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괴망측한 일이 기독교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동원해서 이승만을 숭배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고,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설파하며 역사 왜곡까지 감행한 청계광장 건국절 행사 역시 알고 보니 홍재철·김성광 등 기독교 목사들 주도로 이루어졌습니다.(관련기사: 목사들은 '이승만' 찬양, 아이들은 '반공' 찬양)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일개 세속 국가 대한민국에 종속됩니까? 하나님나라가 역사의 순간을 스쳐 가는 이념의 파편 따위와 같은 수준이라도 되는 겁니까? 대체 본인이 믿는 신앙의 수준을 이렇게 격하해도 됩니까? 이 모습을 루터가 이해하겠습니까, 칼빈이 이해하겠습니까?

단언하건대 이승만은 기독교를 대표하는 민족 지도자가 아닙니다. 어느 순간부터 심심찮게 여러 기독교 블로그에 이승만을 찬양하는 포스팅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우선 개념부터 분명하지 않습니다. 왜 한국 기독교가 이승만을 이렇게 떠받들어야 되지요? 이승만이 한국교회 발전과 성장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는 거죠? 박형룡, 김재준 같은 굴지의 신학자도 아니고, 한경직, 박윤선 같은 대표 목회자도 아니고 왜 갑자기 이승만인 거죠? 평양 대부흥 운동을 이승만이 주도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기독교를 대표하여 독립 운동사나 대한민국 성립에 큰 공을 세운 대표 민족 지도자인가요? 이것 역시 '그렇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물론 유명한 지도자는 맞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급의 기독교 민족 지도자는 한둘이 아닙니다.

여기 안창호가 있다

안창호 같은 경우는 이승만을 뛰어넘는 대표적인 기독교 민족주의자입니다. 최초로 공화정을 표방하며 서북 지방 기독교인들을 끌어모아 조직적인 독립운동과 애국 계몽 운동을 주도한 '신민회(1907)'를 누가 발기했습니까?

이미 하와이를 거쳐 미주에서 대한인국민회를 개척하여 해외 독립 운동 네트워크의 근간을 만들었고 3·1 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을 주도합니다. 초기 상하이 임정(1919) 설립 과정을 주도했다가 연해주 대한국민의회(1919)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상하이 임정을 없애고 그 유명한 대한민국임시정부(1919)를 수립했던 이는 이승만이 아니라 안창호였습니다.

다만 정부 설립 과정에서 안창호의 주도권에 대한 다른 독립운동가의 견제가 심해지니까 정부 설립을 주도하되 본인은 노동국 총판(노동부 장관 정도)이라는 낮은 자리를 맡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듯 대한민국 정통이라면 그 임시정부를 만들 때 이승만은 무엇을 했던가요? 초대 임시 대통령이 된 것은 맞지만 설립 과정에서 이승만이 대체 어떤 역할을 했던가요?

안창호는 이승만 못지않은 반공주의자였습니다. 하지만 임시정부 활동이 침체되고, 야심 차게 기획했던 국민 대표 회의(1923)가 실패로 돌아간 이 후, 안창호는 민족 유일당 운동(좌우합작)에 매진합니다.

베이징에서 '당적으로 결합하라!'고 가장 먼저 외친 이가 안창호였습니다. 즉, 사회주의자건 민족주의자건, 무장투쟁이건 외교 독립이건 일본과 싸워야 하는 대명제만큼은 모두가 동의하니까 본인의 생각과 주의를 버리지 말고 그냥 편하게 연합해서 싸우자는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략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 선구적이고 창의적인 노력이 국내 최대 규모의 좌우합작 단체 신간회(1927)라던지, 충칭입시정부의 좌우 통합적 성격 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또한 그가 만든 흥사단이라는 단체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누가 대표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김구도 있고 김규식도 있다!

안창호만 있었나요? 이승만이나 안창호에 비해 개인적 신앙고백을 적극적으로 표명하지 않았던 김구 역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김구 전집을 보면 새롭게 건국할 국가는 "성서의 기준에 맞추어서 만들어야 한다"고 분명히 못을 박고 있습니다. 물론 이승만 못지않은 반공주의자였지요.

더구나 김구는 임시정부를 온몸으로 지켰던 사람입니다.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주도했고, 충칭에서 광복군을 창설했으며, 조소앙·지청천 같은 거두 민족주의자들을 품었을 뿐 아니라 김원봉 같은 민족주의 좌파 세력도 품었습니다. 또한 장제스를 설득하여 임시정부를 승인받고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약속받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도대체 이승만보다 못한 게 뭐가 있을까요? 이승만의 모호하고 추상적인 업적이 과연 주석 김구에 비할 바 인가요?

김규식도 기독교인입니다. 이승만·김구·김규식, 소위 해방 공간에서 우익 3거두로 불리는 인물이 모두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김규식은 1910년대 중국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서 만든 신한청년단 창설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임시정부 외무총장 자격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여해서 조선의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벌였고, 김원봉과 함께 민족혁명당(1935)를 결성하여 민족주의 진영 내의 이념 갈등을 해소하고 정력적인 중국 관내 독립 운동을 주도합니다.

