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떤 중요한 질문을 받게 될 때, 자신의 입장을 표명해야 할 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는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거기엔 무의식과 인격에 관한 많은 정보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숨겨진 진실을 표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격의 가치 같은 비밀까지 보여 줍니다. 때문에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무의식적 욕구에 의해, 주관적으로 고정된 이미지와 선입견에 의해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면 세상은 복수와 위선의 말들로 가득 차고 말 것입니다. 최소한 한 차례 이것을 여과해 주는 장치가 양심이지요? 거리낌으로 스스로가 자기를 개선하도록 하는 장치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서 이 양심이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즉각적인 욕망의 반응이 너무나 강해서 양심의 소리가 묻혀 버린 겁니다. 고장 난 여과 장치. 거기서는 실존의 고뇌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욕망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여과 장치가 없기 때문에 자기가 절대적으로 의롭고 올바르게 인식됩니다. 곧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 이미지가 함유하고 있는 의미와 그 참소리를 듣지 못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0절에서, 방언을 설명하던 바울은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설령 특별히 기획된 의도나 생각 없이 그저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것 같은 방언이라도 거기엔 다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겁니다. 이런 걸 영혼의 소리, 또는 심령의 소리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겉으로 표현되는 음성적 도구는 직접적인 의미를 나타내진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감각 있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숨겨진 의미를 곧 파악합니다. 곧 영성은 일종의 분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은 겉으로 표명되는 말이 아니라 그 말의 분위기를 진정한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마음과 마음이니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니 하는 말들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감정들, '희(喜)노(怒)애(愛)락(樂)애(哀)오(惡)욕(慾)'은 반드시 언어로써만 표현되는 게 아니고 도리어 대부분의 실제적인 표현은 영적으로, 분위기로 전달됩니다. 따라서 영성이 깨어 있으면 그 영의 분위기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요, 영성이 죽어 있으면 겉으로 표명되는 말에 매달릴 겁니다. 자기에게로 소급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성이 깨어 있으면 자신의 영의 진실을 느낄 것이요, 영성이 죽어 있으면 무의식의 욕망이 내뱉는 거짓된 말이나 명분에 매달려 살게 될 겁니다.

여러분은 말 한마디 없이 단지 곁에서 차 한 잔을 마셔도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는 의식만으로도 감격할 정도로 내 마음을 알아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종일을 함께 떠들어도 공허할 뿐이었던 경험들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이, 표면적인 행동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영의 진실 곧 인격이 중요합니다. 동시에 인격이 훌륭하다는 것 역시 말이나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영의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라고 할 때, 혹은 기독교 복음이라고 할 때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첫 번째 이미지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무엇을 통해서 확인하십니까? 그것이 자신의 영, 곧 인격의 본질로서의 참됨과 그 참됨이 스스로 혹은 타인들에게 풍기는 분위기를 일깨워 주는 것이라면 좋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기독교적 변화라는 것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체험이 될 것입니다.

2.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오늘의 본문을 편의상 네 문단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습니다. 정리해 보면 1)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복음의 권능을 주셨다. 2) 복음을 전파하되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3) 대가나 결과를 기대하지 말라. 4)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복음의 권능이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말합니다. 곧 사람의 속에 있는 것들을 치유하는 능력이지요?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는 아까 말씀드린 고장 난 여과 장치 때문에 무의식의 노이로제가 양심을 짓누르는 상태, 곧 병적인 양상이 겉으로 분출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러한 말씀으로 우리는 정신상의 심각한 억압이라든가 심리적인 고통이라든가 더 나가서 거기서부터 발생하는 모든 질병에 관한 복음적 입장을 유추할 수 있겠습니다. 곧 복음(하나님나라)은 인간 실존이 안고 있는 고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그것을 인간 존재의 보편적이고 중점적인 문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은 것은 복음의 과녁을 벗어난 빗나간 화살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또 인간 존재의 중점적이고 보편적인 문제인 고통은 개별적 인간의 심령, 곧 본질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인격을 이루는 과정 가운데 뭔가 잘못된 결함이 발생했는데 복음은 그것을 치료함으로써 인격을 치유하고 인간을 회복시킨다는 겁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를 첨가한다면, 이러한 병적인 고통이 인격의 표면으로 분출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렇지 않은 인간들에게 상처를 받음으로써 그렇게 되었고, 그렇게 됨으로써 다시 그렇지 않은 인간들에게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동료 인간으로서 인간의 세계에 참여할 기회와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을 고쳐 준다는 것은 동시에 이 세계의 병적인 양상과 과정을 들추어 내는 일입니다. 곧 복음의 권능으로써 병을 고친다는 것 자체가 이 세계가 돌아가는 현실에 대해 반역적이고 혁명적인 행위라 이 말입니다.

