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1.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로 시작하는 이 부분은 제게 특별히 기념할 만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유학 시절 맨 처음 배정받은 모스크바대학 기숙사에 들어갔더니 방문에 이 말씀이 붙어 있었습니다. 전 주인인 선교사가 남긴 것인데, 그대로 두고 마음에 새겨 읽고는 했습니다. 그때 저는 오랫동안 교회를 떠나 있다가 모처럼 다시 나가기 시작한 직후였습니다. 삶을 뚫고 나가기 위해 힘이 아주 많이 필요했던, 그만큼 몸도 마음도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그토록 위대했던 지도자 모세가 죽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의 시종(비서, 부관)이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던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통해 말씀하기 시작합니다. 첫마디가 이겁니다. "나의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수 1:2) '모세가 죽었다. 그러니 너는 일어나 가라', 즉각적으로 두 가지 울림을 줍니다. (1)모세가(자연적으로) 이제는 네가 일어나 가라(모세 대신 너다). (2)모세가 죽었으므로 (시기가 왔으므로) 이제 네가 일어나 가라(이제 네가 일어날 때가 왔다). (1)은 순리에 의한 인과관계로, (2)는 보다 역동적인 의미에서 마치 모세의 죽음을 기다렸다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물론 이어지는 문맥을 보면 대체로 (1)의 해석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2)의 해석 또한 떨치기 어려운 현실적인 매력이 있습니다.

39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흡사 이 두 가지 해석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는 했습니다. (1)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이제 내가 일어나 가야한다. 답습이고 계승입니다. 나른하고 맥이 빠지고 책임이 무겁습니다. 아버지는 죽어서도 나를 지배합니다. (2)아버지가(는) 죽었다. 이제 일어나 가야할 때다. 단절이고 새 출발입니다. (1)보다 훨씬 더 많은 힘이 들 것 같습니다. 힘을 내야 할 것 같습니다. 무한책임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니라 나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아버지의 답습이냐, 나의 새로운 출발이냐.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고자 열망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지 않았던 겁니다. 모세의 입장에서 그것은 자기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수용의 문제가 됐을 겁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입장에서는 담대함과 용기의 문제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생각해 보지 못했고 가져 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것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입장에서 모세가 죽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무슨 약속의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가 가시겠지요?

갈 길을 모를 때, 앞날이 캄캄할 때, 홀로 남겨졌을 때, 감당하기가 벅찰 때, 뚫고 나가기가 어려울 때, 누군가의 표현처럼 무인지경의 광야에 홀로 서있는 것 같이 막막하기만 할 때. 사람은 그만 자포자기하고 엉뚱한 길에 빠지는 수가 많습니다. 흔히 시련이 사람을 단련한다고 하지만 사실 절망이 사람을 망가지게 하는 수가 훨씬 더 많습니다.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은 매우 안정된 상태입니다. 선생이 있다는 것, 의지할 사람·기댈 사람이 있다는 것, 본받을 사람·좇아갈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매우 안정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혼자될 때가 옵니다. 오늘의 본문은 홀로 독립해 스스로 자신의 향방을 찾아가야 하는 사람에게 매우 큰 용기(빛과 영감)를 줄 겁니다. 그 옛날 기숙사 방문에 붙어 있던 그 말씀을 간직하며 뚫고 나온 바 말씀의 체험이 제게도 있었겠지요? 물론 그것은 여호수아의 사적과는 별개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말씀(성령)의 체험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동시에 여기 기록된 여호수아의 사적과 우리를 그런 식으로 엮어 주십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다고 느끼실 때가 온다면 지체 없이 여호수아 1장을 펼쳐서 이 부분을 백번만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그러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공간에서 오직 여러분 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부디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이 말씀을 하나님이 특별히 제게 하시는 말씀으로 알아듣고는 감격에 겨웠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부분이었습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명한 율법[토라(תּוֹרָה), 가르침]을 다 지켜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에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 그러면 네 길이 순탄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개역한글성경>에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로, <개역개정성경>에는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로 번역돼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두 구절은 같은 말일까요, 다른 말일까요? 일반적인 어법으로는 어느 것이든 먼저 얘기한 쪽을 더 강조한다고 느껴지기도 하지요? 그렇게 보면 <개역한글성경>은 '좌', <개역개정성경>은 '우'를 강조하면서 치우치지 말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공동번역성경>에는 "한눈 팔지 말고 성심껏 지켜라" 이렇게 중립적으로 번역했습니다. 원문은 무엇이 먼저였을까요? <개역개정성경>이 맞습니다.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입니다. 이런 게 왜 중요할 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든 좌든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은 무슨 말일까요? "마음을 강하게 하라"부터입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모세가 명한 토라(תּוֹרָה)를 다 지켜 행하기 위해서. 그것으로부터 우로나 좌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 그리하면 형통할 것이다. 그러니까 우로나 좌로 치우친다는 말은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먹는 것과 관련한 겁니다. (여러분이 흔히 생각하실지 모르는 좌우로 치우치는 것과는 내용이 아주 다를 수 있습니다. 늘 드리는 말씀처럼 '반역(半譯)은 반역(反逆)'이 되는 겁니다.) 곧 여기서 우로나 좌로 치우친다는 말은 토라로부터 '흔들린다, 벗어난다, 지나친다'라는 의미입니다. 원인은 두려움이겠죠? 여호수아는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최대의 난적이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홀로 서야 하는 두려움, 달리 표현하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한 최대의 난적은 홀로되는 두려움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 가장 먼저 강하고 담대하고, 두려워 말고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마음을 요동치지 않게 하고 토라를 지킬 수 있게 해 줍니다.

