명분이나 이유 같은 분명한 욕망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갈등의 양상이 격렬해 지면 오로지 이겨야겠다는 욕망만 남게 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서로가 문제의 원인조차 잊어버리게 되는 모방 경쟁. 이것은 과연 어떤 종류의 문맹일까요?

2.

한때 가장 읽기 어려운 글이 영화 평론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문장을 읽고 각각 단어의 뜻을 다 이해했는데도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하고 싶은 것인지 파악이 안 될 때가 많았습니다. 마치 영화 평론가라는 직업은 글을 얼마나 어렵게 쓸 수 있느냐를 보여 주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글쓴이들의 미숙함도 있었겠지만, 여기에는 그보다 더 우선되는 원인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곧 모든 것을 어렵게 만들려는 태도, 그것을 전문성이라고 인정 해주는 일종의 학문적 권위주의 내지는 성역 같은 겁니다. 또 거기엔 각 전문가 집단의 권위주의와 이기적 아성 같은 구조적 욕망들이 작용하고 있을 터입니다. 당신들은 모르고, 몰라야 하고, 우리만 알고, 알아야 하는 거지요? 그래서 일부러라도 전문용어를 사용해 좀 더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어야 하는 겁니다.

신학(神學)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개 평신도들은 성경 공부를 일정 정도 하는 수준이지 본격적으로 신학이라는 것을 접할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덕분에 신학의 권위에 대한 막연한 외경심 같은 게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이것을 십분 활용하기도 하지요. 우스갯소리로 '목사의 장서는 평신도 제압용'이라는 말도 합니다. 일부 목사들 사이에서는 평신도에게는 신학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거나, 신학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찬반이 갈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평신도 신학'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입니다. '평신도 신학'이란 목회자 중심의 신학에 대한 반성이라기보다는 그냥 '쉬운 신학' 정도의 의미일 겁니다. 마치 중세기에 신도들에게 성경을 읽지 못하게 했던 것과 내용상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과연 신도들에게 신학은 필요 없는 것일까요? 신도에게 불필요한 신학은 누구에게 필요한 걸까요? 신학적 문맹이란 신도의 문제일까요? 혹은 신학자나 목사들의 문제일까요?

비록 형식주의에서 멈춘 반쪽짜리이긴 하지만, '민주화'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현장에서 권위주의와 신비주의를 깨뜨리는 기여를 했습니다. 그것은 국민들에게 시각장애인이 갑자기 눈을 뜬 것에 방불할 정도의 반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반전은 무엇일까요? 오늘의 주제에 입각해 묘사해 보자면 끝없이 전문화되고 복잡해짐으로써 그것을 운영할 수 있는 엘리트 집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맹목적 의탁으로부터의 반전입니다. '참여', 이게 민주화의 본질입니다! 그것이 학문이든 정치든 경제든 예술이든, 권력의 본질은 언제나 소수 엘리트 집단의 형성입니다. 그들은 성벽을 쌓고 허락된 자들 외에는 출입을 금하는 전문성이라는 권위로 자신들의 아성을 방비합니다.

최근 표절 사태로 진통을 겪고 있는 문학계의 논란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논쟁의 쟁점은 대략 두 가지입니다. 모(某) 작가의 작품이 표절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 그 논의를 둘러싼 문단 권력 내지는 문학 권력의 문제입니다. 방어하는 쪽은 부분적이나마 표절은 인정하지만 이 문제가 문학 권력 논쟁으로 비화되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입니다. 공격하는 쪽은 본질은 표절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 권력에 있다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대중들을 이 단순한 문제에 참여하기 어렵게 만드는 전문성의 난해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곧 우리가 일상을 살아갈 때는 '척하면 척' 사태 파악을 잘도 하면서, 조금만 전문성을 내세우는 부분에 들어가면 영락없이 전문가들의 권위 하에 방황하게 되는 겁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문학 권력의 문제는 표절의 문제보다 중대한 문제입니다. 인간이 관계하는 한 문제는 어디서나 똑같고 같은 문제의 다른 버전일 뿐입니다. 그리고 거기엔 본질을 알 수 없도록 미궁 속으로 복잡하게 만들려는 의지와 이해가 되도록 정리해서 본질을 명료하게 만들려는 의지 사이의 각축이 있습니다.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누가복음 12:2-3)

3.

편의상 저는 이 두 가지 의지를 이렇게 규정하고자 합니다. 첫째, 복잡하게 만들고 알 수 없게 만드는 의지를 '감춰진 의지(무의식의 의지)'라 부르고, 정리하고 이해시키려는 의지를 '전파된 의지(자각된 의지)'라 하겠습니다. 아직 권력(전문성·권위주의·신비주의)의 베일에 싸인 것은 무의식 상태에 감춰진 것입니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돌아가는 판을 자각한다면 그때부터는 의식 상태에 놓인 것, 전파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곧 자각된 사람은 그 자체가 전파자입니다.

