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락티코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지음 / 허성석 옮김 / 분도출판사 펴냄 / 120쪽 / 7,000원

4세기 무렵 기독교는 음지에서 양지로 올라섰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꽃을 피웠죠. 이후 세속 권력을 등에 업은 교회는 '세속화'와 '물량주의'의 길을 걸었죠. 그래서 태동된 게 사막 교부들의 수도자 삶입니다. 외적인 순교의 시대가 사라진 그곳에 영적인 순교를 촉발시킨 것이죠. 그들은 세속의 안락을 거부한 채 사막의 고독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좇아 거룩한 삶을 구현했습니다.

물론 그게 쉬운 것만은 아니죠. 광야란 낮에는 금방이라도 살갗을 태워 버릴 듯 뜨겁고, 밤에는 살을 에는 추위가 몰려오는 곳이죠. 그러니 그곳에선 자기 힘도, 능력도, 자랑거리들도 모두 비울 수밖에 없죠. 더불어서 자기 실존의 자각, 자기 정화, 자기 태어남의 과정들도 맞이하게 되죠. 모세·이스라엘 백성도, 다윗도·엘리야도, 예수님과 바울도 마찬가지였죠.

"정오의 악령(시편91:6참조)이라고도 부르는 아케디아(Akedia)의 악령은 모든 악령 가운데 가장 사악한 놈이다. 그는 제4시(오전10시)경 수도승을 공격하여 제8시(오후2시)까지 수도승의 영혼을 포위한다. 먼저 그는 태양이 더디게 움직이거나 멈추어 버린 것처럼, 마치 하루가 50시간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68쪽)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의<프락티코스>(분도출판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수행론 100장' 중에 '제 12장'의 '아케디아' 즉 '태만'이라는 유혹을 극복하도록 돕는 지침이죠. 오전 10시경부터 오후 3시 사이에 집중해야 할 그 경건의 시간에 창밖의 태양이나 바람소리조차 수도자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경우가 참 많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태만을 극복하는 게 쉽지 않다는 뜻이죠.

에바그리우스(345∼399)는, 광야의 은수자(隱修者) 생활 전통을 세운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251∼356), 공주(共住) 생활의 기초를 닦은 이집트의 파코미오(293∼346), 그리고 극단으로 치닫는 수도 생활을 좀 더 온건하고 사리에 맞게 전통을 세운 소아시아의 성 바실리오(329∼379). 이 세 줄기로 뻗어나간 수도생활을 이론으로 정리한 인물입니다.

345년 폰투스(Pontus)의 이보라(Ibora)에서 태어난 그는 교부 바실리우스에게 독서직을 받고, 379년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에게 부제품을 받죠. 후에 바실리우스가 죽자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를 스승으로 삼습니다. 380년 고향을 떠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석해 모든 이단과 싸워서 승리하기도 합니다. 그 일로 한때 교만과 애욕에 빠지지만 지병 때문에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383년 이집트의 니트리아에 2년 동안 살게 됩니다. 이후 더 깊은 켈리아 사막에서 14년 동안 소량의 빵과 소금과 기름으로 은수자의 삶을 살죠.

이 책 <프락티코스>는 그가 399년 곧 54세의 생애로 귀천할 때까지 쓴 책들 중에 가장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욕정과 무질서한 충동을 정화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는 인간의 영혼이 이성부와 정념부와 욕망부로 구성되어있다고 봅니다. 이성부는 영혼의 가장 고귀한 부분으로 타락한 정신과 연결되고, 욕정부로 통칭되는 정념부와 욕망부는 영혼이 육체에 연결돼 있기 때문에, '프락티케'(praktike)를 강조했습니다. 즉, 수행을 통해 육체를 정화하고 영혼의 욕정부를 새롭게 함으로 이성부의 '그노스티케'(gnostike). 다시 말해 하나님의 깊은 인식의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한편 그가 쓴<안티레티코스>(분도출판사)는 수도자들의 영성 생활을 방해하는 탐식·음욕·탐욕·슬픔·분노·아케디아·헛된 영광·교만 등 '8가지 악한 생각', '8가지 악령'을 물리칠 방도를 제시하고 있죠. 물론 그 모든 지침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말씀들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는 말씀과 기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 원수가 고통 받는 것을 보고도 측은히 여겨 돌보지 않고, 그를 식탁에 초대하여 적개심을 풀고 싶어 하지 않는 영혼에게: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주어라. 그것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은 셈이다. 주님께서 너에게 그 일을 보상해 주시리라(잠언25, 21-22)." (150쪽)

이른바 '분노'를 물리칠 수 있는 지침 중 하나죠. 이 부분을 읽을 무렵 새벽에 묵상하고 있는 은둔자(隱遁者) 다윗의 모습(삼상21-26장)이 떠올랐습니다. 사울의 칼날을 피해 도피 행각을 벌이던 다윗이 놉 땅으로, 블레셋 가드로, 아둘람 동굴로, 증조할머니 롯의 고향 땅 모압의 미스베로, 유대 광야 헤렛 수풀로, 십 광야로, 마온 광야 아라바로, 서해바다 서쪽 해변가 엔게디 동굴로, 바란 광야로, 그리고 십 광야로 숨어 들어갔죠.

▲<안티레티코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지음 / 허성석 옮김 / 분도출판사 펴냄 / 256쪽 / 1만 2,000원

은둔자 다윗에게 광야는 자기 실존의 자각과 자기 정화의 기반 위에 자기 태어남의 장소이기도 하죠. 그런데 그 광야의 엔게디 동굴(삼상24:1)과 십 들판(삼상26:1)에서 원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자기 분노로 보복하기보다 너그럽게 살려주죠. 그것은 사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올려놓음으로 그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고자(롬12:20), 하나님의 공의와 신실함(삼상26:23-24)을 증명코자, 그리고 하나님의 보상(갈6:9)을 받고자 한 일이었죠.

오늘날 교회의 권위가 세상 땅 바닥에 떨어진지 오래됐습니다. 교회가 세상 권력과 결탁하여 세속화되고 또 물량주의로 치닫고 있는 까닭이지 않을까요? 이런 때에 회복의 길이 어디에 있을까요? 교회의 실존을 다시금 자각하고, 자기 정화를 통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길은 사막 곧 광야로 나가는 길밖에 없겠죠. 사막 교부들처럼, 영적인 순교자의 삶을 사는 것 말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걸 내팽개치고 직접 광야로 나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장소를 이동해도 그 심령이 변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진정한 회복의 길은 지금 처한 자리에서 세속 권력을 끊고 물량주의를 내려놓는 프락티케를 구현하는 길뿐입니다. 그중에서도 에바그리우스가 이야기하 여덟 가지 중 '탐식'을 맨먼저 경계하는 것, 다시 말해서 교회의 '자기 비움'을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실은 그것이 다윗이 보여 준 삶이자 예수님께서 보여 준 삶의 거울이었죠. (빌 2:6-7)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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