문제는 분명한 내용 없이 막연히 그럴듯한 교훈들입니다. 고백컨대 저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을 지금까지 수도 없이 들어 봤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어떤 내용을 지시하는 것인지 정확히 말해 주는 선생님은 만나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냥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게 무슨 말일까?' 물어봐야 할 텐데, 물어볼 수가 없는 겁니다. 왜냐? 벌써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했는데 거기다 대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벌써 좌로든 우로든 치우친 모양새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아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때부터 무소불위 권력의 도구가 됩니다. 이제부터 누가 무슨 태도를 보이든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성경이 말씀하시지 않느냐? 점잖게 타이르면 권위 있게 제동을 거는 겁니다. 경우에 따라서 이 말은 "경거망동 하지마라", "극단을 주의하라", "과격함을 경계하라" 같은 의미로 변용돼 전달됩니다. 곧 누군가 상대방의 행동을 비판하고 저지하려 할 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만 하면 되는 겁니다.

3.

여호수아에게 가장 강력한 적은 혼자 감당해야 할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은 간파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할 것,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을 거듭 강조합니다. 그 두려움은 모세가 가르친 토라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흔들림입니다. 우로나 좌로나 치우친다는 말은 행동의 경거망동도, 태도의 극단도, 정치적 과격함을 뜻하는 말도 아닙니다. 두려움, 온통 두려움 때문에 요동치는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가 나오는 겁니다. "아니, 여호수아같이 위대한 인간에게 자존심 상하게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말라'가 말이 됩니까?"라는 질문이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대답은 "진정 혼자가 돼 보지 못한 사람은 아직 두려움이 뭔지 모른다"고 해야할 겁니다. 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두려움이 여호수아를 토라의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흔들리게 합니다. 토라가 무엇입니까. 십계명과 율법입니다. 두려움이 십계명과 율법을 못 지키게 한다?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 십계명과 율법이란 어떤 하나의 견고한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야 그것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요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강하고 담대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의 견고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지키기 위한 겁니다. 곧 가나안이란 그렇게 강하고 담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음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벗어나지 않고 상실하지 않고 요동하지 않고 지키는 '견고한 상태 속에(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이미 들어가 있는 것이고, 그리로 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야 가나안이 형통하고 순탄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강력하게 지지해 주기 전에 여호수아의 두려움을 상기해 주십니다. "나의 종 모세가 죽었으니"에서 벌써 여호수아는 반쯤 죽은 겁니다. 여러분도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너무나 감당하기 벅찬 일은 시작하기도 전에 맥이 쫙 빠져 버리는 겁니다. 우울증, 신경쇠약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아닙니다. 영웅도 아니고 위인도 아니고 스타도 아닙니다. 이러한 우리들 자신에 대한 고려 없이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는 니가 모세다" 그러면 필시 우스운 일들이 벌어져 스스로 붕괴하게 마련입니다. 이게 좌로, 우로 치우치는 겁니다. 곧 흔들리는 겁니다. 견고한 상태를 획득한 게 아니라 그런 준비도 없이 큰 책임을 덜컥 떠맡게 되면, 그때부터 붕괴가 일어납니다. 기회가 왔다고 다 좋은 기회인 것이 아니지요? 감당할 준비가 안 됐으면 자신에게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재앙이 됩니다. 가능성과 야망에 굴복해 버리면 그다음부터는 거짓말이라도 하면서 버텨야 합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의 딱한 실력과 모양이 아닐까요?

