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으로 전락한 하나님나라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 6:33)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는 말씀처럼 기독인의 마음을 뒤흔드는 구절이 또 있을까? 이 말씀은 하나님께 철저한 순종을 다짐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박혀 있는 성경 구절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하려는 하나님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로 통일된 목소리가 없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지향하는 하나님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이 무엇인지,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지, 지금 우리의 현실과 그 나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지금 그 나라로 이행되지 못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거나 따지지 않은 채 지금까지 달려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 나라의 총체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을 우리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하면 '지금 여기서' 그 나라를 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구체성이 결여된 구호에서 진지한 헌신이 나오기 어렵다. 총체성이 결여된 목표에서 '온전한' 연합은 불가능하다.

나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으로 전락했다고 본다. 제왕적 권위를 가진 목회자가 자기 아들에게 교회의 경영권(?)을 물려주면서 '하나님나라'를 입에 올릴 수 있는 까닭, 세월호 참사에 대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면서도 하나님나라를 구한다고 자신 있게 떠들 수 있는 이유, 인권과 경제성장을 대립적 개념으로 보고 성장이 인권보다 더 중요하다며 독재자와 재벌을 찬양하는 그 입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하나님나라를 위하여"라고 소리 높일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정삼각형의 이데아

세 변의 길이가 같은 삼각형을 정삼각형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삼각형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현실에서 정삼각형이라고 하는 삼각형은 실제로 정삼각형이 아니다. 세 변의 길이가 완벽하게 똑같은 삼각형을 우리는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삼각형은 플라톤의 말을 빌리면 '이데아'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존하지 않는 정삼각형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삼각형이 정삼각형에서 얼마나 멀고 가까운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로서 사용된다. 우리의 관념 속에 있는 정삼각형의 이데아는 현존하는 삼각형의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정삼각형이 되려면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지침이 된다. 완벽한 정삼각형을 구현할 순 없지만, 정삼각형의 이데아가 있어야 쉼 없는 지향이 가능하고, 우리가 어디쯤 와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하나님나라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 머릿속에 그려지는 명확한 이상이 있어야 오늘날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과 하나님나라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그리고 하나님나라로 이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전략을 세울 수 있다. 

하나님나라의 이데아가 가진 중요성과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 역사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잣대이기도 하다. 하나님나라의 이데아는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지켰다고 하는 이승만 정권, 강력한 리더십으로 공업화에 성공해서 민주화에 기반을 닦았다고 하는 박정희 정권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모호하고 추상적이며 공허한 측면이 있다. 하나님나라를 구하자고 하면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 이야기도 안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경우가 허다하다.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고 구체적이며 실체가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각자 생각하는 하나님나라는 다를 수밖에 없고, 지금과 같은 난맥상을 벗어나기 어렵다.

정삼각형으로서의 희년

그래서 나는 희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나라가 뭐냐고 물어보면 '희년'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희년이 하나님나라의 이데아인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구약 레위기 25장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희년(禧年)은 안식년이 7번 지나고 난 다음 해, 그러니까 50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복된 해를 말한다. 50년째 되는 해 음력 7월 10일 전국에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면 희년이 실행된다. 이날에는 품꾼 해방, 부채 탕감, 토지 반환 이 세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자유를 잃어버렸던 품꾼이 자유의 몸이 되고, 갚아야 할 빚이 사라지고, (경제)생활의 터전인 토지를 되찾는 때가 바로 희년인 것이다. 생각해 보라. 소작농이 자영농으로 바뀌고 가슴을 짓누르는 빚이 사라지는 것을. 성경은 이것을 명실상부(名實相符)하게 '자유'와 '해방'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희년 안에 하나님나라의 중요한 가치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속죄를 살펴보자. 희년의 나팔을 불 때는 다름 아닌 속죄일이었다. 죄 사함을 받는 것, 즉 죄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는 것과 경제적 압박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는 것이 본질상 같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 주고 있다.

