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다. 모든 것이 풍성한 가을에 그 동안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추석이다. 우리 민족은 조상들의 제사를 지내는 날이지만, 그런 명목이라도 있으니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함께 모일 수 있다. 재회를 통해 가족의 사랑을 누리고 확인하고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돌아갈 때에는 부모님의 풍성한 사랑을 한가득 싣고서 돌아간다.

어쩌면 추석은 낭비 중의 낭비이고, 허례허식 중의 허례허식일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명절이 오는 것이 두렵다. 그래도 고향에 돌아갈 때 선물이라도 들고 가야 하는데, 그럴 만한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 추석은 부담스럽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새 차를 뽑아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과도한 선물들을 들고 와서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고향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하루 종일 정체가 되어 평상시 3시간 정도 걸릴 길을 6시간이나 8시간이 걸려서 간다. 고향에 잠깐 있다가 다시 6시간 내지 8시간 걸리는 귀경길을 간다. 이런 귀성길과 귀경길에는 교통사고도 많이 일어나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다. 추석은 어떻게 보면 효율성이 떨어지는 일인데, 우리는 해마다 반복하고 있다. 추석이나 설날을 허례일 뿐이라 생각하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말한다. "그렇게 힘든데 뭐하려고 고향으로 오느냐"고. 선물을 들고 오면, "뭐 하러 이런 걸 사 들고 왔느냐 그냥 오면 되지"라고 말이다. 그까짓 허례허식은 다 없애 버리면 좋겠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사실 사랑은 낭비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면 정말 쓸데없는 곳에 허비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낭비할 수 있다. 가족이 어떻게 사랑이 깊어질 수 있는가? 쓸데없어 보이는 허비를 통해서 사랑은 깊어진다. 그냥 돈 주고 밥을 사 먹으면 편하고 깔끔한 것을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온갖 수고와 노력을 다한다. 우리 집에 모처럼 방문한 자식들과 손주들에게 내 손으로 따뜻한 밥을 해 먹이고 싶은 거다. 계산으로 따지면 그게 훨씬 더 많은 돈이 들어갈 수 있지만 말이다.

안타깝게도 전쟁과 보릿고개를 겪으면서 살았던 우리는 돈을 아끼는 것을 최상의 가치로 여겼다. 사실 우리 가운데 대부분은 전쟁도, 보릿고개도 겪어 보지도 않았다. 풍족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에도 우리는 보릿고개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무조건 아껴야 칭찬받고 검소해야 박수받는다. 경제 논리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하지만 사랑은 낭비해야 사랑이다. 사랑하게 되면 그 어느 것도 아깝지 않다.

어떻게 우리 가정을 행복하고, 사랑이 많은 가정으로 가꾸어 나갈 수 있을까? 우리는 과감하게 낭비하는 결단을 할 필요가 있다. 생일인데도 아무런 축하 없이 생일 케이크도 자르지 않고 특별한 이벤트 없이 지나갈 게 아니다. 온가족이 가족 구성원의 생일을 함께 기뻐해 주어야 한다. 그게 가족이다. 가족은 기쁜 일에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에 함께 슬퍼해야 가족이다. 경제 논리 때문에 기쁜 일도 억제하고 감정을 꼭꼭 숨기는 것은 미덕이 아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영적인 가족 공동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영적인 가족이다. 교회가 좀 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하는 일을 해야 한다. 외부 사람들이 보기에는 낭비처럼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사랑이 넘치는 영적인 가족 공동체는 일은 그냥 되지 않는다. 무엇인가 허비해야 한다. 물론 허례허식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가족이 모일 때에 가난한 형제가 있다면 그 형제를 생각하여 적당히 배려하는 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단순히 경제 논리로 축하도 없애고 사랑하는 표시도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사랑이 깊어진다고 기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랑은 표현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예수님에게 다가와 30 데나리온 가치가 있는 향유를 쏟은 여인이 있었다. 300데나리온이라면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액수다. 이 큰 금액을 한순간에 예수님 발에 쏟아부은 행위를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분명한 낭비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을 나무라지 않으셨다. 그 여인의 사랑을, 진실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으셨다. 자기 목숨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내어놓으셨다.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아무런 희생 없이, 사랑의 표시도 없이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말은 솔직히 말해 거짓말이다.

명절이 되니 미국에 있는 딸들이 더욱 그립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하나하나 구석구석 살펴 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게 마음이 짠하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