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참선의 도구로 '화두(話頭)를 든다'고 하는데 화두로 사용되는 질문을 공안(公案)이라고 합니다. 그 중 '뜰 앞에 잣나무(庭前栢樹子)'라는 공안이 있습니다. 한 제자가 조주(趙州, 778~897) 선사에게 물었다는 겁니다. "어떤 것이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달마(達磨)대사가 인도에서 가지고 온 불법의 진리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던 겁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무엇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진리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때 선사가 대답해 준 말이 '뜰 앞에 잣나무'였습니다. 그 대답 자체가 화두이고 공안인 셈입니다. 본격적으로 이 얘기를 하자면 한이 없을 것이고, 제가 풀어 보려는 해설도 사실 이 얘기의 정수는 아닙니다만, 제 나름대로 '뜰 앞에 잣나무'란 실존하는 외부적 존재라고 해 두겠습니다.

본래 불교의 가르침은 '일체 유심조(一切有心造)', 곧 모든 세상의 더럽고 혼탁한 현상은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발생하는 망상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이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그러니 이 모든 인생의 욕망과 그로 인한 갈등과 쟁투와 괴로움이 전부 다 마음이 빚어내는 망상임을 확철히(!) 깨달을 때 망상의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진리의 자유로운 경지, 곧 하나님의 창조하신 본래 안식의 쉼(평화)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1장 28절에 피력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는 말씀의 요체일 겁니다. 여러분도 한 번 쯤은 들어 보셨을 겁니다. 법정스님이 번역한 불교의 초기경전 <숫타니파타 (經集)>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모든 것이 다 마음의 망상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사자는 소리에 개의치 않기 때문에 놀라지 않고, 바람은 그물 따위에 걸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연꽃은 진흙 속에 피지만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사자에 대한 얘기겠습니까? 바람에 대한 말이겠습니까? 연꽃에 대한 이야기겠습니까? 마음이 빚어내는 망상을 벗어나면 지금 온갖 고통과 괴로움에 얽매여 사는 사람이 이와 같이 자유로워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뜰 앞에 잣나무"라는 화두는 '일체 유심조'를 다시 의심하게 하는 화두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이고 생각이라는데 과연 그러하냐? 그러고 보면 그것조차 망상(생각)일 뿐이라는 거지요? 아무리 모든 것이 마음의 감성과 생각의 이성이 빚어내는 공허(空虛)의 교향곡이라 할지라도 "뜰 앞에 잣나무"처럼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는 분명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저 무성한 잣나무는 내가 그 잣나무가 푸르다는 사실을 생각해서 녹음으로 드리워져 있는 게 아닙니다. 생각을 좀 더 진전시켜 보면, 한낱 뜰 앞에 잣나무가 아니라 '어떤 인간'이라면? 괴롭게 하는 원인이라면? 혹은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악이라면? 악의 세력이라면? 그것은 분명 나에게 영향을 미치겠지요? 그것은 내 마음의 발산이 아닙니다. 내가 그것을 좋게 생각한다고 해서 악이 선으로 변하는 게 아닙니다. 존재하는 악을 없는 것으로 친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내 마음이나 생각과 상관 없이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존재할 뿐더러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받아들이기 나름이라고요? 그건 순서가 틀린 겁니다. '일체 유심조' 다음이 '뜰 앞에 잣나무'지, '뜰 앞에 잣나무' 다음에 '일체 유심조'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이와 같이 ‘일체유심조’와 ‘뜰 앞 잣나무’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상충되는 이 세계의 분명한 두 진실입니다.

2.

이쯤 되면 여러분들은 오늘 천 목사가 도대체 설교를 어떻게 끌고 가려고 하는가, 그 이데올로기의 근거가 무엇인가, 의구심이 드실 겁니다. 설명이 길어질 것 같아 기사를 한 꼭지 읽어 드리겠습니다.

지난 28일은 조계종 100여 개 선방에서 2천여 명의 선승들이 3개월 간 두문불출하고 참선만 하는 하안거를 마치는 날이다. 이날 설악산과 동해가 마주한 강원도 속초 신흥사에서 불교의 조종을 경고하는 죽비 소리가 울린다. 신흥사, 백담사, 건봉사, 낙산사 등 강원도 동부권 선방들에서 수행 정진한 승려들 수백 명이 운집한 가운데다.

하안거 해제 법문을 할 이는 설악권 본말사의 정신적 지주인 신흥사 조실 오현(83) 스님이다. 그는 만해상과 만해축전, <불교평론> 등을 처음 만들어 불교와 세속의 소통을 이룬 선구자다. 그는 지난 3개월 간 방문을 봉쇄하고 하루 한 끼 식사만 제공 받는 백담사 무문관에서 수행 정진했다.