정말 감당을 하려면 먼저 자기를 알아야 하고, 자기의 두려움을 알아야 합니다. 그냥 '용기를 내라. 강하고 담대하라. 믿기만 하면 다 된다'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주문하시는 용기는 그냥 맹목적으로 용기를 주겠다는 약속도 아닙니다. 왜 여호수아가 용기를 가져야하는지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겁니다. 이 지성적 납득 이후에 자기 책임이 발생합니다. 지성(납득)이 없으면 야망에 의한 마약적 도약을 남발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아멘", "용기를 갖자", "힘을 내자", "파이팅!" 그러나 설명도 없고, 이해가 없고, 지성이 없고, 자기 책임이 없기 때문에 진정한 자기로부터 우러나오는 감동적인 용기나 힘을 갖지 못합니다. 하늘에서 뽀빠이의 시금치가 주어지기를 기대하는 겁니다. 그러나 자기를 발견치 못했다는 것은 다시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은 자기 스스로 모든 일을 다 해 놓아야 합니다. 실제로는 자기들이 별별 노력을 다 해 놓고는 "하나님이 다 하셨어요", 그런 걸 좋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용기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여 지성이 생김으로써 발생하는 자기 책임의 용기일 겁니다. 곧 자기에게서 솟아나는 것이지만 그게 곧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묻고 싶습니다. 누가 여러분을 구원해 줍니까? '하나님'이라고 너무 빨리 대답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을 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걸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주신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과연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내가 약할 때'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 구해내지 못 할 것같은 그런 때라는 겁니다. 가장 밤이 깊을 때 별이 최고로 빛나듯이, 가장 절망적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본질에 대해 설명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설명해 주시고 우리를 납득하고 설득하십니다. 우리가 누군가 아플 때 그에게 위로를 하려고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환자는 고통에 대한 고통 때문에 우울증에 빠져 괴로움 속에 자기를 던져 넣고 거기서 빠져 나오려 하지를 않습니다. 슬픔과 고통이 삶의 내용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핑계가 되기도 하고, 방패가 되기도 하고, 구실이 되기도 하고,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식으로 삶을 규정지으면서 어느 정도씩 인생이 삐꺼덕거리면서 뒤틀려집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지요. 설명도, 이해도, 지성도, 자기 책임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논어 자한편>)는 공자의 말씀이 있습니다. 천지 만물에 항상 충만한 말씀(하나님)이지만 진짜로 그 진가를 경험하는 시기는 따로 있습니다. 같은 이유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사람들도 따로 있습니다. 그 나머지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겁니다. 언제까지요?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말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신다면 가만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이 사랑하시지 않는다면 마냥 내버려 두실 겁니다. 아니지요.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해 줘도 알아듣지 못할 겁니다. 알아듣는다는 것은 지각(知覺)을 말하는 거 아닙니까? 지각했다는 것은 먼저 지각할 게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뭔가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에 지각한 겁니다. 멸망이든, 죽음이든, 성공이든, 실패든, 절망 가운데 주저앉는 것이든, 다시 일어나는 것이든. 거기에는 아마 먼저 뭔가 메시지가 있었을 겁니다. 다만 우리가 몰랐을 뿐인 것이고, 그 메시지가 우리들의 정신 활동에 있어 의식적이지 않고 잠재의식적이기 때문인 겁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불수의적(不隨意的) 정신 활동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좀 더 명확히 알게 되는 때가 옵니다. 역설적으로 의식상의 위기가 찾아올 때 현저히 지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에 관해 우리는 외려 거꾸로 이해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모든 것이 명백해졌을 때(위기의 시기)는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해가 가시는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성령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 조건이 복잡한 만큼 하나님 말씀도 단순 무식하게 적용할 수는 없는 겁니다.

4.

