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이 먹는 것, 그것이 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보았던 음식에 관한 다큐멘터리 생각이 납니다. 세계에서 음식의 편차가 가장 큰 나라가 중국이라 했습니다. 민공(民工)이라 불리는 시골에서 상경한 저소득층 막노동자들은 삼시 세끼를 '만터우(馒头)'라 불리는 맨 빵에 물만 마신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진 야채나 고기로 속을 채운 게 만두지만 중국에선 그냥 밀가루 반죽을 말아 놓은 게 만터우이지요?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 집에 돈을 부쳐주기 위해 대개는 수년씩, 더러는 병들어 쓰러질 때까지 일생을 대도시의 변두리 합숙소에서 외롭게 지내면서 휴식 없는 막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민공들입니다. 노동의 막간 식사 시간이 되면 쟁반에 날라져 오는 만터우 서너 개가 식사의 전부라는 겁니다. 그걸 먹고 수돗가로 가서 물을 마시면 식사가 끝나는 겁니다. 그것을 요리라 부르는 게 합당할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반면 중국의 부자들은 자기과시를 위해 요리를 시킨다 합니다. 누워서 자도 될 만한 원탁 위에 뻐그러지게 차려진 진수성찬의 갖가지 요리는 곧 자아의 실현입니다. 베이징의 한 음식점에서 거대한 만찬으로 평범한 저녁 식사를 하는 어느 부자의 모습이 화면에 나왔습니다. 정말 대단한 식사였습니다. 민공 가운데 한 사람의 인터뷰가 이어졌습니다. 그 화면을 보여주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던 겁니다. 여러분은 그 사람이 어떻게 말했을 것 같으십니까? "사람은 다 태어날 때부터 먹을 것이 정해져 있다. 수명이 정해진 것과 같다. 저 사람은 저렇게 먹고 살 팔자를 타고 났으니 저렇게 먹고 사는 게 당연하다. 우리는 이렇게 태어났으니 이렇게 살 뿐이다. 부럽고 안타깝지만 하늘이 정해 준 걸 어쩔 수 있겠나." 대략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보다 젊었을 때라면 그런 말을 하는 민공을 안타까워했거나 비판했거나 분노를 느꼈을 겁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저를 슬프게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 민공의 입장에서 우리가 기대할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과연 "인간이 먹는 것, 그것이 그다"라는 말이 맞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예수님(성경)께서는 반대로 "인간이 뱉는 것, 그것이 그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너희는 내 말을 새겨들어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께서 군중을 떠나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묻자 "너희도 이렇게 알아듣지를 못하느냐?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느냐? 모두 뱃속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뒤로 나가 버리지 않느냐? 그것들은 마음속으로 파고들지는 못한다." (마 7:14-19)

우선 이 말씀은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에 대한 말은 아닙니다. 만터우 서너 개와 일부러 남겨서 버리는 진수성찬의 차이를 고려한 말씀이 아닙니다. 율법에 의거해 음식은 철저히 가리면서 그 뱃속으로부터는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을 뱉어 내는 바리새인을 비판한 말씀입니다. 곧 먹는 음식이 아니라 본질적 인격의 나타남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만터우 서너 개로 배를 채우든 진수성찬으로 자아를 실현하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민공이라도 얼마든지 나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진수성찬을 즐겨도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얼마든지 가능한 겁니다. 이런 것을 대략 '교의(敎義, dogma)'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교의는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부자라고 박하게 보지도 않고 가난한 자라고 일부러 두호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음식이란 정말로 가치중립적인 걸까요? 절대로 그렇게만 보아서는 안 될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금방 말씀 드린 대로 현실에 있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 곧 삶의 나타남의 절대적 차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려는 것은 "음식은 가치중립적이고 더러움과 아무 상관이 없다", "차이는 인격으로부터 나온다"는 식의 '교의'가 현실의 적용으로 갈 때는 전혀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규제해 왔습니다. 그것으로 사람들 위에 선생 노릇하고 지도자 행세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실제 삶의 행태로는 일반적인 죄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아니 대중의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되는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사회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침묵의 카르텔을 깨뜨리신 겁니다. 이제 현대에는 더 이상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지고 종교 생활을 규제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종교 생활을 규제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 대신 무엇을 통제할까요? 입으로 들어가는 것에 관한 비판을 통제합니다. 쉽게 말하면 만터우가 진수성찬을 향해 할 수 있는 비판을 통제합니다. 민공이 베이징 갑부를 향해 할 수 있는 비판을 통제하는 겁니다. 무엇이요? 교회의 교의가 말입니다.