무의식적으로도 자각적으로도 각각의 의지가 있음을 아시겠지요? 과연 이 의지는 누구의 의지일까요? 이렇게 묻는 이유는 선악에 속한 이 의지들이 언제나 개개인 인간들의 의지와 일체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의지들입니다. 따라서 누가 선인지 악인지 모호하고 애매하고 복잡합니다. 무지와 혼돈이라는 것도 자각과 이해라는 것도 우리의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판을 자각케 하는 일깨움은 누구의 의지일까요?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3:11-12)

신학의 문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오늘날 실제적인 신학이란 교회의 현 상태를 유지시켜 주는 숨은 원리입니다. 신학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고, 신학상의 문맹은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 한국교회의 현 상태를 지탱해 주는 게 지금 한국교회의 신학이지 별 다른 게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공부를 할라치면 다양한 학자들의 이름과 그들의 저작과 사상들을 만나게 될 겁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전문적인 것도 아니고 고차원적인 것도 아닙니다. 작정하고 공부하려면 못할 것도 없는 겁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의 요체란, 어린아이가 철이 들어 어른이 되어서 무엇이 진짜 문제이고 무엇이 진짜를 혼돈케 하는 문제인지를 아는 것에 불과합니다.

곧 우리들의 인생 역정(역사의 진행) 가운데 어떻게 하던지 어린아이 상태에 계속 머물게 하려는(머물고 싶은) 의지와 성숙해져서 미성숙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려는(해방되려는) 의지가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겁니다. 세상 권력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거나 빙자합니다. 그 본질은 언제나 교묘히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세상적 권력에 대하여 자기부정의 눈(십자가)을 획득할 때, 비로소 진정한 신학이 발생합니다. 이게 자각입니다.

문학 권력과 마찬가지로 편의상 이것을 '신학 권력'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곧 문학의 문제가 문학 자체에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지금 신학의 문제 역시 신학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신학의 권력적 속성에 있습니다. 저는 전체성·율법성·독점성·수구성의 네 가지로 정리해 보려 합니다.

(1) 전체성이란 하나의 집단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정신입니다. 가령 '가톨릭(Catholic)'이라는 말이 '보편'의 의미인 걸 아실 겁니다. 우리 개신교는 가톨릭의 보편성을 부인하기 때문에 그 앞에 '로마'라는 말을 붙입니다. '로마 가톨릭'이란 '소위 가톨릭' 정도가 되는 겁니다. 반면, 비잔틴 교회를 이어받은 러시아정교회(Правосла́вие)는 자기들을 '정교회(Ортодоксальная церковь, 지상 유일의 정통 교회)'라 부릅니다. '정교회'나 '가톨릭'이나 결국 같은 말입니다. 개신교(改新敎)를 가리키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ism)'란 본래 이러한 권위적 전체성에 '대항하는 자들'이란 의미입니다. 자, 전체성이라는 폭력에 대항하는 자로서의 태도와 지상 유일의 정통이라 주장하는 자로서의 정체성은 어떻게 다른 걸까요? 그러나 한국교회를 보면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라 이미 저마다 지상 유일한 정통 교회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2) 율법성이란 이러한 하나의 전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율법화된 규율이 사용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란 성경과 아주 상관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떤 목적에 의해 새로 파생된 교회의 관례나 전통이 규율화된 것을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지만'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시작하는 수많은 교회의 율법들을 아실 겁니다. 이것들은 그야말로 성도들을 '구속(?)'하는 장치가 되고 있습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의 <전락>이라는 소설에 보면 '겸손은 남의 이목을 끌려는 자의 방식이고, 겸양은 남을 이기려는 자의 방식이고, 덕성은 남을 억압하려는 자의 방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런 게 다 진리로부터 나오지만 변질된 율법의 작동이지요? 교회의 '신(新) 율법'들이 과연 진리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인지 제고해 보아야 합니다.

(3) 독점성이란 이러한 신 율법으로 전체 평신도 집단을 지도하고 이끄는 독점적 이너서클(inner circle)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직자 집단, 더 구체화하면 대형 교회와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일컬음을 받고 계신 분들입니다. (물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특정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 면허증을 준 것도 아니건만 서로서로 그렇게 인정해 주고 있지요? 교황을 비판하지만 사실상 소(小) 교황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교회라고 다 같은 교회가 아니고 목사라고 다 같은 목사가 아닙니다. 더욱이 그분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들을 후계자로 키우고 계신 분들이기도 합니다. 이걸 '세습'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북한식의 이런 봉건적 세습 체제가 교회 안에서 가능하다는 것도, 이런 식으로 교회를 독점 지배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로 인식하지를 못합니다.