그 다음.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에게로 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줄이면 '복음을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자들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들은 오히려 복음을 가졌다고 하는 자들 가운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고통 가운데 소외를 당하면서도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도리어 교회 안에서 유지되는 고통과 소외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최종적으로 교회 안에서 최고의 믿음을 내세우는 바로 그들이 자신들에게 복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이들이 이스라엘의 때나 한국교회의 때나 교회와 교회 권력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곧 시대적 영성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는 겁니다. 보다 더 즉물적으로 말하자면 대형 교회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들이야말로 복음을 필요로 하는 병적인 상태의 정점에 있는 셈인데, 그들은 스스로 최고의 복음을 가졌다고 굳게 믿고 그것으로써 마치 현대판 네피림처럼 초인적이고 신적으로 과장된 유세를 하기 때문에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겁니다. 그 상태에서 기독교인이면서도 복음의 권능으로부터 소외되고 고통당하면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 발생하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전체적인 기만적 영성의 분위기를 비로소 바꿀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서 전파하라는 명령은 한층 더 반역적이고 혁명적인 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가면서 전파할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은 종말론적인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 종말론이 세상을 환기시킴으로써 사람들이 사람살이의 핵심적인 문제로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것이 사람들의 고통입니다. 그것을 치유해야 한다는 겁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업이 아니라 한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문둥이를 깨끗케 하고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이런 일 자체가 천국이지 이런 일을 통해서 결과물로 계산되는 어떤 이득이 천국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 일에는 사적인 야망이 개입될 수 없고, 이익이 계산될 수 없고, 심지어는 눈에 보이는 결실이나 칭찬이나 사례에 대해서도 초연해야만 하는 겁니다. 만일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이 메시지 자체를 위협하고 복음을 밥벌이와 자아실현과 출세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겁니다. 부름을 받은 자로서의 이러한 사역적 자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방식 역시 이 세계와 세상의 방식에 있어서는 반역적이고 혁명적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3.

그러므로 제자들을 내보내시는 주님의 마지막 당부가 이해할만 합니다. 곧 복음을 품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혹은 반복음적인 교회 안에서 어떤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까?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이리 가운데 보내진 양입니다.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이리 가운데 보내진 양 같은 처지라는 겁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삶의 위협, 경제의 위협, 뿐만 아니라 곧 이어 나오는 문장에 보면 '사람들을 조심하라. 그들이 너희를 법정에 넘겨 주고, 그들의 회당에서 매질할 것이다. 또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갈 것이다'까지 가는 겁니다. 만일 이 말씀이나 복음을 단지 사회적 봉사나 좋은 일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려야 일어나지를 않지요. 복음의 목적은 우리들을 세상이라는 이리의 소굴 가운데 ― 특히 우리들의 교회 안에서부터 ― '양'으로 보내는 겁니다. 양인 것만으로도 위험천만인데 이리 가운데서 이리에게 붙들린 양들을 돌보라는 겁니다. 곧 세상은 그런 양들을 희생시키고 고통하게 함으로써 굴러가는 법인데 그러한 구조를 드러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뱀 같은 슬기와 비둘기 같은 순결이 아니면 자기를 유지하고 지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와 핑계 속에 부대끼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거나 세상과 하나가 되어 스스로 교회와 복음의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입니까? 양입니까? 이리입니까? 복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과 삶의 방식은 위협을 받습니까? 여러분의 시선과 실천은 삶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해 있습니까? 속지 마십시오. 깨어나야 합니다. 수적인 흥청거림과 건축물의 위용과 천문학적 수입으로 운용되는 돈의 기만적 역사에 매혹을 느껴 의지하고 싶어선 안 됩니다. 그들은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우리가 얼마나 대단하냐. 우리의 업적을 보라. 우린 남들이 못하는 일들을 한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수백억 대의 돈을 비축해 놓고 지게를 지고 일꾼의 퍼포먼스를 한다고 하나님의 진실한 종이 아닙니다. 그건 지게에 대한 모독이지요. 지게 지는 사람에 대한 모욕입니다. 홑옷에 샌들 하나 신고 밀 이삭 훑어 먹으며 풍찬 노숙하신 예수님에 대한 기막힌 배반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린도후서 11:13~15)