두 번째로 희년 안에는 생태 환경의 개념이 들어 있다. 희년에는 경작을 쉬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환경을 잘 보존해야 하는 것과 인간의 고된 노동에 대한 배려의 의미가 담긴 것이다. 이는 오늘날 환경 파괴로 신음하고 있는 지구에 중요한 원칙을 제공해 준다. 지금으로부터 3천년 전에 이와 같은 생태 환경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이 태초부터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 전체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세 번째로 희년에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토대가 들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사상의 자유이다.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행동의 자유도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예속되어있으면 사상의 자유를 누리기 어렵다. 소작농이 사상의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하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회사에서 노동자가 사상의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가? 스스로 경작할 수 있는 땅이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구애받지 않고 살 수 있는 터전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노동자가 사용자와 실질적으로 대등해야 사상과 행동이 자유로울 수 있다. 이렇듯 빚에서 해방되고 토지가 주어지고 품꾼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실질적 민주주의의 기반을 갖췄다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희년을 통해서 정의와 자비가 조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희년은 정의가 뼈대이고 자비가 보조 수단임을 보여 준다. 토지를 돌려주는 것은 정의의 법이다. 돌려주는 사람이 손해를 무릅쓰고 해 주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부채 탕감은 자비의 법이다. 이것은 채권자가 자기의 손해를 무릅쓰고 채무자의 부채를 소각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희년에 부채 탕감인 자비만 실행하고 땅을 돌려주는 정의를 실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아예 탕감을 받지 않은 것보다 훨씬 좋겠지만, 소작농의 생활은 면할 수 없기 때문에 노예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자비의 제도화', 즉 2차 분배인 복지보다 정의의 제도화, 다시 말해서 1차 분배가 먼저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희년은 정의와 자비를 동시에 말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정의가 핵심이고 자비가 보조 수단임을 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희년

여기에 한 가지 더 첨언하면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이다. 흔히 말해서 보수적인 신앙은 주로 예수님의 속죄, 즉 제사장적 사역을 강조한다. 반면에 진보적인 신앙은 기존 질서에 저항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예수님의 선지자적 사역을 강조한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의 선지자적 사역과 제사장적 사역은 연결되어 있다. 선지자적 사역을 감당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속죄가 가능해진 것인데 바로 이 두 가지를 연결·통합하는 것이 희년이다. 희년을 선포하러 오신(눅 4:18-19) 예수님은 희년의 눈으로 당시 사회를 파악하고, 반(反)희년적 제도의 피해자들을 선택하고 옹호하신 반면, 반희년적 제도의 수혜자나 설계자들에겐 지나칠 정도로 엄하게 꾸짖고 회개를 촉구하셨다. 이것이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고, 그로 인해 우리는 구속, 곧 죄 사함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요약해 보면 이러하다: 희년에는 속죄가 내포되어 있다. 생태 환경을 중요하게 고려한다. 희년은 민주주의를 심화‧확대할 수 있는 기반의 구축을 가능하게 한다. 희년은 정의가 핵심이고 자비가 보조 수단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 알려 준다. 결론적으로 희년은 하나님나라의 원형(原型, prototype)이다! 하나님나라가 결코 모호하고 추상적이지 않음을 보여 준다. 

희년을 통해서 '구체'의 옷을 입자

이런 까닭에 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고 할 때, 다시 말해서 생명과 평화의 나라를 말할 때 희년적 질서를 떠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인식의 혼란이 없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고 하면서 독재자를 칭송하는 것이 거짓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나라를 구한다고 하면서 재벌을 옹호하는 것이 어불성설임을 알게 된다. 교회에서 제왕적 권위를 누리는 목사가 하나님나라를 구하자고 소리치는 것이 난센스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나라를 입에 올리면서 4대강을 찬성하고 생태 환경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 하나님나라를 위한다고 하면서 이승만을 국부로 떠받드는 것이 코미디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희년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의 '구체'의 옷을 입게 된다. 

그렇게 보면 이 땅에 교회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바도 분명해진다. 교회는 세상에 희년적 질서가 무엇인지 보여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모험을 통해서 당시의 상황 속에서 희년이 무엇인지,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 세상에 보여 주었다. 그들은 공동체의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여"(마5:16) 세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다.

더 놀라운 사실은 희년의 사회 경제적 가르침은 자연법과 같아서 맑은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까닭에 희년은 '헬조선'으로 전락한 한국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정치철학과 사회과학의 언어로 육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 이 글은 [<공동체, 성경에서 만나고 세상에서 살다>성서한국 엮음 / 대장간 펴냄 / 1만 5,000원 ]에 수록된 '공정국가, 공동체 사회의 토대'에 크게 의존했음을 밝힙니다.

남기업 / <뉴스앤조이> 편집위원, 토지+자유연구소 소장, 희년함께 공동대표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