여기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는 걸 아시겠지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란 결국 욕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욕망을 통제하여 사람들을 다스리던 교회가 이제는 욕망의 자유를 선언하여 사람들을 다스리는 겁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제는 욕망을 누리는 것에 관한 비판을 통제할 수 있는 천부적인 신의 말씀을 획득한 겁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곧 그 사람이 '밖으로 내뱉는 것'입니다. 베이징 부자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곧 그 사람이 밖으로 내뱉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밖으로 내뱉는 것이 부패의 증거라고 하셨지요? 과거만도 못해진 거지요? 그러니 교의를 배우거나 가르칠 때 주의가 요구됩니다. 교의에서 중요한 것은 "인격의 부패란 속(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라는 거지만, 이게 신앙 곧 믿음의 실천으로 갈 때는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겁니다.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어떤 고백이어야 할까요? 속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생활 전체, 우리의 태도, 가령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나 하루에 50명씩 매일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있는 우리의 현실이 우리가 뱉어내는 속마음이란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물론 감각이 있어야 고백을 하겠지요?) 그 고백이 있어야 그 다음 태도가 결정되는 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이지 외모가 아니라는 교의만 주장한다면 그것은 우리의(실제로는 자기 욕망의) 현실을 그대로 밀고 나가겠다는 관성에 이끌릴 뿐입니다. 말씀을 겨우 문자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될 이유입니다.

제가 아는 크리스천들을 보면 다들 참 착하고 겸손하고 신실합니다. 특별히 나쁘거나 악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의 삶이 무엇을 기반으로 하는가 질문을 해본다면 역시 기독교 교의에 의거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배운 교회의 교의를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뭔가가 결여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일까요? 고백입니다. 교의만 있고 고백이 없습니다. 마치 빛만 있고 그림자가 없는 것 같습니다. 긍정만 있고 고뇌가 없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생경하고 날것 상태 그대로입니다. 그것을 자기 고백화할 수 있는 성찰의 감동, 현실화된 감각이 없습니다. 자주 상대가 이해하기 어려운 자기만의 고집스런 믿음을 설파하기도 하는데, 믿음이란 본래 그렇게 소통 불가능한 것이라 믿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 딸들이 자주 쓰는 말처럼 '영혼 없는' 사람들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는데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기도한다고 하는데 기도해 준다는 고마움이 들지 않는 겁니다. 왜 이리 청중의 상태를 인식할 줄 모르는 연설자처럼 헛수고를 할까요? 알아듣거나 말거나 주님의 명령이니까 한다고요? 아마 그런 말도 교의를 잘못 이해한 결과일 겁니다. 그 결과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자주 군중 속에서 외롭게 보이지요? 어떤 이들은 그 외로움을 믿음 때문에 받은 박해의 훈장쯤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론 어떻습니까? 훈장치고는 너무나도 색 바래고 초라한 훈장입니다. 빛은 그림자를 만들고 그림자는 빛의 반영이듯 우월감과 열등감은 빛과 그림자일 뿐입니다.

2.