4.

우리가 복음과 복음이 제시하는 삶의 방식, 존재의 방식을 자신의 구원으로 받아들이고 의식화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유지해 나가는 데 새로운 어려움이 생겼을 겁니다. 곧 삶의 방식, 존재하는 방식, 사유하는 방식이 달라졌다고 하면서 실제로 사는 데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믿는다는 것이 관념과 말의 문제일 뿐 실제로 달라진 게 없는 기만이라 이 말입니다. 이런 사람이 전파해 봤자 말과 관념을 전파할 뿐이지 영성을 일깨워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과 복음이 제시하는 삶의 방식, 존재의 방식을 자신의 구원으로 받아들이고 의식화하게 되면, 지금까지 관성적으로 생각과 표현, 곧 마음의 온갖 애증을 처리하는 방식에서부터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다른 사람에게 비난을 하거나 아첨을 하거나 복수심같이 양심의 여과 없이 분출되는 숨겨진 의도의 말들에 제동이 걸리게 됩니다. 이제는 무의식에서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대로, 그것이 선의든 악의든 선과 악을 분간 못 할 '내 마음 나도 몰라'이든 곧바로 행동하지 못하는 겁니다. 전에는 그런 욕망의 처리를 제대로 확실하게 하지 못하는 그 사실만이 괴로웠겠지만, 이제는 자신의 실존이 여전히 옛사람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 때문에 괴로워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 책임이고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 자기 죽음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을 통해서 복음적 치유와 회복, 성장이 이루어집니다. 곧 전에는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했던 동물성과 야수성과 잔인함과 비열함과 교활함과 경박함이 이제는 자기에게서 발견되는 겁니다. 그러니 말보다는 침묵을, 표현보다는 사색을, 행동보다는 존재를 선택하게 됩니다. 전에는 'Doing'이 최우선적 문제였지만 이제는 'Being'이 우선의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변화에 대해 홀로 생각하게 될 겁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이러한 십자가의 도리를 깨닫게 된다면 세상은 천국이 되겠지.' 그러나 동시에 자기 자신 안에서부터 이 천국을 미워하고 천국이 오는 것을 싫어하는 원수 마귀가 역사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겁니다. 곧 진리에 대한 마귀의 마지막 발악이요 복음에 따르지 않으려는 거센 저항이 일어납니다. 항상, 진리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 두 가지가 자기 안에서 동시에 역사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겁니다. (그 이전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18~25)

우리는 다른 사람이 이런 자기 고백을 하면 그것을 매우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만족스럽게 여길 겁니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발견할 때는 견디지를 못하고 그것을 은폐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에 의해 그러한 은폐의 결과를 다시 생산하게 됩니다. 도덕을 내세우던 사람이 그로 인해 가장 부도덕하게 밝혀지고 사랑과 용서를 내세우는 사람이 그로 인해 잔인한 갑질의 인간으로 드러납니다. 청빈한 덕성을 지닌 자기희생의 인격자로 알려진 지도자들이 그로 인해 실제로는 탐욕스러운 졸부들로 드러납니다. 그런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평상시 삶이나 메시지에 사도 바울과 같은 자기 실존의 고뇌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실존의 고뇌가 없다는 것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은폐되어 있다는 것일 뿐입니다.

5.

