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하고 고요한 방 한 구석에서 촛불이 하얗게 타고 있다. 그 뒤로 십자가가 있고 아래에는 성경이 펼쳐져 있다. 찬송가의 잔잔한 음향이 골방의 공기 중에 차 있다. 나는 매일 아침 나의 골방에 들어와 성경을 읽는다.

한동안은 성경을 얼마나 많이 읽느냐는 것에 욕심을 냈다. 내용보다는 몇 번을 읽는다는 실적이 중요했다. 십 년 전이었다. 신약을 요한계시록까지 포함해서 서른 두 번 읽었다. 성경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직장에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읽고 또 읽었다. 고시공부 하듯 요약도 했다. 한 주제에 대해 사법시험에서 하듯 논문을 쓰라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자부심이 들었다. 그러나 정작 본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성경은 지식으로 해석하는 책이 아니었다. 논리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했다. 나는 아무리 성경 속에서 찾아봐도 진리를 찾지 못했었다. 아니 진리라고 생각되는 게 약간은 있었다. 그러나 실망스러웠다. 불교의 경전이나 철학에서 나오는 깨달음이나 처세의 진리에 비하면 그건 너무나 적은 양이었다. 대학교수가 3년을 강의했다면 그 내용은 상당히 여러 권 분량의 책일 것이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성경에 나온 예수님의 말만 간추린다면 한시간 분량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그 진리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일까 방황하며 찾아 헤맸다. 로마의 역사를 읽었다. 유명한 신학자 과르디니가 쓴 <주님>이라는 책도 정독했다. 플라톤부터 시작해서 철학도 문 두드려 봤다. 성서연구가들이 쓴 해설서도 읽었다. 심지어 인도의 구르 라즈니쉬가 그의 시각에서 쓴 예수의 해석도 살폈다. 사보나롤라, 마틴루터, 웨슬레, 프란체스코 같은 위대한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의 전기도 읽었다. 일제시대 주기철 목사의 삶도 책을 통해 살펴보았다. 그 어떤 것도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는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나는 다시 성경 자체로 돌아갔다. 많이 읽으려 하지 않고 매일 한 장이나 두 장씩 죽을 때까지 꾸준히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은 강해서가 아니었다. 꾸준함이 엄청난 일을 해내는 것이다. 마태복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발견을 한다. 생각지도 못했던 금맥들을 찾는 기분이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의 삶이 다시 보였다. 하나님은 시간적이나 공간적으로 제한된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예수를 보냈다. 말먹이통에서 태어나야 할만큼 천대받는 입장이었다. 가난하고 천한 신분의 목수였다. 놀림과 침뱉음을 당하는 모욕, 폭행과 십자가에서의 억울한 사형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그게 성경이 나에게 보여주는 메시아의 인간 세상에서의 모습이었다. 예수는 우리 각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라고 했다.

나는 얼마 전 인사동에서 한지로 된 자그마한 공책 한 권을 샀다. 공책의 표지에는 '수모 백 번 감당'이라고 검은색으로 굵게 썼다. 나는 누가 내게 침을 뱉었을 때 참을 능력이 없다. 그게 비록 내가 잘못한 경우라고 할지라도. 내게는 예수나 사도들이 당한 엄청난 박해의 천만분의 일도 인내할 용기가 없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내게 다가오는 간단한 수모 정도는 참아야 성경의 희미한 그림자라도 밟을 것 같았다.

나는 변호사다. 그런데 이 법조인이라는 직책은 항상 위신과 자존심을 지키려고 전전긍긍한 직업이다. 경찰에 가서 망신을 당하지 않을까. 법원에 가서 방청객들이 보는 가운데 자존심을 다치지 않을까. 상담객에게 모른다고 수모 당하지 않을까 항상 걱정이 앞섰다. 숫탉이 허세로 털을 곤두세우듯 항상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런 허위의식은 항상 사람을 소극적으로 만들었다.

다시 읽기 시작한 성경은 내가 해석하는 게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하나님이 이해시켜 주시는 책이었다. 나는 십자가의 그림자로서 수모를 당하기 위해 찾아 나섰다. 법정에서 어떤 판사는 신경질적으로 질타했다. 예전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속으로 불끈했었다. 지금은 달라졌다. '이 정도 가지고 수모라고 판단해야 할까 말까'. 나는 공책에 써넣을 가치 기준을 가지고 고민했다. 조금 더 당해야 쓸 가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예상외의 반응이 왔다. 담당 재판장이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생각하는 내게 "미안합니다"하고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수모책에 올릴 한 건을 잃어버린 것이다.

철학이나 다른 종교 수행에서는 고통을 참거나 피할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성경은 고통과 마주칠 것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다가온 현실과 정직하게 마주칠 때 이미 그것은 고통이 아니었다. 성경읽기를 통해 나는 진리를 발견하고 마음의 평화와 희락을 얻는다. 그 속에 모든 답이 들어 있었다. 하나님은 배웠다고 하는 교만한 사람에게는 그 뜻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루터 때부터 이중적, 삼중적, 심지어는 성경의 사중적 해석론까지 주장했다. 성령이 구원의 영이 임할 때는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도 어린 아이라도 성경의 비밀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불같이 뜨거운 성령의 체험을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른 새벽 성경을 펼쳐 들었을 때 그 말들에 깊이 빠져드는 걸 체험한다. 성경을 탐닉하는 것으로 내게 이미 성령이 들어왔음을 느낀다. 성경에 관한 책을 읽을 게 아니라 성경을 읽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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