신흥사가 미리 배포한 법문에서 오현 스님은 3개월 간 앉아 정진한 선승들을 격려하기보다는 매를 들었다. 그의 해제 법문은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시작해 소록도에서 봉사한 두 외국인 수녀의 얘기로 맺었다. 선(禪)과 화두가 얼마나 위대한가로 시종일관한 선가의 기존 법문들과는 천양지차였다.

"종교인의 생명은 화두다. 선사들은 서로 안부를 물을 때 화두가 성성하냐, 화두가 깨어 있느냐고 묻는다."

오현 스님이 화두의 중요성으로 서두를 꺼낼 때만 해도, 그렇고 그런 화두 찬양론이려니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에서 활동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갈 때 세월호 유족의 눈물 어린 고통의 '순례 십자가'를 비행기에 실었다. 한국에서도 세월호 추모 리본을 달고,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네 차례나 세월호 유족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고 희망을 잃지 말라며 사랑한다는 편지를 남겼다. 지난 3월 로마에서 한국 천주교 주교단을 만난 자리에서 첫 물음도 '세월호 문제'였다고 한다. 사실상 세월호가 교황의 방한 내내 화두였다. 이처럼 프란치스코 교황의 화두는 살아 있는 오늘의 문제다."

그러면서 그는 "그런데 지난 결제(3개월 전 하안거 첫 날) 때 우리 스님들의 화두는 무엇인가. 무(無) 자 화두인가, 본래면목(본래의 모습)인가, '뜰 앞의 잣나무'인가. 굳이 알 필요가 없다. 이 모두 천 년 전 중국 선사들의 산중문답이니까 말이다."

그는"화두에는 활구(活句·살아있는 말)가 있고 사구(死句·죽은 말)가 있는데, 프란치스코 교황의 화두는 살아 있는 현재의 문제이고, 우리 선승들의 화두는 천 년 전 중국 선승들의 도담이어서, 시간적으로 천 년의 차이가 나고 있다"고 꼬집었다.

"평생 참선만 하며 존경 받던 어느 노스님은 어린 시절의 제게 '화두 들고 참선 공부하다가 죽어라'고 당부했다. 그때는 '예' 하고 대답했지만 그게 말이 되는가. 참선해 빨리 깨달아 그 깨달음의 삶을 살아야지 참선만 하다가 죽으라고? 지금 생각하면 그 노스님은 고대 중국 선승들의 화두에 중독된 것이 분명하다. 마약중독자가 중독된 줄 모르는 것처럼 화두 중독자도 자기가 중독된 줄 모르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는 깨달은 선승들은 많은데 깨달음의 삶을 사는 선승은 만나기 어렵다고 한다"며 "선원이나 토굴에서 참선만하며 심산유곡에서 차담과 도화를 즐기며 고담준론과 선문답으로 지내며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고 해서 깨달음의 삶을 산 것이 결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화두를 타파하면 부처가 된다고 하는데 부처가 왜 존재하느냐"고 물었다.

"중생이 있기 때문이다. 불심의 근원은 중생심이다.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필요 없다. 환자가 없으면 의사가 필요 없는 것과 같다. 의사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고 병을 치료해야 한다. 부처는 중생과 고통을 같이 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월호 유족들과 고통을 같이 하듯이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선승들의 화두도 우리 시대의 아픔들이 화두가 되어야 한다"며 "천여 년 전 중국 신선주의자들, 산중 늙은이들이 살며 뱉어놓은 사구를 들고 살아야 하느냐"고 질책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기 혁신이 없는 교황청은 병든 육체와 같다고 비평하고 일반 성직자는 정신적 영적 동맥경화에 걸렸다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바티칸 관리들의 위선적인 이중생활과 권력에 대한 탐욕을 실존적인 정신분열증이라고 비판하고 권력에 눈 먼 성직자들은 영적 치매에 걸렸다고 분노했다는데, 이 분의 파격적인 발언을 그냥 남의 교단 일로만 들을 일이냐. 이 발언을 통해 우리들 자신을 냉엄하게 둘러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오현 스님은 한센인들이 사는 소록도에서 평생 헌신하다가 나이가 들자 남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며 올 때 가지고 온 가방 그대로 말 없이 고향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두 수녀의 얘기를 들려 주며 "이렇듯 종적을 남기지 않고 사는 삶이 깨달음의 삶"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부처의 삶을 살지 않고 부처가 되겠다고 죽을 때까지 화두를 붙들고 살며, 그래 가지고 부처가 된들 무슨 소용이 있고, 자기 혼자 부처가 되어서 무엇 하냐"고 꾸짖으며 죽은 불교가 아닌 산 불교를 주창했다.