어떤 사람들은 매우 낮은 단계의 의식 수준의 문제들에 얽매여서 시달립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인간은 동일한 노이로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독실한 신자라도 평상시에는 그런대로 괜찮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믿음이 어디로 갔나 싶을 정도로 병적인 상태에 빠집니다. 그런 사람들은 말씀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처음부터 새로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적 입장에서 상습적으로 반복되는 신경증들은 바로 그러한 인격의 현실에서 벗어날 것을 요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곧 자기 안에서 양심이 자기에게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다그치는 것이지요? 동시에 하나님의 신적 부르심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실존의 고뇌를 근원적으로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입니다.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데 믿음이 있으면 기도 응답에 매달리는 기복주의를 면할 수 없을 겁니다. 근원적으로 본다는 것은 표면적인 문제들로부터 고비원주(高飛遠走)한다는 의미입니다. 자기를 얽어매고 주저앉히고 삶을 한계 짓는 인격의 문제들로부터 높이 날고 멀리 달아나서 그것들이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자기의 온갖 실존적 고뇌를 믿음이 좋다는 식으로 가리는 게 익숙해진 다음에는 고칠 약이 없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지금 실존의 고뇌가 없습니다. 믿는다고 큰소리치기만 하면 자기의 모든 문제가 다 가려지는 줄 알고 맹목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래서 경솔하고 경박하고 무례하고 겸손치 못합니다. 이 무례하고 겸손치 못한 사람들이 사랑이니 겸손이니 희생이니 봉사니 하는 말들을 제멋대로 사용합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저 광휘로운 강단에 올라서서 자기모순과 빈약한 지식과 콤플렉스의 역동으로 스스로를 과시하는 위대한 도덕군자들, 광신자들, 그리고 개혁자들이 실은 부도덕하고 내용이라곤 하나도 없는 공허한 궤변론자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차라리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말씀에 비출 때, 그들이야말로 종말론적 복음의 걸림돌이고 개혁 대상이고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 사단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인격에는 언제나 빛과 그림자가 같이 다니는 겁니다. 자신을 정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비정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높다고 과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낮은 사람인 겁니다. 노이로제에 시달리는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자기 안의 주관적인 욕망과 좌절로 온갖 부패와 무지몽매와 파괴적인 일들을 벌이지만,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서는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그들이 곧 이 세계의 폭력과 희생과 갈등과 투쟁과 전쟁을 일점 양심의 의혹도 없이 지속시키는 자들입니다. 거기에 축복하고 거기에 열광하고 거기에 찬동하고 거기에 매혹되고 그것으로써 치부하고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에게는 한 점의 고뇌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무언가 적대적인 대상, 잘못된 타자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이 이단이고 동성애고 종북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신앙에 가담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동원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 개인의 실존적 고뇌가 사라진 집단의 기복주의야말로 개개인들의 노이로제보다 훨씬 더 무섭고 지겹고 끔찍한 집단적 노이로제인 겁니다.

더 이상 마취제 같은 믿음을 내세워 우리들 개인과 시대적 실존의 고뇌를 은폐하려는 기복주의 신학에 속지 마십시오. 물들지 마십시오. 그것은 결국 여러분 자신을 복음으로부터 소외시킵니다.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필요 없이 오로지 주님만 잘 섬기면 된다고 하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다 잊어버리고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라고 선동하는 사람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친구도 가족도 이웃도 없이 추구할 천국은 더 이상 천국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로지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침으로써 친구 한 사람 갖지 못한 채 노년을 보내는 사람들을 여럿 알고 있습니다. 물론 자기는 하나도 외롭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거짓말은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일생을 남들이 갖지 못한 높은 진리를 소유하고 믿음이 뛰어났다고 자부하던 그들이 왜 그렇게 외롭게 되었을까요? 교회를 떠나면 우리 기독교도들은 무엇이 될까요? 정녕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인가요? 우리는 그런 식으로 다음 세대와 청년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스스로 자기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 얼마나 바보 같은 짓입니까? 여러분은 이리의 세상에 양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진리의 복음과 하나님나라를 건설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합니다. 제발 성경이 '양'이라고 하니까 그것이 비유인 줄도 생각지 못한 채 자기들이 진짜 양인 줄 알고 '매애애~' 순진한 소리나 내는 어리석은 평신도들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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