모든 개인적 발전이나 인류적 발전은 이해력의 증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해력이 증진된다는 것은 자기 성찰의 증진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이해력, 자기 성찰이란 다른 말로하면 모든 객체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능력입니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가 아니라 '그대가 어떻든지 간에 나는 나'라는 자각입니다. 물론 막무가내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정직한 자각을 말하는 겁니다. 자신의 특별함, 독보적임, 독특함을 발견하는 겁니다. 남의 흉내를 내거나 착한 척을 하거나 권위자에게 인정을 받으려 하거나 심지어 무슨 덕을 보려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객체들을 우상화 하는 겁니다. 진정한 하나님을 대신한 무언가를 우상숭배하면서는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해 낼 수가 없습니다. 우상을 깨뜨려야 참 하나님이 발견됩니다. 우상을 깨뜨려야 자기 성찰이 가능해지고 이해력이 증진됩니다. 여러분은 회사나 조직이나 하다못해 친목 모임일지라도 일단 두 사람 이상이면 거기선 독립적인 자유가 제한받기 시작한다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물론 참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양보하는 것은 훌륭한 덕성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위가 되고 권력이 될 때, 그 다음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교회도 여기서 예외일 수가 없고, 교회이기 때문에 더 비상식적이고 우상숭배적인 상태에 빠지기 쉽습니다.

르네상스(Renaissance, 문예부흥) 인문주의는 중세의 로마 가톨릭 세계의 미신과 억압으로부터 분출하고 꽃 핀 전례 없는 이해력과 자기 성찰의 열매였습니다. 처음엔 건축, 회화, 조각 같은 예술 분야에서 그 다음엔 문학과 역사, 마지막으로 종교 분야에서 인문주의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신 중심(사실은 신 중심인 것을 교의로 내세운 교조주의)의 사유로부터 인간 중심의 사유로 변화되어 간 겁니다. 그때는 흑사병과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기였고 교황청이 부패할 대로 부패했던 시기였습니다. 이슬람이 진출하고 새로운 사회적·영적 욕구가 팽창하던 시기였습니다. 많은 천재들에 의해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화가 복구되고 그것들을 예술 작품으로 재탄생시켰습니다. 왜 고전 부흥이었을까요? 기독교가 중세기 천 년 동안을 지배하면서 모든 인간적인 것을 억압했기 때문에 자기들의 자유를 분출할 도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겁니다. 그 마지막이 종교 개혁입니다. 종교 개혁으로 개인이 발견되고, 자연이 발견되고, 신대륙이 발견되고, 우주가 발견된 겁니다. 민족이 발견되고 민중이 발견되고 민주주의가 발견된 겁니다. 이 모든 게 무엇으로 말미암았을까요? 이해력과 자기 성찰에 있어 각성되고 자각된 개인들의 자기 고백으로부터 비롯한 겁니다.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레오나르도 다빈치, 단테, 에라스무스, 칼뱅, 루터, 마젤란, 콜럼버스가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 고백을 발견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만일 그들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크리스천들과 같았다면 어떠했을까요? 너무나도 겸손한 나머지 자기를 발견한다거나 자기를 고백한다거나 세계의 실상을 이해한다거나 하는 일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맡겼을 겁니다. 그리고 "저는 자유보단 순종을 좋아해요"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객체에 대한 주체의 과대평가는 언제나 주체의 자발적이고 독립적이고 자연적인 발전을 저해합니다. 가령 우리 크리스천들은 우리의 믿음의 선진성과 우월성과 유일성의 교의에 힘입어 저 <슬픈 열대>에 나오는 아마존 원시인들의 믿음을 안타깝게 여깁니다. 또한 여자들에게 부르카를 씌우고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리고 삼시 세끼 메카를 향해 요가 매트 위에서 절하는 이슬람교도의 믿음을 야만적이라 비웃습니다. 또 불교도들의 독특한 금욕이나 힌두교도들의 벌거벗은 무욕의 삶 같은 것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퇴행적인 헛수고라 판단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것들은 본질은 모른 채 외모와 전통에 매달린 것처럼 실용성이 떨어져 보입니다. 그것들을 관광 상품이나, 가끔씩 우리의 관용적인 태도를 나타낼 때나 존중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종교 안으로 들어와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는 순간 우리는 그들을 향해 언제나 이렇게 묻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그런 걸 믿을 수 있죠?" 그런데 만일 우리에게 누군가 동일한 질문을 한다면 어떨까요?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믿을 수 있죠?"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대답을 하게 될 겁니다. 우리의 교의에 입각한. 그러면서 우리는 그들에게 그들의 믿음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려 합니다. 지금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세계 각지로 들어가 그런 일을 하고 있지요? 어떤 일인가요? 그들의 손에서 익숙한 종교의 도구들을 빼앗는 겁니다. 그것들은 그들의 조상 대대로 사용해온 익숙한 도구들입니다. 그러니 그들 가운데 조금 똑똑한 사람이라면 금방 이 선교사라는 존재의 목적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그들은 선교사들을 불쾌하고 위험한 자로 주목해서 볼 것입니다. 물론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선교에 반대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선교가 단순히 기독교 교의 전파가 되는 걸 반대하는 겁니다. 또한 더 긴하게 말씀드리려 하는 것은 익숙한 종교를 빼앗는 사람에 대한 불쾌와 위험입니다. 그게 현재 한국교회의 상태라는 말씀을 드리려는 겁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종교를 빼앗으려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될까요? 거기서 오는 불쾌와 위험을 여러분은 어떻게 만들까요? 한국교회는 그동안 교회 안의 선교사들에게, 깨어난 목회자들, 각성된 성도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고백하는 동료들에게 한결같은 불쾌와 위험으로 반응해 왔습니다. 적극적으로 인정하며 토론할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교회만 아니라 성도 개개인도 사회 속에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왜 이렇게 우리가 위축된 걸까요?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요? 우리 믿음은 자기 고백에 그렇게 취약한 걸까요?