"불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실천하는 종교다."

<한겨레>, 2015년 8월 27일 자 기사: 선승의 죽은 수행 꼬집은 오현 스님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여러 민족을 멸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땅을 네게 주시므로 네가 그것을 받고 그들의 성읍과 가옥에 거주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 가운데에서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길을 닦고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 살인자가 그리로 도피하여 살 만한 경우는 이러하니 곧 누구든지 본래 원한이 없이 부지 중에 그의 이웃을 죽인 일,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의 이웃을 맞춰 그를 죽게 함과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원한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하지 아니하나 두렵건대 그 피를 보복하는 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잡아 죽일까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기를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라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혀 네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땅을 다 네게 주실 때 또 너희가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의 길로 행할 때에는 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이같이 하면 그의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이웃을 미워하여 엎드려 그를 기다리다가 일어나 상처를 입혀 죽게 하고 이 한 성읍으로 도피하면 그 본 성읍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거기서 잡아다가 보복자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할 것이라. 네 눈이 그를 긍휼히 여기지 말고 무죄한 피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 곧 네 소유가 된 기업의 땅에서 조상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고 말하면 그 논쟁하는 쌍방이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당시의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세 문단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지요? 1) 무죄한 살인자를 구제하기 위해 도피성을 마련하라. 2) 그러나 악의로 살인한 자라면 반드시 보복하라. 3) 살인으로부터 확대된 법리로 모든 먹고 사는 경제의 기초 곧 조상이 정해 준 토지의 경계를 지킬 것과 나아가 여기로부터 비롯하는 모든 악, 모든 죄와 그에 얽힌 거짓에 대하여 그들이 악의로 행한 그대로 갚으라는 명령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려는 요지는 이러한 악과 죄와 거짓이란 분명히 존재하고 지속적으로 악한 영향을 끼치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평화주의, 아나키즘, 생태주의, 페미니즘, 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 개혁주의자, 자유주의자…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너무나도 분명히 존재하는 악과 죄이고 그것을 행하고 있는 인간들입니다. 그것들은 정상을 참작하여 구제를 받아야 할 자들을 제외하곤 반드시 그 행위에 상응하는 처벌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이같이 하면 그의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가 됩니다.

이 원리, 곧 죄와 악과 거짓에 대하여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가하지 아니한다면 그것이 지속적으로 세상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원리는 신약에 와서도 바뀌는 게 아닙니다. 물론 신약시대의 사회구조나 시대상 자체가 이미 구약시대의 율법을 그대로 집행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정통파라할지라도 율법의 실천에 대한 새로운 해설과 해법이 필요해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처럼 율법이 사라졌다거나 폐해졌다는 게 아닙니다.(마 5:17) 동시에 모세 율법을 문자 그대로 시행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세계의 원리이지요? 그에 입각해 있음입니다. 시대가 변했든 사회가 변했든 구조가 달라졌든 죄와 악과 거짓이 용인될 수도 없고 용납될 수도 없는 겁니다. 사회적으로 시대적으로 그것을 용인하고 용납하고 어쩔 수 없다고 한들 죄와 악과 거짓의 영향력이 그런 사정을 봐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은 문명개화했기에 그것들을 구약시대만큼 확실히 제해 버리지 못한다면, 그만큼 이 세상은 종말론적인 말법(末法)의 세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사정을 간직하고, 이런 정신을 고수하고, 이러 훈육과 교훈으로 사람들을 교화하고 계몽시키고 이끌어 가야 할 기관은 결국 종교(교회)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법에 의지할 수도 없고, 경우와 인정과 의리에 호소할 수도 없고, 양심과 도덕과 윤리에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 세계의 이 원리를 자각하고, 그에 따라 사는 자들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더 이상 현실의 제도로 구현할 수 없게 된 이 원리는 그들의 믿음 안에서 조상들의 경계석처럼 그대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 원리가 곧 사랑이고, 화해이고, 용서이고, 그 사랑과 화해와 용서만이 처음 목적하는대로 이 땅에서 죄와 악과 거짓을 제한 하나님나라를 회복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원리에 반한 사상이 싹트고 창궐해 자라났지요? 그것이 바로 무조건적인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외치는 죄인들과 악인들과 거짓말하는 자들의 이데올로기입니다. 그것은 겉으로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과실"(창 3:6)과 같아서 많은 사람들이 그 사상에 매혹됩니다. 이른바 목적 없는 평화주의, 목적 없는 아나키즘, 목적 없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 같은 것들입니다. 세상에 목적 없는 평화가 어디 있습니까? 목적 없는 무정부주의가 어디 있습니까? 목적 없는 화해와 용서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 원리와 그에 따르는 진리를 맡은, 그토록 막중한 사명을 지닌 교회 안에서조차 세상 정신에서 힌트를 얻은 새로운 인간들의 새로운 강설이 득세하기 시작했습니다. 곧 믿음 말고는 모든 것에 대하여 사랑과 용서와 관용해야한다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들은 여기서 믿음을 교묘히 왜곡시켜 버립니다. 본래 믿음이건 소망이건 사랑이건 각기 다른 출처에서 나온 다른 장르가 아닌데도 그들은 믿음을 따로 떼어 거기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합니다. 하나님을, 예수를 잘 믿기만 하면 모든 게 용서고 화해고 면죄되는 겁니다. 그러니 특히 사랑(용서)은 언제나 자신들(혹은 자기편)의 면죄에 이용되는 실용적인 개념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믿음으로 결산되는 겁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인격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원리를 왜곡시킨 그 대가를 다시 자기들이 받게 됩니다. 그 결과 그토록 사랑을 외치는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사랑에 인색한지, 인색하게 변해가는지, 오직 자기들만 모르게 됩니다.