신앙이란 이와 같이 끝없는 자기 탐구이며, 자기 탐구를 통한 인간 탐구입니다. 거기에는 독자적인 자율성이 있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조건은 예기치 못한 자율성에 근거합니다. 그것은 끝없이 대립하고 거스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정욕은 거슬러 싸우는 것이고 영혼은 거스름 없는 평화입니다. 제어한다는 것은 '고요하게 한다, 가라앉힌다, 본래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만일 거스르게 하고 싸우게 놔둬도 하나님은 그 결과가 나타나게 하실 겁니다. 곧 하나님의 해법은 일체의 영혼을 거스르는 육체의 정욕에 대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보상이란 뛰따르는 것, 곧 상과 벌입니다. 하나님은 상도 주고 벌도 주십니다. 그러나 복음의 궁극적인 지향은 상도, 벌도 주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상에서도, 벌에서도 해방되는 것이지요? 우리들은 여기 이렇게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전인적 존재는 시시각각 여러 다른 관점과 비교와 대조를 통해 끝없이 조정되고 수정되며 그에 대한 보상을 받고 있습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심판하는 율법이 여러분 안에, 죽이는 사망이 여러분 안에, 잘난 체하고 절망하게 하는 상과 벌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은 끝없이 요동하는 존재의 본질적 조건을 자각하게 합니다. 그것을 이기기 위해 더욱 강하고 담대하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공자의 인본주의 사상은 손자 자사(子思)가 쓴 <중용(中庸)>에 피력된 중도(中道), 중용(中庸), 중립(中立), 중행(中行)으로 설명됩니다. 중도를 근간으로, 중용을 도덕으로, 중립을 정신으로, 중행을 실천으로 삼는 것이라 했습니다. 현대적 의미로 ‘중용’을 설명해 본다면 인격의 현상적 모습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욕망에 의한 착각과 편견이라는 겁니다. 중용지도란 곧 '자기 성찰'의 직관을 통해 개인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인 착각과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개인들의 주관(편견)이란 본래적으로 자기를 옳다는 닫힌 관념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자기 옳음(자기 의)에 대한 반성적 성찰, 열린 사고가 중용입니다. 얼핏 이 중용 역시 우나 좌의 중간쯤을 의미하는 위치적인 말로 들리지만 실제로는 벗어나서 흔들리지 않는 초월적 자리를 말하는 겁니다. 그 정신이 곧 사상이고 현실 세계의 구현이라는 점에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그러나 벗어나서, 흔들리지 않는 관점이자 그러한 정신적 현실이 실제 세계에 실상으로 드러날 때는 구체적인 하나의 입장이 될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계적 중립이나 행정적 중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령 최근 오달수라는 배우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묻는 인터뷰에서 황지우의 시구를 빌어 대답한 말이 여기에 적절할 겁니다. "버스 운전사의 급격한 우회전은 승객들을 좌편향시킨다." 곧 중도란 개인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인 편견과 착각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는 변함없지만, 그것이 실제 현실에 구현할 때는 상황에 따라 위치가 달라진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어느 위치를 말해 주든지, 한국교회에 어느 위치를 제시하든지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않는 겁니다. 경전의 가르침을 핑계로 한 형식주의적 중립, 원리주의적 중립은 기실 중립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무사안일이거나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계시록 3:15-6)

목욕물이 되려면 뜨거워야 하고, 식수가 되려면 차가워야 하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 미지근한 물은 목욕물로도 식수로도 적합지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한다는 주장을 자주 접합니다. 이때 중립을 지키는 것은 그야말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가 됩니다. 그것은 아무 의견도 표명하지 않는 것이거나, 표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표명하는 것은 불순하고 위험한 일이며, 그럴 때 기독교인의 중립은 침묵하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 이것은 과연 중립일까요?

프란치스코 교종이 우리나라에 와서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고통 앞에 중립이 없는 게 아니라 고통이라는 현실적 사안에 있어 중립의 위치가 바뀌는 것이겠지요? 고통 앞에서 중립이 없는 게 중립이 되는 겁니다. 기계적 중립, 행정적 중립, 법적 중립 같은 거라면 그것은 이미 치우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중립을 내세우는 설교를 주의해야 합니다. 중립이 아니라 현실을 호도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설교는 요동해야 할 것을 요동하지 않게 해주고, 요동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요동하게 하는 설교들입니다. 지금 이 세계에서 무엇이 요동치 않는 것이고 무엇이 요동하는 것일까요? 이 둘 사이의 중립은 무엇일까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은 흔들리지 말라, 요동하지 말라, 곧 벌써 흔들리며 요동하는 너의 상태를 수정하라는 말씀입니다. 한국교회와 그 메시지는 빈번히 그 상태를 강화하는 쪽으로 이해하고 전달해 왔습니다. 그 설교자들의 공로로 말씀이 시대를 이끄는 게 아니라 시대의 부름에 역행하다가 억지로 끌려가기에 이르렀습니다. 무엇이든 지금 교회는 맨 꼴찌입니다. 그러나 꼴찌가 첫째가 되는 반전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로 강하고 담대하기를 원하신다면, 광야로 가야합니다. 혼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골방·고통·고독·고립·두려움이라는 현대의 인간 조건을 평신도들이 지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됩니다. 그 새로운 정신은 광야로부터 초인(超人)처럼 오는 겁니다. 거기는 예루살렘의 이해관계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예루살렘의 이해가 무의미해지는 광야로부터 한국교회를 갱신할 수 있는 중립의 행동도 나올 수 있습니다. 눈의 조절력 약화로 원근의 사물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노안(老眼)이라 하지요? 그러나 육체 아닌 정신적 노안(老眼)도 있습니다. 보기 싫은 것은 안 보이는 게 그겁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노안에 걸린 상태와도 같이 절실한 말씀은 싫어하고 있습니다. 밑 빠진 독 같은 감언이설에 귀들이 얇습니다. 말씀에 대한 '그러한가'하는 자기 검증이 없고 '과연 그렇구나'하는 자기 경험도 없습니다. 이토록 사회 전체가 위기 가운데 놓여 있어도 약할 때 가장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치 못하고 있잖습니까. 깨어나야 합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자정능력을 상실했다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말하자면 모세가 이미 죽은 겁니다.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여호수아가 아니면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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