3.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고소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책임 지우고 감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상 주고 벌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사랑도 있고 봉사도 있고 희생도 있지만 그런 것은 복음의 진리로 스스로 선 사람이 있을 때 가능한 겁니다. 이제부터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는 요구를 전적으로 스스로에게 내가 해야 합니다. 교회가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기 때문에 내가 행동해야 합니다. 사회가 잘못되었다면 그것 역시 전적으로 내 책임이기 때문에 내가 가능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다른 핑계나 숫자와 대세에 묻어가는 전근대 봉건적인 태도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뭔가에 두려워하면서 예속되어 있는 우상숭배입니다. 우리는 자유인이니 할 수 있는 한 우리의 자유를 나타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죄를 선언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롬 8:33-35)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5)

다시는 정죄받지 않는다는 고백은 정죄에 관한 자기 고백, 즉 지금도 역사하고 있는 정죄에 대한 도전에 관한 고백입니다. 다만 그렇다는 교의가 아니니 말로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정죄 당하고 있습니까? 매일 매 순간 자기가 자기를 정죄합니다. 다른 누가 아니라 자기가 먼저 스스로 알아서 자기를 정죄하도록 만드는 온갖 정죄의 구조가 가동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너무나 오랫동안 정죄받고 정죄를 일삼아 왔기 때문에 거의 신분이나 운명의 굴레처럼 돼 버려 인식도 못할 지경입니다. 그런 것들은 서로가 서로를 정죄하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깨어서 즉각적으로 정죄의 역사를 알아차리지 않으면 거기서 벗어난다는 것은 어림도 없게 됩니다. "다시는 정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은 이제부터 "다시는 정죄 받지 않을 사람으로 행동하라"는 말씀으로 찰떡 같이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 얼마나 높은 경지의 신앙입니까?