4.

사도 바울은 '사랑'을 설명하는 첫머리에서 이렇게 '사랑의 왜곡'에 대하여 반박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1~3)

피상적인 인식의 차원에서는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는 게 사랑의 증표입니다. "예언하는 능력과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야말로 사랑의 증거가 아닙니까? 그 다음이 더 기가 막힙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 주는 것" 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뭐가 사랑입니까? 그러나 바울은 아무리 그러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but have not love)", 이렇게 논리를 전개해 나갑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 무엇입니까? 이걸 정리하지 않고, 그 다음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로 넘어가게 되면 그때부터는 아예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겁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인간이 해 보는 모든 거룩한 행위의 시기가 끝나고 시효가 끝나고도 남는 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원리이고 기초입니다. 곧 사람이 행하거나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행할 수 없고 소유할 수 없고, 부단히 다 함께 그것을 추구하고 연구하고 공부하며 나가야 그 궁극의 사랑이라는 세계와 맞닿는 것이지, "사랑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거나 "우리는 이 정도로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자랑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물며 사랑을 빙자하여 죄와 악과 거짓을 사랑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떨까요? 혹은 이런 말을 하면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고 항변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언제든지 이런 말씀을 들려주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고전 14:8)

5.

최근 들어 우리 믿음의 교회 내에서 저명한 지도자들이 돈·명예·욕망·권력에 얽혀 물의를 빚고, 구설수에 오르고 비난 받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우리사회에는 그와 동일한 죄와 악과 거짓의 사람들이 마치 우리를 둘러싼 잣나무 숲처럼 무성히 창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것을 용서한다고 해도 존재하는 악이며 병폐입니다. 그것들은 그와 같은 실존으로 현재하여 우리 교회와 사회에 지속적인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비록 내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생각지 않는다 해도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계를 어둡게 하고 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부질없고 쓸데없고 불필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우리의 환경이 돼 버린 악과 병폐에 대하여 우리는 사랑이니 용서를 논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 사랑과 용서로 악과 병폐가 극복될 수 없고, 설령 우리가 용서한다고 해도 저 무성한 잣나무 숲이 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비바람이 치면 그것들은 우리를 덮치고 우리를 향해 쓰러질 겁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이토록 중대한 하나님의 진리를 가진 우리들의 교회 안에서 지금 무슨 비겁한 변명들이 오가고 있습니까? '심판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신다', '용서는 하나님의 명령이고 인간의 의무이다'라는 설교를 자주 접하게 됩니다. "타인을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라는 비판 저지용 설교가 난무합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을 돌로 치라"는 말씀은 그 본뜻과 너무나도 다른, 면피용 말씀으로 가공된 전가의 보도가 돼 버렸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설교한답시고 영감된 경전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데도 감동이 하나도 없고 듣기가 싫은 겁니다. 자기 영혼에 감동이 없으니 예배당을 치창하고 목소리를 웅장하게 꾸미고 연출된 분위기로 그것을 메우려 하는 겁니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 걸까요? 지도자들은 그렇다 치고 평신도들은 심지어 그런 지도자를 욕하면서도 왜 그 자리에 꾸역꾸역 모여드는 걸까요? 친밀한 벗들과의 사교성(교제권) 때문이라고요? 설교시간만 참으면 된다고요? 아닙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저는 '투사(投射 Projection)의 전염병'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투사가 뭡니까?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대상에게 투사하는 겁니다. 아직 표면에 공개되지 않았을 때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미 문제가 발생해 세상의 비난과 비판이 쏟아지는 지도자라면 이제부터 그가 하는 모든 설교는 자기변명, 곧 궁색한 자기 투사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이 성추행이든 표절이든 횡령이든, 이제부터 그의 설교는 하나님 말씀을 빙자한 자기 투사라는 겁니다. 그러나 지도자들만 그렇게 사는 줄 아십니까? 영과 영은 진리와 거짓을 속일 수 없지만, 자기를 속이는 이러한 지도자들의 투사는 성도들에게 혼돈을 유발합니다. 직관과 분별력에 마비가 옵니다. 자기들 안의 그러한 죄와 악과 거짓에 대한 일깨움이 일어나도 모자랄 판에 변명이 일어나고 투사가 발산되고 모종의 합의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목사와 성도가 서로에게 투사하는 거짓과 속임에 의해 서로서로 추켜 세우며 거짓과 속임을 적당하게 유지하게 됩니다.