해방 후에는 여운형, 안재홍, 김구 같은 거두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좌우합작 운동(1946), 남북협상(1948)을 주도하며 분단을 막기 위한 치열한 투쟁을 벌입니다.

조만식, 이상재를 아는가?

조만식 또한 기독교인입니다. '조선의 간디'라고 불렸던 인물로, 평생 평양에서 활동하며 평안도 토착 기독교 민족주의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 역시 장로였습니다.

1920년대에는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하며 민족자본 성장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이 문화가 지금까지도 남아서 금 모으기 운동, 국산품 애용 운동 같은 독특한 한민족 경제민족주의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또한 해방 후에는 평남건국준비위원회를 주도하며 소련, 김일성 등과 함께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이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망명을 권했을 때 오히려 북에 남아 죽음으로 민족을 지키려고 했던 숭고한 이가 바로 조만식입니다.

이상재 역시 기독교인입니다. 양반 유생 출신으로 유학과 기독교의 연속성, 그리고 유학의 궁극적 완성이 기독교라는 확신 속에 기독교인이 되었던 인물로, 식민지 기간 국내를 대표하는 민족 지도자였습니다.

이상재는 조선일보 사장, 신간회 대표를 역임합니다. 1920년대 국내에서 사회주의가 발흥하면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와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간의 다툼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이상재는 바로 그 갈등의 중심에서 서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갑니다. 당시 조선일보 기자의 상당수가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신간회의 기층 조직 활동가 상당수가 사회주의자였음에도 우익 지도자 이상재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좌우합작 활동을 벌입니다. 지금이야 조만식, 이상재가 이승만에 비해 덜 유명하지만 식민지 기간으로 돌아가거나, 당시 북한으로 돌아간다면 이들의 유명세는 이승만에 비해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평안도가 한국 기독교의 발원지입니다. 조만식은 평생 여기에서 헌신했으며, 그의 제자들이 남하하여 한국 개신교의 뿌리가 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도대체 누가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며, 누가 기독교 민족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충청도 서천 출신으로 한양에서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 활동부터 시작해서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벌인 이상재가 이승만에 비해 무엇이 모자랍니까?

기독교 민족 지도자들은 '반공'을 넘어서려고 하였다

더구나 흥미로운 점은 당대의 거두 민족주의자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그 면면이 상당 부분 이승만과 다릅니다. 안창호, 김구는 분명한 반공주의자였습니다. 김규식 역시 소련을 방문하고,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실망이 너무나 컸던 관계로 지속적인 좌우합작 활동에도 우익적 정체성을 분명히 합니다. 그럼에도 이분들은 대부분 민족의 대의 앞에서 이념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입니다.

안창호는 민족 유일당 운동을 통해 최초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와의 연합을 시도했고, 김구는 충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주의 좌파와 조선독립동맹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독립운동 진영과의 통합을 이루어냈습니다.

김규식은 대표적인 국내 좌파 여운형과 연합했고, 김구와 연합하며 분단을 막아 내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거듭했습니다.

그들은 정체성으로 따진다면 당연히 '기독교 정신'이고, 지향점으로 따진다면 당연히 '반공'이겠지만 민족적 대의 앞에 이념을 뛰어넘거나, 이념적 갈등을 이겨낼 수 있는 구체적인 플랜을 마련한 사람들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이들에 비해 이승만은 대체 무엇을 했으며 어떤 차별점과 위대함을 보였다는 건가요? 언급하기 유치할 정도입니다.

이승만, 그는 이미 역사에서 두 번이나 단죄를 받았습니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여러 문제로 인해 1925년 탄핵받아서 쫓겨났습니다. 1960년에는 4·19혁명을 통해 쫓겨났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수호자라고 하지만 두 번이나 헌법을 뜯어고치며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했고, 정치 깡패와 관제 데모 등 온갖 잘못된 정치 문화가 이때 만들어집니다. 한국 자본주의 발전에 기틀을 놓았다고 하지만 원조 물자에 의지해서 근근이 유지가 되었을 뿐이고, 본격적으로 경제 개발이 진행되기 전, 1960년대의 대한민국이 일제강점기 말기에 비해 얼마나 벗어났던가요. 

하와이에 들어가서 의형제라고 불리던 박용만을 쫓아내며 한인 사회를 양쪽으로 분열시킨 사람, 식민지 기간에 실제로 무슨 독립운동을 했는지 입증조차 어려운 사람, 한국 기독교 발전에 무슨 공을 세웠는지 그 업적조차 미미한 사람. 왜 이승만을 콕 집어서 기념 예배를 드리고 그를 기리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하나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역사 공부 좀 합시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 공부 좀 합시다. '저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하는 식으로 반응하지 맙시다. 무지하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요? 당당하게 잘못된 역사 지식을 교회에 유통하는 것을 막을 만큼 충분히 훈련이 되어 있는지 심각하게 따져 볼 문제입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결코 목회자의 전횡에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바꾸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심용환 / '깊은계단&5분인문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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