지금 종교 개혁이 필요하다는 말들이 난무합니다. 과연 종교 개혁 이전과 이후의 신앙에 있어 본질적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만일 달라진 게 없다면 종교 개혁은 도루묵입니다. 달라질 그것이 여러분에게 무엇인지가 밝혀져야 종교 개혁이 비로소 시작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우리의 모든 교의적 기독교 저편에 우리들이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이 무서워 발설할 수 없고 분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하지 않고 다른 일들로 시간을 때웁니다. 다른 일로 시간을 죽이는 것은 죽음의 징후이면서 그 자체가 죽음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정죄당하고 심판받고 있는 겁니다. 바로 이 죽음(심판) 앞에서, 진리에 입각해 우리들의 진실과 무력함과 착오에 관해 새롭게 결심하고 새로운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각된 자기 자신 뿐입니다. 그런데도 이 죽음 앞에서 여전히 죽음 없는 신앙이라는 끝없는 거짓말로 교의의 깃발만 펄럭이는 게 우리 신앙의 형편 아닙니까? 거기엔 도무지 교의는 있으나 고백이 없습니다.

4.

전문가들 가운데 이해력과 자기 성찰을 발전시켜 학문을 완성할 가능성이 가장 낮은 전문가 집단이 한국 기독교인들이 아닐까 합니다. 성경 공부를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신앙 서적을 많이 읽은 사람일수록 이상하게 말과 글을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집니다. 조금만 다른 말을 하면 아예 이해를 못합니다. 자기화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저항만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 생활이나 기독교 신앙이 독자적인 사고 능력을 계발하는 데 저해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입니다. 저도 신앙 경험 때문에 너무나 많은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상실하고, 관심을 상실하고 나니 동어반복의 공허한 말들만 남게 됩니다. 온갖 자기모순 속에서 끝없이 자기를 정당화하지만 그럴수록 시대와 함께 나아가지 못하고 뒤로 밀립니다. 한국교회는 무엇보다 이 폐쇄성을 성찰하고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유의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도덕이든 하나님에 관한 믿음이든 어떤 것이든 그것은 하늘에서 인간에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게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 안에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서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해야 성령(聖靈, 거룩한 영, 구별된 영, 초월된 영)의 인도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종교 개혁, 교회 갱신이란 단지 계몽으로는 안 될 겁니다. 교회 안의 도덕적 요청이란 것 역시 보편적 인간 심령에 깃든 신성의 요구인 겁니다. 종교나 교회 안에 갇혀있는 요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혼동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미지 차이를 우리는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신상이 없다고 우상이 사라진 게 아닙니다. 우상의 신상은 인간의 가슴 속에도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 치신 자니라.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왜 교회에 모였을까요? 교회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인다고들 하지만, 만일 교회가 정말 욕망으로 들끓는 각종 사람들의 모임이라면 왜 교회에 와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의 양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독교가 생명에 관한 것이고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우리는 생명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생각해야 할 겁니다. 거기에는 과학적 탐구가 필요합니다. 생명이 생명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있겠지요? 그 과정을 기억하고 그 방식대로 생명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그 방식이 아니라면 그것은 생명이 아닌 겁니다. 여러분 정신의 전 과정은 정신입니다. 외부에서 오는 어떤 믿음도 아니고 하나님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어낸 온갖 거짓말과 착오의 책임을 종교와 하나님에게 떠넘기려 하지 마십시오. 기적을 보고 떡을 먹고 배부른 경험의 욕망이 아닌 진정으로 과학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우리가 뱉어 내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무엇이 썩지 않는 양식이고 하늘의 떡일까요? 그것은 진정 놀라운 진보이고 진일보일 겁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씁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딤전 4:15)

지금 교회 안에는 진보를 두려워하고 저항하며 불쾌해 하고 위험하게 인식하며 거부하는 원시인들만 우글거립니다. 그들은 저마다 형형색색의 장신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굴에 먹물을 들이고 분장을 하고 온갖 우상의 조형물들을 지니고 그것을 저마다의 믿음이라 자랑합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도 있는데, 우리가 진정 기독교에 있어 전문가가 되기에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 걸까요? 주께서 한없는 영감의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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