표면적으로 '심판은 오직 하나님이 하신다', '용서는 인간의 의무'라는 설교는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릴 겁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말씀은 실천해서 돌아올 유익이 있기 때문에 나온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자신들의 변명과 비난에 대한 방패로 타인들에게 투사하게 될 때 어떤 유익이 돌아올까요? 이 세계에 만연된 죄와 악과 거짓의 병폐는 누군가를 괴로움과 고통의 희생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고달프고 괴롭고 울부짖는 희생자들을 어떻게 대접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현대사는 어떻게 해 왔습니까? 그것들을 어떻게 청산해 왔습니까? '심판은 오로지 하나님이 하신다', '용서는 오직 인간의 의무'라는 설교에 따른다면, 결과적으로 이 세계는 점점 악화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설교는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멉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1~3절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자, 누가 누구를 비판하는 걸까요? "먹는 자"란 믿음의 경지가 높기 때문에 '먹지 않는 자', 상대적으로 믿음의 경지가 낮은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먹지 않는 자들은 자기들이 먹지 않음으로써 먹는 자들보다 믿음이 신실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사도의 입장에서 그들은 오히려 믿음이 연약한 자들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비판하는 자들은 비판 당하는 자들보다 높은 경지에 있습니다. 곧 '비판하지 말라'고 설교하는 자들이 높은 것이 아니라 비판하는 자들이 높은 것입니다. 만일 죄와 악과 거짓의 병폐로 지탄을 받는 자들이 '심판은 하나님만이 하신다', '용서는 인간의 의무이다',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적반하장이 됩니다. 곧 믿음이 연약한 자가 믿음이 높은 자를 판단하고 비판하는 수준의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을 들어야 할 사람은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설교하는 자들이 아니라 '남을 비판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남을 비판하지 말라", 실제로는 자기를 비판하지 말라고 설교하는 자들은 무슨 말을 들어야 할까요? 그들이야말로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할 자들이 아닐까요? 만일 정직한 영(양심)을 가졌다면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스스로 비판을 받았을 겁니다. 자기변명에 의한 투사를 그치고 자기 혼돈에서 해방됐을 겁니다. 여러분이 정말 믿음이 있는 분들이라면 우리와 우리의 교회와 자녀들을 위해서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양심과 영혼의 직관에 따라 아브라함처럼, 사라처럼 믿음을 위해 자기 집과 소유와 안락함을 버리고 길을 떠나야 합니다. 아무 할 역할도 없으면서 머릿수를 채워줄 뿐인 객석에 앉아 자기 혼돈을 심판 받지 않는 은혜라 착각하지 마십시오. 성도의 혼돈 자체가 다시 교회의 투사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왜 오늘날 신새벽부터 세상에 달리 없을 믿음의 모본을 강조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 대신 돈과 머릿수의 유치찬란함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인지, 돈과 광고와 요란한 이벤트 하나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곳은 언제나 외롭고 쓸쓸하고 형세가 고독한 것인지, 왜 이런 왜곡과 굴절이 발생하는 것인지, 여러분 스스로 잘 헤아리셔야 합니다.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는 "어찌할까, 어찌할까 하면서 어찌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나도 어찌 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마음의 성찰 없는 자기변명의 투사입니까, 누군가의 자기변명이 투사된 혼돈입니까? 작고하신 어떤 목사님이 자신의 수제자에게 마지막으로 던졌다는 질문을 여러분에게 던지고 싶습니다. 투사입니까, 혼돈입니까? 여러분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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