(4) 수구성이란 이러한 전체성과 율법성, 독점성이 하나같이 사회 속에서 수구적인 이해관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설명을 요하지 않으실 줄 압니다. 다만 이 수구성의 결과 우리 시대의 설교들이 대략 중산층 이상의 영적·윤리적 부담을 덜어주는 데 바쳐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 부담이란 다름 아닌 복음서의 말씀과 그들의 실제적 삶의 현저한 다름에 대한 양심의 찔림입니다.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전도서 7:29)

문제는 조직의 어쩔 수 없는 관료주의적 속성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 1895~1986)의 글에 보면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진리를 깨달았다는 겁니다. 그러자 한 젊은 악마가 탄식을 합니다. "저 사람이 진리를 깨달았으니 나는 망했다." 그러자 또 다른 연륜이 지긋한 노(老) 악마가 이렇게 위로를 합니다. "걱정 하지 마라. 내가 저 사람에게 '조직'을 만들게 하면 된다." 국제 라브리의 창설자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1912~1984)는 '가장 늦게 마지못해 변하는 집단이 교회이고 신학'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가장 늦게 민주화되는 조직이 교회이고 신학이라고 번역하고 싶습니다.

신학이나 교회의 권위를 무시해서가 아닙니다. 교회의 위치가 우리가 놓여 있는 사회 현실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자리에, 동떨어진 권위 구조 아래 존재하는 구태의연한 위태로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청빙이나 사직·의사 결정 구조·사례비·프로그램·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반응. 그 어느 것 하나 진보적이거나 능동적일 수가 없습니다. 모름지기 교회도 내재적 접근법으로 이해해야 할 대상일지 모르겠습니다. 이 신학적이고 실질적인 문맹은 그것을 독점하는 쪽이나 거기서 소외된 쪽이나 다 함께 겪는 문맹이기도 하니 더욱 문제입니다.

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한복음 14:12)

가장 중요한 신학 중의 신학은 복음, 곧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그의 하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곧 믿는 것 자체가 일이고 실천입니다. 복음은 현실을 망각한 미래 비전과 기도 속에 있는 게 아니라 현재적 십자가, 자기 부인의 분투 속에 있습니다. 거기서 믿는다는 것은 마치 이게 전부인 듯 보이는 이 세상과 자신의 온갖 죄에 가담하거나 참여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 무기가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입니다.

따라서 믿는 것 자체, 사랑 자체가 세상의 신뢰 없음, 자신의 죄 됨, 사랑 없음의 숨겨진 어둠을 드러냅니다. 개인의 숨겨진 구조는 전체 세상의 숨겨진 구조의 축소판입니다. 이게 또한 신학입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 사람이 세상의 죄도 인식합니다. 자기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의 죄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달리 말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신학으로 이 세상에 편만한 전체성· 율법성·독점성·수구성의 (변질된!) 신학에 가담하지 않고, 버티고, 드러내는 실천이고 일이라는 뜻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설교에 혼돈을 느끼거나 배운 바와 다르다는 거부감을 가지실지 모릅니다. 저는 그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로선 그러한 혼돈과 거부감에서 우리 시대의 신학상의 전체성과 율법성, 독점성과 수구성의 양상을 다시 보게 된다고 말씀드려야 정직할 겁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이 시대의 교회들이 성도들에게 참여하도록 종용하는 대부분의 일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 곧 그를 믿는 일과 그가 하신 일의 실천과 괴리되어 있다고 진단합니다.

소용없다거나 싹 없어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거기에 착한 내용이 전혀 없다거나 누구에게나 절대적으로 무의미하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갈리디아서 1:7)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혼돈, 혼돈케 하는 양상들입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린도후서 4:6)

여기서 나오는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하는 말씀은 분명 창세기 1장 3절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할 때의 "빛이 있으라"는 말씀일 겁니다. 그 빛은 해와 달이 창조(넷째 날)되기 전 첫째 날에 창조하신 빛이니 태양 광선을 가리키는 빛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이 해설을 통해서 우리는 이 빛의 동일하고도 찬란한 영광을 신약에서 다시 봅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는 말씀에서 '빛'이 뭐겠습니까? 빛은 번쩍하는 섬광이고 깨우침이고 이해이고 명백함입니다. 그것은 지식이고 자각이고 분별력입니다. 더 이상 어둠이 아닙니다. 인간의 심혼, 곧 영혼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모든 존재케 하시는 본질로 육박해 오시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입니다. 창세의 '있게 하시는 빛'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 이제 '어떻게 있어야(존재해야) 하는지' 깨우치신 겁니다. 그 빛이 나를 재창조한 겁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이 복음의 본질에 충만했을 때 인류의 역사 또한 빛을 보았습니다. 지배 권력이 꺼뜨릴 수 없는 성도들의 각성이 전체 사회의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 복음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되었을 때, 이 빛은 제사장 엘리의 가물거리는 골방의 촛불처럼 희미해졌습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헛되이 소비되는 역량들이 많은 법입니다. 다시 이 본질을 일깨울 예언자와 성도들이 나타나야만 하는 겁니다. 어디로부터요?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하시는 하나님으로 부터입니다.

