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을 때,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막으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칭찬하셨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는데, 아브라함은 그 시험을 잘 통과하였다. 아브라함의 답안지를 받으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합격이라고 평가해 주신 것이다.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제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게 되었다니?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었던가? 어떻게 전에는 잘 몰랐는데,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하는 그 모습을 보고서야 아브라함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하셨는가? 성경은 왜 하나님의 지식이 제한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표현하는 것일까?

놀랍게도 성경에는 이런 표현이 많이 나온다. 창세기 18장에는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하여, 과연 그러한지 내려가서 모든 사실을 확인해 보고 알기 원한다고 표현돼 있다(창 18:21).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고된 노동으로 탄식하며 부르짖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과 맺었던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표현하기도 한다(출 2:23-25).

반면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했다. 굳이 대답하지 않더라도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께서 이미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omniscient) 분이시다. 만일 하나라도 모르는 게 있다면 그분은 하나님일 수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 있다(히 4:13).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다고 표현한다(마 10:30). 우리가 앉고 일어서는 것도 알고 계시며,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알고 계신다고 표현하고 있다(시 139:4). 우리가 기도하고 간구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유익한지 잘 알고 계신다(마 6:8).

그런데 성경은 동시에 하나님의 지식이 제한적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표현이 있다. 하나님께서 잊으실 수 있는 분으로 보이는 표현도 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표현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지은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한다(사 43:25). 이런 표현은 실제로 하나님의 지식이 유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들이 이해하기 좋도록 표현한 것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악을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표현은 실제로 하나님이 어떤 사실을 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그러지지 않고, 마치 죄를 전혀 기억하지 않는 분처럼 우리를 사랑으로 품어 주실 것이라는 표현이다. 우리들에게는 불가능하다. 한 번 섭섭한 관계가 되거나, 불편한 관계가 되면 아무리 빨리 회복하려고 해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관계할 수 없는 것이 우리 마음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치 우리가 전혀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대하시고, 그 상태를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기억조차 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 조상과 세운 언약을 기억하셨다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잊고 계시다가 이스라엘 민족이 부르짖자 그때서야 하나님께서 언약이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고통 가운데 울부짖을 때,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구원의 역사를 실행에 옮기셨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 인간이 볼 때에는, 마치 하나님께서 그때서야 언약을 기억하고 행동하시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마음을 모르고 있다가 시험을 통과한 이후에야 그 마음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좋은 성적을 거둔 사람에게 상장과 트로피를 주면서 치하하듯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표현인 것이다. 좋은 업적에 대해서 상장과 부상을 주면서 그 공로을 인정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하고 인정하는 표현일 뿐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악인은 두려워해야 한다. 자신의 악행이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고 해서 안심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위로를 얻고 소망을 가져야 한다. 이 세상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신원하여(vindicate)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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