이것은 개인에게서 증거를 찾을 때 더욱 확실할 겁니다. 우리가 복음의 본질에 충실했을 때, 곧 성령에 충만했을 때, 말씀을 내 것(!)으로 가졌을 때, 어떤 일들이 벌어졌었나요? 삶은 단순하고 명료해지고 착해지고 건강하고 감동적이고 아름다웠습니다. 곧 사랑이 있었습니다. 누구에게 인증을 받고 어떤 일에 의지해 증명된 게 아닙니다. 삶 자체가 사랑이었습니다. 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내 것으로서 말씀의 체험(어둠 속에서 비추시는 빛에 대한 각성)을 상실하게 됐을 때 어땠습니까? 우리는 무력해지고 형식적인 말을 일삼는 무감동한 사람으로 변해갔을 겁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곳에서 사랑 없음과 감동 없음의 곤란을 경험합니다. 문밖에서 소외된 캄캄한 혼란을 느낍니다. 그 안은 어떻던가요? 교회와 신앙, 목사와 믿음, 신학과 현실, 이런 것들 간의 괴리를 봅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은 그대로 유지되고 강화되고 건재합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은 어둠을 비추는 자기의 믿음을 희생시키면서 본질(신학)적으로 상관도 없는 일에 계속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기대하시는 겁니까?

5.

신앙의 핵심은 분별력입니다. '분별'이 곧 그 사람의 말이고 행동입니다. 분별에서만 진정한 행동이 나옵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의지한 것도 아니고 예배당 속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 안에 있는 것이고 거기서만 가능합니다. 이것은 누구의 의지에 따르는 것일까요? 이 분별력은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요?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린도후서 4:6)

바로 이겁니다. 우리가 따를 것은 오직 그리스도이지 그리스도를 내세운 어떤 사람들이 아닙니다. 유학자의 빛이 공자의 가르침이지 공자를 명분으로 내세운 도그마의 권력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분명한 것과 분명치 않는 것의 교묘한 희석입니다. '도무지 왜 이러는 지 이해를 할 수 없다', '어떻게 이런 것들이 가능한 건지 모르겠다'라고 혼란스러워 하는 혼란 속에서라면 여전히 깨어날 수 없을 겁니다. 이제는 그런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고 '나는 이제 분명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은 아직 의식과 무의식, 감춘 것과 전파된 것의 불일치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을 뿐입니다.

깨어나십시오. 정신을 차리십시오. 여러분이 계속해서 속는 이유, 점점 말씀으로부터 어긋나고 있는 이유, 병적인 양상이 깊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 지식이 모자라서도 아니고 설교 이해가 모자라서도 아닙니다. 신학 실종의 혼돈입니다. '영(본질)'으로 살지 못하는 정신의 혼돈 가운데, 혼돈을 지지하며 혼돈에 머물러 있는 빛 없음 때문입니다. 빛이 있다면 빛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과감히 여러분 자신에게 비추신 빛으로 분별의 여정에 나서십시오. 프로테스탄트가 되십시오. 아브라함도 사라도 리브가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광야로 떠나 그 빛의 인도하심을 받았던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언자들의 예언자적인 삶의 궤적을 읽으면서 그 삶의 본질을 깨우치지 못하는 것은 어떤 연고입니까?

그러므로 성경의 단편적인 지식을 알았다는 것만으로는 모자란 겁니다. 안다는 것이 자기 속, 곧 여러분의 무의식의 어둠을 밝혀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가운데 이미 빛이 비춘 것이라면, 그 사람은 세상의 빛입니다. 누가 그 빛을 꺼뜨리겠습니까? 세상에 어둠이 가득할 때 불 켜진 산 위의 동네는 숨길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5:14) 그리스도의 빛인 성도, 산 위의 동네인 교회, 그러나 이 모든 비유 성도의 분별력이 요청됩니다. 교회가 너무 늙었기 때문입니다. 광야로부터 이제 막 도착하신 30세의 예수님의 표현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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